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 비극적인 한국전쟁은 시작되고 파죽지세 북한군의 기세로 국토는 불길에 휩싸인다. 국군은 수류탄을 가슴에 안고 적의 탱크에 돌격해 격퇴시키는 등의 용전을 벌였으나 병력과 장비가 빈약해 남침 3일 만인 6월 28일, 서울이 함락되고 후퇴를 거듭했던 국군과 UN군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한다. 낙동강 방어의 성공 여부는 대구의 운명을 좌우할 뿐 아니라 이 전선이 무너지면 부산도 위기를 맞게 되는 것이었다. 전쟁이 발발한 지 한 달 반쯤 되자 다급한 전황은 경주 북방 14㎞되는 안강지방에도 밀어닥쳤다. 이로써 안강·기계지구 전투는 혈전의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본 기사는 ‘조국을 수호한 영웅들이여 -잊지 못할 6.25전쟁, 안강·기계지구 전투사(2016년, 한국자유총연맹 경상북도 경주시지회)’를 바탕으로 하고 대한민국 6.25참전국가유공자회 안강지회 김동경 회장(89)을 만나 한국 전쟁 당시 안강읍의 긴박했던 상황과 전쟁의 참상을 생생히 전해들을 수 있었던 것과 함께 안강·기계지구 전투를 재구성했음을 밝힌다. 김 회장은 나라를 위해 애쓰신 유공자들의 권익보호를 위해 앞장서 왔으며 6.25참전유공자회 경주시지회장도 역임한 바 있다. 북한군 남침 이후 국군·유엔군 후퇴에 종지부를 찍은 안강·기계지구 전투는 안강~기계~경주를 거쳐 부산으로 진격하려던 북한군 12사단을 격퇴, 국군 총반격의 발판이 된 대격전이었다. 아군 1,500명과 북한군 4,500명 이상이 전사했던 이 전투는 낙동강 방어선 붕괴 위기를 막았으며 인천상륙작전 등 반격의 기폭제가 됐음은 물론, 고도 경주의 천년 유적지를 보존할 수 있었던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동부 전선에서 벌어진 가장 치열한 공방전 ‘안강·기계 전투’,“안강 옥산계곡에서 적의 진로를 가로막고 버티었다” 동부 전선의 안강·기계 전투도 다른 지역인 포항, 영천 전투와 함께 낙동강 교두보의 운명을 판가름하는 하나의 혈전이었다. 북한군 제12사단과 제766유격 연대는 8월 공세가 개시되자 비학산을 넘어, 11일에는 포항에 진입해 동부 전선에 큰 위기를 가져왔다.  이 동부 전선에서 벌어진 가장 치열한 공방전의 하나가 바로 안강·기계 전투였다. 8월 공세 때 포항에 진입했다가 큰 타격을 받고 안강 비학산으로 후퇴한 북한군 제12사단이 급히 재편강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전선의 일부 병력을 보강해 단숨에 안강·기계를 거쳐 경주로 진격하려고 했기 때문에 이는 9월 공세 때의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된 연유였다. 북한군 측은 더 이상 UN군의 증원이 오기 전에 부산까지 점령해야 하고 국군측은 증원군이 올 때까지 버텨야 했다. 인천 상륙작전을 계획하고 있던 국군은 낙동강 교두보가 확보되어야만 그 작전이 가능한 것이었으니 적의 주력을 여기에 얽매어 놓아야만 하는 어려운 상황에서 한 달 반가량의 사력을 다한 격전이 벌어졌다. 동부 전선에서의 북한군 8월 공세는 국군이 비교적 선전해 적에게 큰 타격을 주었지만 이 방면의 진짜 위기와 혈전은 북한군의 최후의 몸부림이었던 9월 공세였던 것이다.  북한군은 제766유격연대를 울진으로부터 남진시켜 안강 동쪽 형산강 다리와 대구 남방의 청도 터널(길이 1,500m)의 파괴를 명령했다. 이것은 대규모의 후방교란 작전으로 계획된 것이었다. 제766유격연대가 형산강교의 파괴를 위해 잠입했다가 국군의 방비가 예상외로 견고하자, 분산 침투를 포기하고 전부대원으로 하여금 낙동강 교두보를 뚫고 돌진하려고 하다가 안강에서 국군 수도사단에 의해 큰 타격을 입었다고 한다. 그래서 8월 14일부터 19일까지 안강, 기계 지역에서 일대 격전이 벌어져 국군의 큰 승리로 끝났다.  김동경 회장은 “이 안강·기계 전투에서 북괴군은 2개 사단을 투입해 경주를 돌파하고 낙동강 교두보를 무너뜨리려고 마지막 안간힘을 쏟고 전력을 기울인 전투였으나 국군은 여기서 한 발짝도 물러설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더 밀려 경주를 빼앗기면 대구 북방의 국군 1사단이 방어하고 있는 다부동 전선이나 미국 해병 사단이 결사적으로 방어하고 있던 오봉리 전선 등의 배후를 찔려 아무 쓸모가 없게 되는 것이었지요” 라고 했다. -경주 북방의 돌출부인 203고지(昆起峰) 쟁탈전이 가장 처절, 이 전투 승리로 국군이 다시 반격할 수 있는 발판 마련해 화력면에서 4대 1의 열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 열세를 딛고 국군이 방어에 성공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안강 남방의 지형이 폭 2㎞ 정도의 평야 지대를 가운데 두고 경주와 포항 쪽으로 뻗는 두 개의 능선이 갈라져 있는데 적은 2개 능선으로 병력을 분산해 쳐내려 왔기 때문에 우리 국군이 막아낼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안강·기계 전투에서 북한군도 사력을 다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북한 김일성 다음 서열인 민족 보위상 겸 부원수인 최용건이 직접 전선에 나와 독전(督戰) 했다는 것을 보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때 경주 북방의 돌출부인 203고지(昆起峰) 쟁탈전이 가장 처절했다. 