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태(정치학박사, 경주대 교수)
경주신문 편집위원
대립과 갈등, 그리고 야만의 세기를 넘어 21세기는 화해와 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지난 세기를 대립과 갈등의 세기라 함은 동서 양진영의 허무한 이데올로기 대립을 통하여 아무런 창조성이나 생산성 없는 소모적 대결을 하였던 것을 지칭하는 것이며, 야만의 시대라 함은 인류 유사이래 가공할 살상무기를 동원하여 수백만 인간의 목숨을 지워버린 양차 세계대전과 지구촌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는 참혹한 살상전을 치른 과오에 붙여진 이름이다.
역사의 발전이란 원래 충돌과 분열 그리고 합일과 원융을 반복하면서 발전하는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우리 인류사에서 지난 20세기는 아무래도 충돌과 분열의 시기였지 합일과 원융의 시기는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우리 인류는 이러한 충돌과 분열의 위기 속에서도 새로운 발전을 위한 씨앗을 묻어 두는 것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것은 인류에게 문명과 문화를 창조하고 키우는 본성이 있어서 무엇인가를 기록하고 남겨두고, 다듬고 세워둔 삶의 흔적들에 다음 세대를 위한 지혜와 영감을 새겨두었던 일을 말한다.
이러한 선세대의 지혜와 영감이 스려있는 문명의 편린들과 문화의 기운이 있어 우리는 이 새 천년에 또 다른 창조와 문화의 세기로 발전시킬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인류가 남기고 지금도 새로이 창조해 내고 있는 문화란 어느 것이 우월하거나 어느것이 열등한 것이 아니라 다만 서로가 다른 차별적 가치체계나 생활양식의 표상일 뿐이다. 따라서 문화나 문명은 다양하며, 다지역 다층구조를 갖춘 매운 복합적인 요소들의 결합체인 것이다. 그리고 문화는 생성되고 성장 발전하며 성숙해지는 것이며 어떤 경우는 성장발전의 생명력을 잃고 드디어 멸망해 버리는 유기체와 같은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경주라는 곳의 문화적 생명력, 문화적 역량은 어떤 상황인가?
우리의 경주를 일컬어 입가진 이들은 하나같이 `천년문화가 찬연히 빛나는 ...`류의 헌사를 주저하지 않는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 무엇 무엇이며, 경주남산은 살아있는 박물관이라는 등 문화화두를 읊조리는 것으로 경주문화의 긍지를 세우기도 한다. 모두가 사실이 아닌 것은 아니다. 불국사도 석굴암도 천마총, 무영탑, 다보탑도 모두가 우리나라의 보물이요 세계의 자랑거리이다.
그런데 이러한 경주문화에 생명력이 있는가? 천년전 사람들이 그것들을 다듬어 세우며 그들이 불어 넣었던 영혼과 열정, 그들의 숨결이 살아 있는가?
맥박은 약해지고 호흡이 거칠어지고 있으며 끝내는 숨을 거두고 말 것 같은 노쇠현상이 보인다. 무덤 속에 들어 있는 경주문화는 찬란할 지언정 밖으로 나오지 못하여 질식하고 있고, 돌속에 깃들여 있는 천년전 사람들의 온기는 이미 식은지 오랜듯하다. 경주의 문화유적을 밝고 만지면서 `고인(古人)과의 대화(對話)`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문제는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풀어가야 할 것인가. 문제는 불탑의 돌이나 무덤, 첨성대 끝이나 청운교 백운교 돌계단 밑에 감춰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람에게 있다.
지금 보문에는 황홀한 경주의 가을이 지고 있다. 나무에 있을 때 보다 떨어져 누워 있을 때 더욱 현란하고 아름다운 벗나무 단풍잎 위로 경주이 가을 볕이 스러지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는 경주세계문화엑스포가 막바지를 향해가고 있다. 경주 사람들의 관심 바깥에서.
보문가는 길가에 대통령 노벨상 수상을 경하해 마지 않는 프랭카드는 나부끼고 있지만 대통령께서 일장 문화특강을 하고 가신 엑스포장은 끝나가는 가을 만큼이나 휑한 느낌이다.
2년전 300만의 열기는 식어 버리고, 이제는 얼마나 더 관객이 모일까, 적자는 나지 않으까 노심초사 하는 것은 아닌지.
이런 걱정을 하는 이유는 그렇게도 `경주시민이 주체가 되지 않는 엑스포는 무의미하며 오래 갈 수 없을 것이다. 문화라는 것으로 장사 속 채우기만 하면 안된다. 첫 번째는 그렇다치고 두 번째 부터는 경주세계문화엑스포의 정체성 찾기가 제1의 과제이다`라는 많은 이들의 말이 모두 헛소리가 된 까닭이다.
옛 문화나 지금의 문화이나 당대의 사람들이 아끼고 매만지고 입술을 맞추어 숨결을 불어넣어야 성숙해지고 오랫동안 싱싱하게 살아 남는 것이다.
마치 사람들이 사랑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