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러는 물 젖어
-조희길
그저 매일이 똑같으면 사는 재미가 있나슬쩍 호미걸이라도 거는 척해줘야지걸리는 척이라도 해줘야지밋밋하게 매일이 흘러가면 사는 재미가 있나짜글짜글 냄비라도 끓여야지홀로 들판에 서서 겨울바람 이겨내는 잡목만도못한 인간들무어 그리 불만 많고 말들이 많은가한발만 빠져 잠시만 생각해봐도 나도 당신도흠 많은 인생인 걸그저 나날이 조용하면 무슨 재미로 사나더러는 깨지고, 더러는 부서지고, 더러는 물 젖어충혈된 눈으로 떠오르는 햇살을 응시하기도 해야지가끔은 분노도 키우고, 욕망에 충실하기도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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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길 시인은 이 시에 별 비중을 두지 않았는데 뜻밖에 세계문학상을 안겨줬다며 겸손이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시에 특별한 기교가 없어 편하게 술술 읽히면서도 묘하게 가슴에 와 닿는다. 마치 무더운 여름날 무언가에 치여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데 비까지 내려 자기도 모르게 짜증이 날 때의 심정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다. 시인이 아니라 일상 속 누구에게나 일어날 법한 상념을 조희길 시인은 무덤덤하게 써냈다.
지난 11월 18일, 세계문인협회가 주최한 제13회 세계문학상 시상식에서 경주출신의 중견시인 조희길(57)씨가 시 부문 대상을 받았다. 2017년 7월부터 2018년 6월에 걸쳐 발표된 전국 1000여 명 시인이 쓴 3000여 편 중에서 선정된 단 한 편이다.
“근래 1년 동안은 희한하게 시가 잘 쓰였어요. 한 해 동안 30여 편의 시를 썼으니 이례적이었지요. 이 시에 큰 비중을 두지 않고 있다가 큰 상에 선정돼 의외였습니다. 그런데 시를 평가하신 분들이나 따로 읽어보신 분들이 깊이 공감했다고 말씀하시니 오히려 제가 힘이 났습니다”
소나기 퍼부을 때, 화가 치밀어 오를 때, 술에 취해 ‘떡’이 되었을 때 자신의 감흥에 도취되어 시를 쓴다는 시인은 이 시를 쓸 때 무언가 절실함이 있었고 그것을 논리적이지 않고 감성 중심으로 옮겨 썼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특히 시인이랍시고 고매하거나 초연하기보다는 한 명의 흠 많고 감정적인 사람임을 인정함으로써 오히려 사람냄새 나는, ‘포기 않고 살아내는’, 역동성을 담을 수 있었다고 스스로 진단한다. 그의 시들이 문학을 전공한 ‘실력파’들의 번뜩이는 기교와 현란한 표현을 배제하고 편하고 담담한 필치로 사람 사는 모습을 그려내는 것은 바로 이런 의식이 기조를 이룬 덕분일 것이다.
“시에는 그 시대의 정신이나 문화가 담긴다는 말을 하는데 제 시를 읽고 천 명 중 한 사람이라도 위안 받을 수 있다면 그게 가장 큰 보람이겠지요”
세계문학상 시상식에 대해 밝힌 그의 소감이다. 그러면서도 조희길 시인은 자신의 시는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작업이라고 단정 짓는다.
경주중고등학교 시절 황성공원에서 거행되던 전국규모 백일장에서 장원과 가작을 휩쓸며 소년문인으로 성가를 날리던 조희길 시인은 경주중 1학년 때 내물왕릉에서 치러진 백일장에서 김동리 선생이 까까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너는 커서 시인이 되거라’고 한 말에 꽂혀 44년 동안 시를 향한 칼끝 같은 갈망을 키워왔다고 고백한다. 약관 스무 살 때 한 해 후배인 전동균 시인(동의대 교수)과 의기투합해 첫 시집 무명기(無明記-1980)를 낸 것도 그런 열정의 표현이었다.
‘밥 굶기 싫어’ 그 비범한 실력으로 국문학과를 가지 않고 경영학과를 택한 그는 ‘외도’의 길을 걸으면서도 제8회 호국문예에 당선돼 등단(1987년), 이후 월간문학세계 신인상(1991년), 한국을 빛낸 100인의 문인(2007, 2013, 2014, 2018) 제8회 세계문학 본상(2013) 외 무수한 수상을 하며 문학적 관록을 쌓아왔다. 그의 시에 대한 갈망은 삶에 쫓기는 와중에도 시집 ‘나무는 뿌리만큼 자란다(문학세계/2007)’, ‘시조새 다시 날다(현대시학/2017)’ 등으로 독자들과 만났다.
‘외도’로 선택한 경영학에서도 그는 일반의 범주를 넘어선 위상을 드러냈다. 한국능률협회 본부장과 청호나이스 부사장을 거쳐 현재 1700명 규모의 청호나이스 자회사 나이스 엔지니어링(주)의 대표이사를 맡는 동안 ‘대한민국 신기술 혁신상’, ‘글로벌 경영대상’ 등을 비롯해 전문경영인으로서 받은 수많은 수상들이 세계문학상을 수상한 시인인 그의 빛을 무색케 할 정도다. 그런 그가 고향 경주의 예술문화 발전을 위해 오랜 동안 마음 쏟은 일까지 거론하는 것은 오히려 부질없기에 굳이 밝히지 않는다.
그보다는 사족 하나, 세계문학상 수상 작품을 번역해 세계문단에 보내야 하는데 도대체 시속에 등장한 ‘호미걸이’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시인의 상심은 엉뚱한 곳에서 깊고 망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