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지 중심에서 경주의 조선을 느낄수 있는 경주읍성은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96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일제강점기의 무작위적인 파괴와 근현대의 도시개발 사업 속에서 그 옛 모습은 대부분 사라져버렸다. 경주읍성 내의 현존 유적은 완전히 변모했거나 무너지고 흩어진 잔상만 남았다. 성벽을 비롯해 객사, 집경전, 동헌, 내아, 종각 등 주요 건물이 모두 그러한 모습이다. 1900년대에 이르러 관장(官長)은 망궐례를 행치 않았고 성문 개폐때마다 치던 봉황대 종각의 종소리가 멎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렀고 읍성은 기나긴 침묵을 깨고 다시 기지개를 켜고 있다. ‘복원’이라는 이름으로.
신라 이후 경주 천년 역사 심장부는 읍성이었다. 동성벽 일부와 향일문(向日門, 동문)이 복원된 경주읍성을 걸어보았다. 실로 100년이 지나 밟아보는 조선의 경주읍성이었다. 흑백사진에서나 보아왔던 조선의 읍성이라니! 가시적으로 ‘조선의 경주’를 상징하는 읍성을 일별이라도 할 수 있음은 축복이다.
경주읍성은 2030년까지 사업비 605억 원을 들여 4만5496㎡ 부지를 사들이고 동쪽과 북쪽 성벽 1100m, 치성 12개소, 문루2개소(향일문은 복원됨, 공진문)를 복원할 계획이다. 아직 주변 정비 공사가 한창이었지만 복원된 부분만이라도 안전을 기할 부분들이 더러 보였다. 더불어 읍성 전체에 대한 안내와 발굴 현황, 읍성 주변의 유적을 설명하는 안내표지판 설치도 시급해보였다.
복원된 읍성의 동문을 중심으로 읍성과 관련된 유적과 주변 문화유적들을 찾아보았다. 경주문화원으로 이어지는 향토사료관, 집경전, 동경관 등의 건물은 일부 헐린 부분도 있지만 조선시대 모습을 아직 간직하고 있다. 현재의 한국담배인삼공사(KT&G) 경주지사 자리와 경주상공회의소는 옛 동헌 자리였고 조선 시대 내아(內衙)였던 구박물관은 지금의 경주문화원이다. 이들과 함께 현재 읍성 주변에 있는 서경사, 화랑수련원 등의 주목할만한 유적지도 함께 살펴보았다.
▲주요행정 담당했던 조선 시대 내아(內衙), 현 경주문화원 경주지역의 주요행정을 담당했던 관청으로 조선 시대 내아(內衙)였던 구박물관은 지금의 경주문화원 자리다. 경주문화원은 1926년부터 1975년까지 경주박물관이었던 곳이었다. 1975년 현재의 국립경주박물관이 신축되어 옮겨간 뒤부터는 경주문화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정면에 보이는 남향 기와집은 현재 향토사료관으로 조선시대 문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사료관은 신라시대 원형초석을 사용해 팔작지붕의 목조와가로 지었다. 1926년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의 전시관으로 ‘온고각’이라는 현판을 걸고 신라 이후의 유물을 전시했다고 한다.
현재 사료관에는 ‘온고각’이라는 현판과 ‘경주군청’ 현판이 보존돼 있다. 이밖에도 조선시대 당시 경주읍성 축소모형판이 있고 100년 전 경주시가지 모습, 경주읍성 전투에 쓰였던 비격진천뢰 모형 등의 유물 등이 전시돼있다. 문화원 입구에 성덕대왕신종 종각도 일제강점기 당시 모습으로 남아 있다.
한편 경주문화원에서는 희망자들의 신청을 받아 월 1회 정도 경주읍성투어를 운영하고 있다. 문화재해설사들이 축소된 모형도를 통해 경주읍성을 소개하고 역사현장을 걸어서 탐방하고 있는 것.
