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멕시코 영화감독 알렉산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가 만든 21g이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는 ‘영혼에 무게가 있다고 의사는 생각한다’는 1907년 아메리칸 메디슨이라는 의학 잡지에 게재된 학술논문 제목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이다. 세 사람이 교통사고를 당하며 이들 사이에 묘하게 얽힌 운명을 통해 영혼의 무게 그리고 인생의 무게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영혼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정신과 구별되는 일종의 생명의 원리, 살아있는 사람의 육신에 깃들여서 생명을 지탱해준다고 믿어지는 기(氣), 비슷한 뜻으로 혼, 혼령, 혼백, 얼, 넋 등이 있다. 과학적으로는 사후세계나 영혼은 없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지만 일부 과학자들은 영혼의 무게를 측정하는 실험을 시도했다. 1901년 의사출신 던컨 맥두걸은 사람의 영혼에는 일정한 중량이 있기에 사람이 죽을 때 영혼이 빠져나가면서 몸무게도 따라서 줄어들 것이라는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임종이 가까운 결핵환자의 동의를 얻어 사망전후 몸무게를 측정한 결과 6명 중 1명에게서 체중 21g의 차이를 발견하고 개 15마리에게도 연구를 시도한 결과 개는 체중의 변화가 없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이 연구결과에 대해 동료의사가 사람에게서 21g의 체중변화가 나타난 것은 사망시 체온의 변화에 의한 일시적 변화이며 개는 땀샘이 없어서 체중의 변화가 없는 것이라고 동일 학술지에 발표하며 적지 않은 논쟁이 있었다. 이 실험의 유일한 결과는 체중이 감소한 단 1명의 예이며 이것이 지난 100여 년 동안 영혼의 무게는 21g이라는 결론처럼 떠돌아다녔다. 심리학에서는 뇌의 역할이 바로 영혼에 해당된다고 보고 영혼에 대해 더 이상의 연구에 관심을 갖지 않는 추세다. 모든 생명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한 여정이 시작된다. 삶은 유한하기에 살아있는 날들의 하루하루가 귀한 선물이다. 어제 죽은 자가 그렇게 간절히 원했던 내일이 바로 오늘 아닌가! 인간의 죽음은 1인칭의 죽음, 2인칭의 죽음, 3인칭의 죽음 이렇게 3가지 유형으로 나누기도 한다. 이 세 가지 죽음 중에서 가장 아프고 슬픈 죽음은 내가 사랑한 2인칭, 너의 죽음이다. 스피노자는 사랑이란 너와 함께 할 때의 기쁨이라고 했다. 누군가 이 세상에서 사라졌을 때 그 고통이 가장 극심한 건 바로 자신이 진짜 사랑한 사람의 죽음이다. 너의 부재로 인해 고통이 다가오면 그것이 너를 사랑했다는 일종의 증거이다. 꽃이 지기 위해서 피는 것이 아니듯 우리는 죽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내 삶을 흔들지 말고 살아있음을 즐겨야 한다. 우리는 21세기가 간절히 원했기 때문에 태어난 것이다. 1970년대는 70%가 집에서 사망하였으나 지금은 90%가 병상에서 사망한다. 연명의료결정법은 이미 시행중이다 자발적 안락사, 의사조력사망 등 죽음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대다수 한국인에게 죽음이란 단어는 금기어 중 하나다. 나이가 많을수록 더 그렇다. 노인종합복지관에서 죽음에 대한 강의를 하는 한 강사는 “죽음이란 단어를 직접 쓰면 거부반응부터 보이는 어른들이 너무 많다”고 한다. 그렇다고 죽음을 피할 순 없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 특히 노년기 죽음준비 교육은 여생의 의미와 소중함을 재발견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인생을 잘 마무리하기 위하여 죽음을 준비하는 활동을 ‘종활’이라고 한다. ‘축제와 같은 장례식’을 만들고 싶다는 남편의 사전장례의향서에 따라 장례식장에 음악이 흐르고 시 낭송회를 열었던 이도 있다. 아내 L씨는 다른 사람이 보기엔 이상한 장례식이었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인식을 바꿔 결혼식보다 더 화려한 장례식을 마련하였다며 고인이 된 남편의 생전 활동 모습을 담은 영상물을 제작해 장례식장에서 틀고 남편이 좋아했던 꽃으로 자녀, 친구들과 함께 화환을 만들었다고 했다. 이렇게 사전장례의향서로 스스로 삶의 마지막을 디자인하는 셀프 엔딩 디자이너도 있고, 결혼의 웨딩플래너처럼 장례를 기획하는 역할을 해주는, 삶의 라스트 신을 찍는 임종 감독, 엔딩플래너도 있다. 죽음이란 늘 나의 곁에 있으면서도 그 때가 언제일지 모르기 때문에 늘 멀게 느껴져 자주 잊고 살게 된다. 누구나 태어나면 죽게 되어있다. 그러니 죽음에 대해서 그렇게 슬퍼할 필요는 없다. 단지 그 때가 언제일지 모를 뿐이다. 내 인생의 마지막을 남은 이들에게 맡기기보다는 스스로 결정해서 디자인해보는 건 어떨까? carpe diem but memento mori 현재를 즐기되, 죽음을 기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