지난 8월 초 휴가로 경주에서 청도로 넘어가는 20번 도로를 달려보았다. 고향 지나는 길이라 언젠가는 달려보리라 생각했던 길이다. 가다 보면 울산과 청도로 이어지는 길이기도 하거니와 조금만 더 가면 비구니 산사 석남사, 운문사에도 다다르는 곳이다. 혹자는 가을철 단풍도로로는 대한민국 최고라 칭하는 그 길이기도 하다. 도로번호가 짝수인 만큼 궁극으로 동서로 연결되는 도로라는 뜻을 가리키지만 건천에서 산내로 가는 길은 남쪽으로 나 있는 길이다. 산내 의곡을 지나 서쪽으로 틀면 울산이고 동쪽으로 향하면 청도이다. 태풍을 담고 온다는 소식인 듯 간간히 내려 적시는 보슬비가 더하는 날이었다. 달리는 내내 오래된 옛 얘기 꺼내듯 대략 40여년 전엔 많이 듣고 자라 참으로 익숙했었던 지명 하나둘 이정표로 보이곤 하였다. 물론 지도상에선 익숙한 지명이 많이 사라지고 없었다. 이젠 한글과 영어가 합성어로 된 족보에도 없는 지명과 이름들이 흔하게 열거되기도 한다. 아마도 이는 도로 중심의 주소체계를 사용한 것도 한몫했다는 생각이다. 절골, 단석산, 신선사, 우중골, 땅고개, 어머리, 산내, 감산(감지), 의곡, 내일, 대현, 장승백이... 지역특성을 반영한 방언이 곁들인 지명들이 나열된다. 산내 의곡에서 방향을 틀어 다시 동북으로 경주시 서면 관내로 방향을 틀면 내칠, 우라, 천촌(샘골), 아화, 도리를 거쳐 가마골, 모길, 돈지, 가척, 수룡골로 이어지는 건천 신평리 앞 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오면 읍내이고 20번 도로와 만나게 된다. 건천 서쪽의 사적 25호로 지정되어 있는 부산성(富山城)을 중심으로 크게 한 바퀴 돌아오는 셈이다. 부산성은 오봉산, 주사산 두 산으로 큰 형태의 고원 평탄면을 이루고 있어 제법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어, 신라시대 때 경주 서쪽 방향을 방어하는 중요한 전진기지였음도 알 수가 있다. 어린 시절, 근 20년을 이곳 산천에서 태어나고 자랐음에도 익숙치 않은 새 이름이 한둘 더 있다. 편백나무숲과 진목정이다. 하나는 송선리 선동(仙洞) 동네를 비켜나는 즈음에 자리한 편백나무숲이다. 40년 전엔 들어보지 못했던 이름인데, 지금은 나들이 장소로 또는 산책길로 제법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10년을 내다보려면 나무를 심어라는 고전이 비유될 정도이다. 짧게는 십 년, 이십 년을 내다보고 자연을 가꾸면 우리 산천도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뜻이다. 살아 있는 당대의 노력 여하에 따라 자연의 변화를 만끽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문해서지만 실은 최근에야 경주에도 천주교 성지가 있다는 얘기를 알았다. 산내면 의곡을 지나 다리 건너 마을을 돌아 산기슭으로 올라가니 소태골과 범굴이라고 하여 천주교 신자들이 기거했던 곳이 있다.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는지 주변의 조경공사가 한참이다. 돌아 나와 다시 안내표지를 따라 산을 따라 1km 이상 더 가니 천주교 성소와 순교자들의 무덤이 보인다. 우리 대한민국 천주교 두 번째 사제 최양업 신부가 전도했던 곳이라고 한다. 배교의 갈림길에서 목숨을 던졌던 순교자의 무덤이 지금은 그 산천과 하나 되어 의연히 앉아 있다. 새삼 엄숙한 종교의 힘을 강하게 느낀다. 세 분의 순교자(허인백(야고보) 이양등(베드로) 김종률(루카)의 무덤이다. 울산 장대벌 감영에서 처형되고 잠시 모셨던 가묘라고 한다. 가까이에 이런 거룩한 성지가 있었다니 다만 놀라울 따름이다. 건천읍 송선리 선동마을 뒷산이 부산성이다. 삼국유사의 화랑도 득오가 죽지랑을 잊지못해 모죽지랑가를 지었다고 하는 곳이기도 하다. 계곡이 깊어 바깥사람은 잘 알지 못하겠지만 신선이 살았다 하여 선동이다. 산성으로부터 이어지는 계곡이 산성그랑이다. 싱그런 계곡물이 흘러내리는 곳이고 골기 있는 노송이 계곡 입구에 드리운 곳이다. 산자수명한 고장 가까이에 이런 거룩한 곳이 있었다니 더욱 의미부여가 되는 셈이다. 때마침 정부에서 코로나19에 지친 국민을 치유하고자 종교문화여행 프로그램 개발 공모에 나섰다. 이에 경주시가 ‘감성순례, 내 마음 다시 봄’이라는 주제로 치유순례 프로그램을 기획한다고 하니 반갑다. 경주가 가지고 있는 불교, 유교, 천도교라는 고유의 자산에다 이 천주교 순교자의 삶을 되새기고 추모하는 것을 더하는 치유순례 프로그램이다. 위에서 열거한 오랜 길들이 치유순례 프로그램과 접목되어 많은 분들에게 건강과 행복을 주는 길이 되기 바란다. 경주는 의미를 부여할만한 자산이 많다. 욕심을 보태면 기본적으로 불교가 중심이지만 무속이라 백안시 되고 있는 전통의 정신세계까지 프로그램화하는 것도 권장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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