경주문화원 고복우 사무국장은 “하드웨어로서 경주읍성이라는 문화재가 복원정비 되고 있는데 컨텐츠 개발을 통한 활용이 시급하다. 그 일환으로 시 예산없이 문화원에서 자발적으로 읍성 투어 프로그램을 하고 있는데 시에서의 예산이 지원된다면 보석같은 조선의 경주를 더욱 활발하게 알릴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집경전지...태조 이성계 어진이 봉안되었던 성내 유일한 전우(殿宇), 옛 경주여중 인근에 남아있어 동문이 복원된 곳에서 성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면 경주여자중고등학교가 옮겨간 터가 나온다. 지금은 경주평생학습센터로 활용하고 있는데 그 부지 바로 옆 공터에 ‘집경전’ 구기비와 ‘하마비’가 서 있다. 집경전지에서 나온 통돌을 깎아 만든 계단돌 일부, 장초석 등 석재와 석비는 한쪽에 모아두었고 집경전 구기비와 하마비가 간격을 두고 옮겨져 있었다.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전국 거진(巨鎭)에 자신의 어용을 봉안하게 했다. 이반된 민심을 어루만지고 집약시키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던 것. 이에 경주에 어용전이 건립됐고 1442년(세종24) ‘집경전’이라는 전호가 내렸다.
그러나 임란으로 집경전은 돌무더기만 남긴 채 모두 불탔다. 이후 경주 인사들은 여러 차례 집경전을 다시 세워달라고 청했으나 정조(1798년)는 대신 어필로 ‘집경전구기’라는 다섯 글자를 써서 내려 비각을 건립토록 했다. 소실되기 이전 집경전은 경주에서 가장 신성한 곳으로 부윤이나 사신이 경주에 오면 반드시 이곳에 와서 참배하고 업무가 시작됐다.
성내 유일한 전우(殿宇) 집경전은 그 권위와 상징성이 실로 대단했었다.
지금은 집경전의 전각은 없어지고 집경전의 흔적이 남아있다. 집경전 복원은 ‘집경전 구기도’가 남아있어 정확한 복원사업일텐데 부지 확보 등의 이유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도심에서 만나는 유일한 근대 건축문화재 서경사, ‘보존 관리 소홀’ 서부동에 있는 서경사는 2006년 12월 등록문화재 제290호로 정식 지정됐다. 서경사는 도심에서 만나는 유일한 근대 문화재로 1932년경에 건립한 목조 팔작지붕의 일본 전통 불교 양식 건축물이다. 근대문화재는 우리 근대사의 아픔도 함께한다. 일본식 전통사찰인 서경사는 1933년 당시 보기 드문 우뚝한 건물로, 혹은 이국적 풍광을 함께 선보였을 것이다.
지붕이 건물 높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고, 정면과 측면의 길이가 일대일 비율에 가까워 위에서 바라본 건물의 평면이 정사각형이며, 정면의 지붕이 돌출되어 있는 등 일본 전통 불교 건축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고 한다.
해방이 되자마자 해병전우회 사무실, 사방관리소, 한전 사무실, 농촌지도소 사무실, 소방출장소, 서부동 사무실, 박덕화 씨의 정가전수관 등으로 임대해 활용되었으며 현재는 정순임 판소리 전수관으로 임대되고 있다.
지난 25일 찾았던 서경사 뜰안에는 승용차들이 정원을 가득 채우며 주차해 있었는데 방문객들의 진입과 관람이 어려울 정도였다. 귀한 근대건축물이면서 등록문화재인 공간이 마치 사적인 공간인양 비쳐졌다. 근대문화재에 대한 예우는 실종된 것인가. 또 서경사 바로 옆에선 ‘경주무형문화재 전수교육관’ 건립공사(11월말경 준공예정)를 하고 있었는데 그 흔한 천막 가리개도 없이 서경사가 콘크리트 분진과 진동에 그대로 노출돼 있었다.
그리고 공사 현장의 도구와 서경사 측의 집기들이 뒤섞여 서경사 쪽 건물에 이리저리 무질서하게 나뒹굴고 있었다. 차제에 서경사 리모델링도 함께 할 예정이라고 하는데 문화재에 대한 어떤 보호 장치도 없어 보였다.
이에 건축주인 경주시 담당자는 “건축 공간이 협소해서 최소한의 장치를 할 수 없었다. 필요한 조치를 하지 않고 있다면 해야 되겠다”라면서 애매한 답을 해왔다. 수시로 문화재 현장을 방문할 방문객들을 생각하니 끔찍했다.
답답한 마음에 경주시 문화재과에 다시 문의했더니 “서경사 내의 주차문제는 전수관이 준공되면 별도의 주차장이 완비되므로 해결될 것이다. 그리고 분진문제는 분진이 옮겨 붙지 않도록 시공 업체에 조치토록 하겠다”고 답했다.
