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내면(山內面)
조선시대:경주부(慶州府)에 속하였음.
1906:군 구역 조정(郡區域調定)으로, 경주군 산내면으로 부르게 됨.
어두(魚頭), 원동(院洞), 장사(長仕), 감존(甘存), 내칠(內七), 외칠(外七), 심천(深川), 일부(日富), 신전(薪田), 신원(新院), 의곡(義谷), 판교(板橋), 내일(乃日), 소대(小臺), 우라(牛羅), 시다(時多), 동곡(銅谷)의 18개 동리를 관할.
1914. 4. 1:행정구역 폐합에 의하여 내남면 박달리 일부와, 울산군(蔚山郡) 두서면(斗西面) 소호 동(小湖洞) 일부를 병합하여 감산(甘山), 내일(乃日), 내칠(乃七), 대현(大賢), 우라(牛羅), 의곡 (義谷), 일부(日富)등 9개 리(里)관활함.
1955. 9. 1:경주 시제(慶州市制)실시로 경주군 산내면에서 월성군 산내면으로 바뀜. 9개 리, 19개 분동리(分洞里)로 현재에 이름.
1989. 1. 1:군 명칭 환원으로 월성군 산내면에서 경주군 산내면으로 고쳐 부름.
산내면 감산리(甘山里)
경주에서 국도 30호선을 따라 산내로 가다가 단석산 서북쪽 끝자락 땅고개를 넘어면 나오는 첫마을이 감산이다. 산내면에 속한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의하여 감존리(甘存里), 어두(魚頭), 원동(院洞), 장사(長沙) 등을 병합하여 감산리로 하였다. 감산리는 감나무가 많다고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지금도 마을 여기저기에 감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다.
감산은 감존마을 뒤등산으로 불리는 석두산 줄기를 중심으로 동쪽 골짜기 일대에 널려 있는 원골, 중마을, 저자거리, 듭머리, 감존, 탑거리, 어머리 등이 모여 1리(이장 박용환 51)를 이루고 있고, 서쪽 골짜기의 방테, 횟골, 소미지, 장사 등이 2리(이장 김복래 55)를 이루고 있다.
마을소개
감산1리
저자거리 도로변에 위치한 산내 첫마을로 감산초등학교(지금의 대왕사)가 있는 마을로 조선시대 산내, 건천 등지의 사람들이 이곳에서 농산물을 사고 파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시장이 이루어졌다 하며, 시장이 있었던 마을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저자거리`, `제자거리` 또는 `제잣길`이라 불렀다고 한다.
감존(甘存) 저자거리 북쪽마을로 감산의 중심 마을이다. 약 300년 전 손(孫), 이(李), 신(辛), 장(張)씨 성을 가진 사람이 처음 들어와서 마을 일으킬 때 집집마다 감나무가 많이 있었다하여 감존이라 불렀다고 한다. 마을에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옛날 안개동 할멈이 아기를 낳고 먹을것이 없어 얻으러 다녔다는데, 감존(甘存)에서는 간장을 얻으러 갔으나 간장을 주지 않아, 화가 나 소금을 뿌리고 갔다는데 지금도 군내(郡內)에서 서리가 제일 먼저 내린다고 한다.
탑거리 감존마을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신라시대 이 마을에 자그마한 절이 있었는데, 세월이 흘러 절은 없어지고 탑만 남아 있다가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파손된 탑재 일부가 남아 있다. 탑이 있던 마을이라 하여 `탑거리(搭巨里)`, `탑길`, `탑리(搭里)`, `탑동(搭洞)`이라 부른다.
어머리(魚頭) 감존마을에서 골짜기로 들어가면 가장 안쪽에 위치한 마을로 신라 때 전란으로 왕자가 이 마을에 피난하여 있던 곳이라 하여, 옛날에는 `왕자동(王子洞)`이라 불렀다 한다. 그러다 마을의 지형이 마치 물고기의 머리같이 생겼다고 하여, `어머리` 또는 `어두(魚頭)`라 하였다고도 한다.
