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당산이 서쪽으로 내려와 닿고, 월성을 끼고 내린 남천 물이 지나는 곳에, 신라 첫 번째 임금 박혁거세 거서간과 알영왕비, 남해 차차웅, 유리 이사금, 파사 니사금 등 박씨 임금 4분과 박혁거세 거서간의 왕비를 모시고 있는 오릉이 있다.
신라 왕릉 중에서 가장 잘 정비되어 있고 일찍이 왕릉으로 지정되었으며 원릉(園陵)의 규모 또한 제일 넓은 곳이다. 원릉에는 알영정과 박혁거세 거서간의 재향을 받드는 숭덕전이 함께 있다.
[삼국유사]에 전하기를, 박혁거세 왕은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 만에 하늘로 올라갔다. 7일 만에 그 유체가 알영정 부근에 떨어졌는데 사지(四肢)가 다섯으로 나뉘어 흩어져 있었다. 이 때 알영왕비도 죽었는데 나라 사람들이 거서간의 시신을 한 데 모아서 장사지내려 하니 큰 뱀이 나타나서 이를 방해하였으므로 사지가 흩어져 있는 그대로 그 자리에 장사를 지내서 오릉이 되었다고 한다.
박혁거세는 갑자년(BC 57)에 즉위하여 갑자년(AD 4)에 세상을 떠났다. 동양에서 간지로 연도를 나타낼 때 갑자년은 첫해에 해당하니, 개국(開國)과 천수(天壽)를 누리고 하늘로 올라갔다.
석가모니는 태어나자마자 동서남북으로 일곱 걸음을 걸었고, 하나님은 칠일만에 세상을 창조했다.
동서양 음계의 기본은 모두 칠음(七音)으로 이루어져 있다. 천칠지팔(天七地八)이라는 동양의 수리 개념에서도 `7`은 하늘을 의미하는 숫자이다. 설화에 나타난 간지와 수는 한 나라를 연 임금에 걸 맞는 내용을 갖추고 있는데, 몸이 다섯으로 나뉘어져 다시 땅으로 떨어진 것과 뱀이 나타난 것은 국조(國祖)에 대한 설화에서는 볼 수 없는 부분이다. 열반에 든 석가모니의 몸을 나누어 팔분사리탑을 만든 것과 같은 느낌을 가지게 하는데, 불교적인 윤색이 있었던 같다. 오릉을 박혁거세 거서간 혼자의 무덤으로 여겨지어진 설화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