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마 선생이 경주의 성동동에 거주할 때였다. 어느 가을 일요일 아침, 청마 선생께서 교외로 산책이라도 할 양으로 집에서 나와 길거리로 걷고 있었다.  시외로 빠져나가는 버스를 기다리기 위해 정류장에 나오니 마침 화가 박지홍(朴智弘) 선생이 나타났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말없이 빙그레 웃으며 눈웃음으로 인사를 나누고 청마는 지팡이를 들어 자기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해 준 다음, 마침 기다리던 버스가 왔다. 청마가 버스를 타려는 것을 눈치 챈 지홍도 같이 말없이 청마를 따라 버스를 탔다. 둘은 오늘 아침 뜻밖의 만남으로 서로가 말 한마디 않고 동행자가 되었다.경주 시내에서 남쪽 길을 따라 가면 오릉과 포석정이 나오고 내남면으로 가는 길목에 삼릉(三陵)이 있다. 버스가 삼릉에 다다라서야 청마는 지팡이를 들어 보이며 지홍에게 내리자는 의사를 표시했다. 청마가 내리는 것을 본 지홍도 따라 내렸다.서남산 기슭, 억새가 하얗게 바람에 흔들리는 산비탈 언저리를 왼편으로 바라보며 두 사람은 양지바른 잔디를 찾아 앉았다. 그들은 아직 한 마디 말도 나누지 않고도 서로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적당한 곳 양지바른 자리에 자리를 정해 앉아 각자에 알맞은 가을 사색의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청마는 시의 한 구절을 생각했을 것이고 지홍은 그림의 소재나 구성에 관한 생각에 젖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자리에 와서 어쩌면 한 마디 말도 필요로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대자연 속에 묻혀 자연과 서로 문답하는 시간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언덕 아래로 굴러 내리는 쇠달구지도 보았을 것이고, 파장이 된 용산 장날에 흰옷 입은 시골 아낙네들이 무엇인가 지껄이며 지나가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건너편 시냇물을 끼고 늘어 선 사과나무에 사과가 발갛게 익어 가는 소리도 들었을 것이다. 짧은 가을해가 어느덧 서쪽으로 기울어져 갈 때, 청마는 슬금슬금 일어서기 시작했다. 한창 사색에 잠겨있는 지홍에게 말없이 지팡이를 들어 보이는 것으로 일어서자는 의사를 표시하는 것이 되었다. 지홍은 청마의 지팡이에 의해 머릿속의 명상을 깨고 벌떡 일어나 청마의 뒤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다시 버스를 기다리면서도 한마디 말도 없었다. 뽀얀 먼지를 뒤집어쓰고 달리는 버스를 타고 오는 동안 역시 그들은 한마디 말도 없었다. 버스가 시내로 들어 와서 정류소장에 내린 두 사람은 역시 말 한마디 없이 청마가 들어 보이는 지팡이에 의해 작별 인사를 나누며 헤어져 집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다. 청마는 그만큼 과묵했으며 같이 동행한 지홍 역시 과묵할뿐더러 과묵한 청마에게 말을 건넨다는 그 자체가 오히려 죄스럽다는 지홍의 솔직한 심정이기도 했다. 이런 이야기가 경주의 문인들에게 전해질 때도 역시 청마 다운 일면을 들은 것 같아서 우습기도 하면서 수긍이 가는 일이라고 머리를 끄덕였다. -정민호(시인. 동리목월문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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