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나절​                                   박형준 반지하 창문 앞에는 늘 나무가 서 있었지 그런 집만 골라 이사를 다녔지 그 집들은 깜빡 불 켜놓고 나온 줄 몰랐던 저녁나절을 얼마나 많이 갖고 있었던가 산들바람이 부는 저녁에 집 앞에서 나는 얼마나 많이 서성대며 들어가지 못했던가 능금나무나 살구나무가 반지하 창문을 가리던 집, 능금나무는 살구나무는 산들바람에 얼마나 많은 나뭇잎과 꽃잎을 가졌는지 반지하 창문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에 떨어지기만 했지 슬픔도 환할 수 있다는 걸 아무도 없는데 환한 저녁나절의 반지하집은 말해주었지​ 불 켜진 저녁나절의 창문을 보면 아직도 나는 불빛에 손끝이 가만히 저린다 -가난의 빛, 그 소슬한 위로와 정화 당신은 눅눅한 가난의 시절에 당신의 가난을 다독여준 어떤 한 컷을 가지고 있는가? 필자에게는 고교 시절 자취방에서 새벽에 혼자 깨어서 듣던 동해남부선 기차 소리가 어머니의 손으로 다가왔다. 그 소리를 들으면서 나의 청춘은 여물어갔다. 이 시는 자주 이사를 다녔던 가난한 시절, 집에 대한 이야기다. “창문 앞에 늘 나무가 서 있었”던 반지하집, 시인은 그런 집만 골라 이사를 다녔다고 한다. 그런 집들에서 “깜빡 불 켜놓고 나온 줄 몰랐”다면 여느 사람들은 서둘러 집에 들어가 불부터 껐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깜빡 불 켜놓고 나온 줄 몰랐던/저녁나절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었던가”하며 짐짓 사치(?)를 즐긴다. 식구에게서 떨어져 아마 외로웠을 시인은 “아무도 없는데 환한” 그 다정과 마음의 호사를 누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 절정의 장면은 아무래도 창문에서 흘러나오는 불빛 속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창문앞 능금나무, 살구나무 나뭇잎과 꽃잎이 그 빛을 다 감은 몸짓으로 하르르 떨어질 때이다. 가만히 숨죽이고 떨어지는 꽃잎을 바라보았을 시인에게 “아무도 없는데 환한 저녁나절의 반지하집”은 그 소슬한 기운으로 “슬픔도 환할 수 있”는 거야, 어깨를 다독이며 말해준다. 그래서 차마 그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서성대”는 날이 많았다. 그런 많은 저녁나절을 소유한 자였기에 시인은 반지하의 가난 속에서도 세상 부러울 것 없는 마음의 왕국을 소유한 긍지를 지닐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시가 부신 서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자신이 체험한, 손바닥으로 만져본 그 환한 가난이 현재에도 핏줄에 녹아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불 켜진 저녁나절의 창문을 보면/아직도 나는 불빛에 손끝이 가만히 저린다”고 읊조린다. 저녁나절에 발견한 가난의 빛! 세상에서 가장 환하고 평화로운 기억! 그것은 위로와 정화를 가슴에 심는, 자그만 빛의 따스함이다. 그러면서 이 시는 서정시는 이래야 한다고 옷깃을 치는 표정과 낮은 목소리마저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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