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모양이 `八字`, `助字`형을 이루고 있어 팔조리(八助里) "매곡마을에 `八자`형의 산이 있었으나 3년전 이자리에 주유소(감포주유소)가 들어서면서 없어지고 수젯골 연대산 준령이 매곡에서 봤을 때 산모양이 `助字`형성을 이루고 있어 팔조리(八助里)라 불린 것으로 안다."고 이 마을이름의 유래를 밝힌 이장 양희태씨(47세)는 지금은 `八`자산이 없어진데 대해 몹시 안타까와 한다. 또 다른설에 의하면 마을뒷산 모양이 8자(八字)처럼 생겼으며 여기에 서로돕고 살라는 뜻을 더하여 이름 지어졌다고도 한다. 팔조리는 양씨, 박씨, 하씨 집성촌인 매곡, 양지, 음지, 홍덕, 수젯골 등 자연부락들이 모여 이룬 마을로 `팔조(八助)`, `팔조포(八助浦)`, `바짐`, `바지미`라고도 불렸다고 전한다. 팔조리는 경주에서 감포방향으로 전촌삼거리 못미쳐에 위치한 마을이며 당산제를 지내는 당사나무가 있어 당삿들로 불리는 산간지로서는 제법 넓은 들을 지니고 있고 이 들을 중심으로 산기슭 여기저기에 옹기종기 촌락이 펼쳐져있는 정겨운 마을이다. 당삿들은 동으로 바다와 맞닿아 있으나 해풍에 별 영향없이 농사가 잘되는 편이다. 팔조리는 옛날 매화나무가 많았다고 매곡(梅谷; `매골`, `매갈`, `매가리`라고도 불림)이라 불리는 박씨 집성촌과 가뭄이 들어 비가오지 않을 때 기우제를 지낸곳으로 수신(水神)을 모셨다고 `수제골`(水際), `무제`라 일컬어지는 수젯골, 마을이 남쪽을 향해있어 늘 따사로운 햇살이 들어온다고 이름 붙여진 양씨 집성촌 양지마을, 하씨의 집성촌으로 양지마을 맞은편 음지쪽에 위치하여 `서촌`(西村)이라고도 불리는 음지마을, 임진왜란 때 전사한 김소위 장군의 비석과 무덤이 있고 주인인 김장군과 죽음을 같이한 충직한 말을 기리기 위해 마을이름을 `홍마`(紅馬)라 부르다 `홍덕`(紅德), `홍두테`라고 불렸다는 홍덕마을 등 다섯개의 자연부락이 모여 이 마을을 구성하고 있다. 또한 팔조리에는 선조 20년(1587)에 무과에 급제하고 임진왜란때 의병을 일으켜 공을세워 선무원종공일등(宣武原從功一等)에 녹훈되고 훈련주부를 지냈으며 현종 9년(1668년)에는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추증된 숭의공 덕엄 김자은을 향사하던 덕산사가 있었으나 고종5년에 금령으로 헐리고 지금은 그 터만 남아있다. 음지마을 하씨 집성촌어귀에는 첨정(僉正) 하해채(河海債)의 학덕을 추모하여 그 후손들이 일제 때 세웠다는 연암정(蓮庵亭)이 있다. 수제마을 뒷산에 산성이 있었으나 지금은 무너져 돌무너기만 잡목에 뒤덥혀있다. 이마을 이장 양희태(梁熙泰; 47세)씨는 "산성부근에는 와편이나 토기들이 많이 흩어져 있었다."고 말해 선조들의 흔적들을 증언했다. 양 이장에 따르면 팔조리는 현재 107가구에 306명의 주민이 살고있으며 이마을 최고령자는 경주 김씨 숭의공 덕엄 김자은의 후손인 김재수(金在壽;97세)할아버지로 알려졌다. 12대째 팔조리에 살고 있다는 양이장은 "약 360-400년전에 이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가로사진>; 산모양을 八자 또는 助자로 말해지는 수젯골 뒷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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