이곳을 빼앗기면 포항 쪽을 지키는 국군이 고립되고 경주가 직접 위협을 받게 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김 회장은 “낮에는 제공권을 쥐고 있는 유엔군의 항공기 지원으로 빼앗았다가 항공 지원이 불가능한 밤에는 도로 빼앗기는 전투가 10여 일 계속되었습니다. 병력과 장비가 열세인 국군은 부산, 대구 등지에서 모집한 장정들을 군복으로 갈아입힐 여유도 없이 소총 한 자루씩만 주어 전투에 투입하는 안타까운 상황이 계속 되었지요. 훈련도 못 받은 이들이지만, 조국을 지킨다는 일념 아래 조국을 위해 용감히 싸웠던 것이지요. 어떤 때는 정상을 점령하여 만세를 부르고 있던 국군에게 미군 폭격기가 나타나서 포탄을 퍼부어 국군 1개 소대가 거의 전멸한 적도 있었습니다” 라고 했다. 이 안강·기계 전투는 다른 낙동강 교두보에서의 전투도 마찬가지겠지만 북한군이 전력을 기울여 공격한 전투였으며 낙동강 전체의 전선에 큰 영향을 미치는 전략적 요충지를 사수하는 중요한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로 국군이 다시 반격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것이며 고도 경주의 천년 유적지를 보존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었다. -“안강과 포항은 불바다가 됐지만 경주 시내에는 인민군 한 사람도, 한 발자국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안강, 기계전투는 9월 4일 수도 사단의 방어선이 안강 남방(경주 북쪽)으로 이동함을 계기로 경주 북방 전투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 전투기간 중에 국군의 제25연대, 제26연대, 제18연대, 제1연대 및 해군육전대는 용전분투(勇戰奮鬪)해 이 지역에 침투한 적을 막아내는데 맡은바 임무를 다한다. 비록 수도사단의 방어선이 안강 남쪽으로 물러서기는 했지만 이 지역의 방어전으로 적이 최초 기도하던 경주방면 진출을 20여 일 동안이나 지연시켜 놓았던 것이다. 김 회장은 “국군은 고귀한 피를 지불하고 귀중한 시간을 얻게 된 것이니 이는 경주북방에서의 아군의 작전을 용이하게 했으며 나아가 낙동강 방어선의 총반격전의 기반이 됐습니다” 라면서 형산강이 내려다보이는 경주시 강동면 오금리 산21-3(경주~포항 간 7번국도)에는 치열했던 안강지역 전투에서 산화한 수도사단 제1연대 용사들의 빛나는 업적을 기리고 후손들에게 그 정신을 기리고자 건립한 전적비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최근 알려진 바에 의하면 상업시설이 들어서면서 전적비가 복원되기 어려울 만큼 크게 파손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현실이라고 해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당시, 안강과 포항은 불바다가 됐지만 경주 시내에는 인민군 한 사람도, 한 발자국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급박한 상황에도 경주를 지킬 수 있었던 것에 대해 그 당시 사람들은 ‘신라 천년의 56왕이 지키고 있어 그 위업이 경주에 살아있어서였다’라고 했었습니다” -한국전쟁 참전 용사 중 현재 안강읍 생존자는 60여 명 정도, 한국전쟁에 참전한 안강 용사들은 720명 김동경 회장은 신광 출신으로 한국전쟁 발발 당시 21세였고 인근 안강읍으로 피란을 온다.  “국군이 총을 맨 채 죽어있는 것을 보니 정말 무서웠습니다. 이미 안강땅은 주민들이 양남, 양북 외동 등으로 피란을 가느라 텅빈 상황이었고 무차별 폭격을 맞은 처참한 상황이었습니다. 인민군은 말을 타고 다녔는데 말도 죽어있고 인민군도 죽어있었습니다. 머리카락이 쭈뼛거릴 정도였습니다. 나중에는 청령, 사방앞뜰까지 피난민들이 온 들판에 꽉 차 있었습니다. 아비규환이었지요”라며 경주시에는 황성공원과 금장대에 국군의 포진지가 있었다고 회고했다.  김 회장은 전쟁 중 당시 징용으로 18연대 천북면 화산리 보급대 일을 도와주다가 이듬해인 1952년 9월 정식으로 소집을 받고 전투에 참가했다. 입대 후 김 회장은 제주도 대정읍 모슬포에 일본군이 사용하던 시설을 인수해 운영한 육군 제1훈련소로 입소한다. 육군 제1훈련소 교도연대 전술과 분대방어반 조교로 근무했던 김 회장은 전쟁이 끝난 후 다음해인 1954년 제대했다. 김 회장은 “보름동안 교전이 있었던 안강에서 가장 컸던 피해는 안강파출소 앞에 50질(약 75미터)정도가 폭격으로 교통이 마비 됐던 것이 기억납니다. 당시 한국전쟁 참전 용사 중 현재 안강읍 생존자는 60여 명 정도이고 한국전쟁에 참전한 안강 용사들은 720명이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생사를 알 수 없는 전쟁터에서 비 오듯 날아오는 총탄 속에서 몸을 돌보지 않고 나라를 위해 청춘을 바친 전우들을 잊을 수 없으며 후손들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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