원골 저자거리 동남쪽에 위치한 마을로 신라시대 이 마을에서 경주로 갈 때면 넘어야 하는 시지막고개 위에 빈집이 있어, 이고개를 지나는 나그네들이 직접 밥을 해서 먹고 쉬어 갔다고 하는데, 이 집을 원집이라 불렀으며, 마을 이름도 `원골` 또는 `원동(院洞)`이라 하였다고 한다. 다른 이야기로는 조선 순종(純宗)때, 경주 고을 원이 이곳 지방을 순시할 때 쉬어 가도록 지은 집이 있었다고 하여, `원골`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중마을 저자거리와 원골 사이에 있는 마을로 두마을 가운데 있다하여 중(中)마을로 불렸다 한다.
듭머리 뒤등산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마을로 마을 들어가는 입구에 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감산2리
방기마을 뒤등산 서쪽 골짜기에 형성된 감산2리 자연부락중 첫마을로 옛날부터 산에 둘러싸인 이 마을에 사철 아름다운 꽃이 골짝마다 피어, 마을이 온통 아름다운 꽃 속에 묻혀 있었다고하여 `방터` 또는 `방기(芳基)`라 불렀다고 한다.
횟골은 옛날 이 마을에 큰 불이 나서 마을이 잿더미로 변하여 새로 마을을 일으키고 난 다음, `횟골` 또는 `회곡(灰谷)`이라 불렀다고 한다. 다른 이야기로는 이 마을에 큰 회나무가 있었다고 하여 `횟골` 또는 `회곡(檜谷)`이라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마을에는 당나무들이 숲을 이룬 당걸에 두꺼비바위가 있다. 남쪽을 향해 슬금슬금 기어가는 듯 고개를 빼들고 있는 두꺼비바위는 마치 살아있는 두꺼비가 나들이 나온 것 처럼 자연스럽다. 마을사람들은 복스럽게 생긴 이 두꺼비가 이 마을에 복을 가져다 준다고 믿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두꺼비가 입을 남쪽으로 향하고 있어 남쪽마을(방기마을)에서 먹이를 먹고 뒤는 이 마을에 누기 때문에 방기마을은 못살고 이 마을은 잘산다고 하는 말이 생겨나 방기마을 사람들이 두꺼비를 다른 방향으로 돌려 놓아야 한다고 항의하기도 했다고 한다. 실제로 이 마을은 주변마을에 비해 형편이 넉넉해 보였다.
소목은 옛날 이 마을에 커다란 아름드리 소나무가 마치 정자처럼 두 그루 서 있었는데, 이것을 보고 사람들이 `소미지` 또는 `소모기`, `소목(蘇木)`이라 불렀다고 하며, 이 소나무에 사람의 손이 닿으면 마을에 재앙이 온다고 하여 `손목(損木)`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혹은 고을이 좁아서 `소목`이라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옛날에 2개의 정자가 있었는데 그 정자 이름을 따서 소미지라 하였다고도 한다. 이 마을 입구에는 지금도 나무 두그루가 엉켜 서있는데 은수원현사시나무와 느티나무로 마치 사랑하는 연인이 얼싸 안은 듯 모통과 가지가 뒤엉켜 붙어있다.
장사(長沙)는 임진왜란 때에 영산 신씨(靈山辛氏)성을 가진 어느 이가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며, 마을 동쪽에 있는 산이 마치 긴 뱀처럼 생겼다고 하여 `장사(長蛇)`라고 부르다가, 조선 말기에 정(鄭)진사가 벼슬에 오르자 `장사(長仕)`로 불려지고 있다.
감산에는 이 외에도 땅골, 배리미, 범벅지, 산막 등 자연부락이 있었으나 지금은 거의 민가가 없어지고 이름만 남아있다.
감산은 1리가 가구수 가구, 인구 명, 2리가 가구수 가구, 인구 명이고 최고령자는 로 마을에 산다. 이 마을 출신으로는 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