-경주최초의 일제시대 신식의원이었던 건물 ‘화랑수련원’, 1938년에 지어진 건물로 추정 경주최초의 일제시대 신식의원이었던 건물이 경주시 동부동에 있다. 현재 ‘화랑수련원’이란 이름으로 경주경찰서 옆 상공회의소 건물 바로 맞은편에 위치한 이 건물은 일반 건물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데 1938년에 지어진 건물로 추정하고 있다.
작고한 전 경주문화원 김태중 원장은 “일제강점기때 야마구찌 산구 씨가 구 상공회의소 자리에 세웠는데 맞은 편 자리로 건물을 옮겼다고 전해진다. 야마구찌 씨가 의사였으면서 병원 소유주였는지, 단순한 건물 주인이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원주 야마구찌 노브즈내 읍내 산구의원’으로 알려져있고 그 당시의 종합병원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던 바 있다. 이 건물은 202㎡(61평)으로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건물이지만 서양식의 지붕형태다. 지금은 경주경찰서에서 체력단련실로 사용하고 있다.
▲경주 동헌 건물 ‘일승각’은 지금의 법장사 대웅전 일승각은 경주부 관아 건물군의 일부로 원래는 ‘제승정’이라 했다. 조선 영조 30년(1754) 경주부윤 홍익삼이 중수해 일승정이라 하고 건물의 동쪽부분을 풍월루, 서쪽부분을 망경루라 칭했다(‘동경통지’). 이후 고종 20년(1883년)부터 21년에 경주부윤 김원성이 중건해 일승각으로 개명(‘경주읍지’)하고 경주 동헌의 가장 주된 집채인 정당(正堂)으로 이용한다.
다시, 1937년 동부동에 있던 일승각 건물을 배씨 부인이 인수해 작고한 남편의 명복을 빌기위해 기림사에 기증한다. 이듬해인 1938년 현재의 자리인 노동동에 이건해 대웅전을 세우고 사찰로 개창하고 기림사 경주시 포교당으로 쓰인다.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불국사의 말사인 법장사 대웅전이다. 경주 동헌 건물이 지금의 법장사 대웅전인 것이다.
▲읍성에서 가장 중심자리에 위치했던 고려 때부터 내려온 객사 ‘동경관’, 지금은 서헌만 남아 경주문화원 근처 삼락회관 건물 뒤로 고려 때부터 내려온 객사의 부속건물인 ‘동경관’이 나타난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호로 지정돼있는 이곳은 들어가는 입구가 따로 없다. 그래서 동경관을 안내하는 안내표지판도 이 삼락회관 건물 입구에 자그마하게 달려있을 뿐이다. 현재는 경주문화원이 전통문화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옛 동경관은 집경전에서 정남으로 몇 채의 민가를 지나면 객사가 나타났고 읍성 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건물이고 뜰도 넓었다고 한다. 일승각보다 훨씬 더 웅장했다고 한다. 삼동일체(三棟一切)의 건물로 이뤄진 객사였다. 객사를 이처럼 크게 지은 것은 살아있는 임금을 상징한 전폐와 궐패를 모셨기 때문이었다. 이에 객사는 읍성에서 가장 중심자리에 위치했다. 임란시 왜구들이 주둔했고 이후 몇 차례 중수됐다. 임란때 소실된 객사를 1613년에 중수하고 지은 상량문과 1786년 객사를 중수하고 생원 손희일이 지은 상량문이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그러니 지금의 건물은 정조 10년(1786)경에 다시 지어진 것이다.
늘 그랬던 것은 아니었으나 지난 26일 다녀온 동경관의 기둥 초석과 바닥에는 무청과 고추들이 널려져있고 한쪽 벽면 바닥에는 각종 농기구와 잡다한 살림도구들이 어지럽게 방치돼 있었다. 여느 시골 농가에서나 봄직한 모양새보다 더 난잡했다. 이 건축물의 중요성과 위상을 반추해볼때 심각한 상황이었다. 문화재인 고건축물에 대한 관리와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이에 대해 경주시 문화재과 관계자는 “동경관과 유적주변경관지의 환경 정비는 사적관리과와의 협조를 구해서 조치를 취하겠다”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