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38년 6개월, 아내는 41년 6개월, 부부가 합해 80년 간 교직에 몸담아왔다. 담임은 물론 교장 교감 노릇할 때의 학생을 합하면 제자들이 500은 훨씬 넘을 것 같다. 하지만 재직 중 제대로 선생 노릇을 하지 못해 제자들에게 늘 미안한 생각이 든다. 옷깃을 여미고 500여분의 나한을 모신 응진전 문을 열었다.
이 전각 안에는 부처님을 중심으로 좌우에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을 협시로 모시고 그 주위로 500여명의 나한을 빼곡히 배치하고 있다.
수행을 통해 더 이상 번뇌가 없어진 경지에 이르면, 공양을 받을 만하다고 하여 ‘응공(應供)’이라 불리는 나한의 경지가 된다. 나한은 아라한을 줄여서 일컫는 말이다. 그들은 진리와 하나가 되었다고 하여 ‘응진(應眞)’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아라한들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기 위해 그 상(像)을 만들어 안치한 전각이 응진전이다. 사찰에 따라서는 나한전이라고도 한다.
이곳 응진전은 2002년 개금불사 때 나한의 복장(腹藏)에서 조성 당시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 발원문이 발견됐다. 발원문에는 이 오백나한 불상을 금산사 스님과 기림사 스님들이 함께 참여해 조선 영조 5년(1729)에 조성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오백 나한상들은 모두 경주에서 생산되는 불석으로 조성하였다고 한다.
오백나한들의 표정이 다양하다. 용의 목을 움켜잡고 있는 나한, 두 사람이 마주보며 웃고 있는 나한, 무기를 들고 있는 나한, 약병을 들고 있는 나한, 경전을 들고 있는 나한, 귀를 후비고 있는 나한, 세 명이 등을 대고 앉아 있거나, 둘이 손을 잡고 웃는 등 다양한 모습이다. 사자와 용 등을 제압하고 있는 나한상도 있다.
500여나한상 중에서 같이 손을 맞잡고 웃고 있는 상이 판타카 형제이다. 이 판타카 형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부처님께서 사위성에 계실 때, 왕사성 어느 상인의 딸이 그 집의 종과 눈이 맞아 집을 나왔다. 몇 년을 유랑하는 가운데 사내 아이를 낳게 되니 길에서 낳았다고 이름을 ‘판타카’라 불렀다. 그 뒤 또 둘째 아이를 낳으니 큰 애를 ‘마하판타카’라 고치고 작은 아이를 ‘출라 판타카[주리반특(周利槃特)]’라 불렀다. 아이를 낳았으니 친정 부모님께 소식을 알리고 또 아이들을 조부모에게도 보이려고 고향으로 갔다. 그러나 친정 아버지는 강경하였다.
“집안 망신이니 이곳에서 같이 살 수는 없다. 아이들은 나에게 맡기고 돈이나 몇 푼 줄 터이니 나가서 살아라”
그리하여 사위와 딸은 떠났다. 할아버지는 마하 판타카와 출라 판타카를 불쌍하게 생각하여 아이들을 품에 안고, 부처님께 나아가 법문을 들었다. 먼저 법문을 들은 마하 판타카가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아 깨친 후 동생 출라 판타카도 출가시켰다. 그러나 출라 판타카는 우둔하여 가끔 제 이름도 잊어버렸기 때문에 이름표를 달고 다녔다. 출가하여 부처님 제자가 되었지만, 부처님은 어려운 공부는 그에게 무리라며 ‘먼지를 쓸고 때를 닦으라[불진제구(拂塵除垢)’는 가르침을 내렸다. 출라 판타카는 숙맥이라 ‘먼지를 쓸고’를 외우면 ‘때를 닦아라’를 잊어버렸다. 하루는 그런 자신이 서글퍼서 산문 밖에서 울고 있는데 부처님이 보고 말씀하셨다.
“우자(愚者)가 자기 어리석음을 모르는 것이 진정 어리석은 것이다. 너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알고 있으니 결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그 후부터 출라 판타카는 일념으로 먼지를 쓸고 때를 닦았다. 뭇사람의 신발도 닦고 뒷간을 치우고 마루와 마당을 쓸며 오랜 세월을 보냈다. 결국 바보라고 놀림받던 그는 마음 속 때를 닦아내어 존재의 본성을 깨달은 각자(覺者)가 되기에 이른다.
부처님의 설법을 대기설법(對機說法)이라고 한다. 진리를 구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각각의 그릇대로 베풀었던 가르침을 말한다. 이를 수기설법(隨機說法), 수기산설(隨機散說), 응기접물(應機接物)이라고도 한다. 응병여약(應病與藥)이라는 말도 있다. 부처가 중생의 능력이나 소질에 따라 가르침을 설하는 것을 의사가 병에 따라 약을 주는 것에 비유한 말이다. 그래서 출라 판타카와 같이 우둔한 사람도 깨우친 것이다. 오늘날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꼭 명심해야 할 가르침이다.
필자의 경우 젊었을 때는 제법 기억력이 좋은 편이었는데 최근에는 책을 읽는데 책장을 넘기면 앞 쪽의 내용이 까맣다. 출라 판타카가 된 것이다. 부처님을 찾아 가르침을 구해야 할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