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서 국도4호선을 따라 건천방면으로 가다보면 모량을 지나 국도 좌우에 고분군들이 즐비하게 늘려 있는게 보인다. 이곳이 금척(金尺)이다. 금척은 마을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중앙선 철도를 중심으로 서편에 위치한 웃말과 동편의 아랫말, 아랫말 북쪽에 위치한 새각단, 금척고분군 남쪽에 하천을 끼고 있는 오방골 등 네 개의 자연부락이 금척리를 이루고 잇다. 금척은 신라 3기 8괴중 3기의 하나인 금자가 묻혀 있다는 전설이 얽힌 금척(金尺)에 연유하여 마을 이름을 금척 또는 금척원이라 불렀으며 다음의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금자(金尺)를 주었는데, 꿈을 깨 보니 손에 금자가 쥐어져 있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꿈에 가르쳐준 신인의 말대로 죽은 사람을 금자로 재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고, 병든 사람을 재니 병이 나았다고 한다. 이후 금자를 나라의 보물로 삼고 자자손손 물려오던 중, 당 황제가 이 소문을 듣고 신라에 사신을 보내 이 신기한 금자를 보여 달라고 요청했다. 왕은 무례한 중국 사신의 청을 거절하고 흙무덤을 만들고 금자를 묻어버리고 주위에 수십기의 무덤을 만들어 금자를 찾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그 후 이 무덤들 가운데 어느 하나에 금자가 묻혔다고 하여 이들 고분을 금척고분(金尺古墳)이라 불렀다 한다. 지금 이곳에는 크고 작은 고분 52기가 있다. 웃말은 곡산 한씨(谷山韓氏)의 집성촌으로 지금도 한씨들이 약 70호가 살고 있다. 이 마을은 금척의 위쪽에 있으므로 상리(上里) 혹은 웃말이라 하고 최근 철도 윗쪽에 있다고 철상이라 부르기도 한다. 아랫말은 영천 이씨(永川李氏) 집성촌으로 현재 약 70가구 이씨들이 살고있다. 금척의 아래쪽에 있으며, 하리(下里) 혹은 아랫말, 철하라고도 한다. 새각단은 아랫말 북쪽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하여 신리(新里) 혹은 새각단이라고 한다. 오방골은 금척 남쪽에 위치한 마을로 약 80여년 전 이곳에 사과밭이 일구어지면서 생긴 마을로, 이 마을에서 다섯 갈래의 길이 통하므로 오방골(五方谷) 혹은 오통골(五通谷)이라고 부른다. <유적소개> 금척리 고분군(金尺里古墳群)은 금척의 동쪽 길가에 있는 신라시대의 고분군으로서, 대소 고분 52기가 산재해 있다. 신라 3기8괴의 하나인 금자가 고분 중 어느 하나에 숨겨져 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는데, 1952년 4호선 국도 확장공사를 하던 중 파괴된 2기의 고분을 발굴하여 조사한 결과, 통일신라 이전의 귀족묘로 밝혀졌다. 경주식의 적석목곽분으로 세환식(細環式) 금귀걸이, 호박옥(琥珀玉), 곡옥(曲玉), 쇠칼 등이 출토되었다. 1936년 8월 7일 사적 제43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조산(造山)새, 조산서리, 금릉(金陵), 금척릉(金尺陵)이라고도 불리워진다. 금장원(金藏院)터 금척(金尺) 동쪽에 있는 금장원 혹은 금척원(金尺院) 터를 말한다. 원(院)이란 옛날 공무 여행자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곳으로 원이 이곳에 있었다하나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금척리 열녀각(金尺里烈女閣)은 새각단 입구에 있다. 열부(烈婦) 안동권씨를 기려 1936년에 한옥으로 세워졌으나 1972년 도로를 확장하면서 지금의 위치에 콘크리트건물로 다시 세우면서 볼품없는 모양이 되었다. 이조 말엽에 권씨는 최남일(崔南逸)의 아내로, 흉년이 들어 분가한 형제가 살기 어렵자 모두 한 집안에 불러들여, 3형제가 함께 의좋게 살았다. 남편과 함께 병이 들어 사산(死産)한 몸이면서도,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죽어가는 남편에게 2번이나 단지수혈을 하였다. 그러나 끝내 남편이 죽자 단식을 하며 따라 죽으려 하다가, 자식들의 호소로 마음을 돌려 다시 가세를 일으키고 자녀들을 잘 가르쳤다. 그녀는 3년 동안 20리나 떨어진 남편의 묘를 하루도 빠짐없이 성묘를 다녔다 한다. 금척리 지석묘군(金尺里支石墓群)은 국도변 금척 마을에 3기(基)가 있었다고 전하나 1기는 새마을 사업 때 없어지고 2기가 남아 있다. 만취정(晩翠亭)은 400여년 전 영천인(永川人) 만취(晩翠) 이시강(李是강)이 강학하기 위해 금척리 385번지에 세운 정자인데, 허물어진 것을 1936년 후손들이 다시 세웠다. 이시강은 21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그 후 의금부도사에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이곳에 옮겨 살며 후진을 양성하였다. 옥화정(玉華亭)은 순흥인(順興人) 문토(文토) 안상진(安尙眞)을 추모하기 위해 후손들이 1937년에 세운 정자. 제극정(制克亭)은 병조판서와 이조판서를 거쳐 조선 세종 때에는 좌찬성(左贊成)겸 개성류수(開成留守)를 지낸, 곡산인(谷山人) 정포(靜浦) 한옹(韓雍)을 추모하여 그의 후손이 금척리에 세운 정자로, 1948년에 건립되었다. 신도비(神道碑)는 종이품 이상의 시호를 받은 자만이 세울 수 있다. 아랫말에는 좌찬성을 지낸 평절공(平節公) 한옹의 신도비와 공의 아들인 문절공 유선(儒仙) 한권(韓卷)의 신도비가 나란히 서 있다. 부자 신도비는 아주 드문 예로 이 마을의 기품을 가늠케 했다. 당산나무는 윗말에 수령 500여년의 느티나무로 경주시에서 보호수로 지정보호되고 있으나 기념비에는 300년으로 잘못 적혀 있다. 이 마을에는 논농사와 포도, 사과 등 밭농사를 주로하고 한우사육, 버섯재배도 하고있다. 금척리는 250가구, 인구 740여명이고 최고령자는 한무하 할아버지로 91세이다. 자료협조; 한명하(금척 626)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