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의(慕義) 일제 때 모아(毛兒)로 1,900마리 최대 한우단지 첫눈이 내린 후로 제법 매서운 쌀쌀한 겨울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높은 산과 응달진 산기슭에는 아직 잔설이 희끗희끗 남아있고, 낮은 개울물은 아예 통째로 얼어붙은 채 잔뜩 움츠리고 있다. 모아는 형산강을 끼고 황학산 기슭에 자리한 마을로 양지아파트와 모아초등학교가 이 마을에 있다. 경주에서 7번 국도를 따라 포항방면으로 가다가 삼일주유소가 있는 지점에서부터 모아이다. 이 마을은 황학산을 사이에 두고 동쪽은 화산과 동산에 접해있고, 남쪽은 신당, 북쪽은 오야, 서쪽은 청령과 사방에 닿아 있다. 경주시청에서 9km, 12분 거리이다. 모아는 경주시 천북면 지역으로 본래 모의(慕義)로 불렸는데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배락골, 사잇골, 노린골, 새터, 포전을 병합하면서 모아(毛兒)가 되었다. 따라서 옛날 이 마을에 몸에 털이 유별나게 많은 한 아기가 태어났는데 태어나자마자 걸어 다니고 말도 할 줄 알았다고 한다. 어느 날 이 아이의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이름을 ‘모아’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모아(毛兒)를 뜻풀이하여 지어낸 이야기로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라고 한다. 모아는 본동에 해당하는 ‘안마을’을 중심으로 국도변의 ‘새터’와 그 남쪽의 ‘노린골’, 북쪽의 ‘사잇골’, ‘배락골’이 모아1리를 이루고 있고, 형산강 건너 청령과 사방 사이에 있는 ‘포전’이 모아2리를 이루고 있다. 경주이씨 100가구 모아는 안마을을 중심으로 경주이씨들이 100여 가구 집성촌을 이루고 있고, 배락골에 경주최씨 20가구, 노린골에 경주박씨 10여가구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이 마을 최고령자는 안마을에 사는 최순길(96·안호댁)할머니이다. 모아는 아파트를 포함해 총 442가구에서 1천3백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천북면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모아1리의 경우 404가구에서 1천2백95명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주로 벼농사에 의존하고 있고, 한우(1,900두)와 정구지(10가구), 딸기(2가구)를 생산하고 있다. 특히 한우는 경주에서 제일 많이 기르고 있는 대표적인 한우단지로 알려지고 있다. 모아2리(포전)는 38가구에서 120명의 주민이 생활한다. 본래 마을 전체가 사과밭이었는데 최근 기후변화로 사과농사가 시원찮아 사과나무를 대부분 뽑아내고, 지금은 정구지와 딸기 재배를 많이 하고 있다. 딸기는 10가구, 정구지 7가구, 사과 5가구가 종사하고 있다. 동제 이 마을은 동제를 음력 정월보름날에 지내다가 1969년부터 지내지 않는다. 동제를 지내려고 날을 받아 놓으면 계속 초상이 나 동제를 지내지 못하다가 마을 어른들이 의논해 동제를 지내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당목 이 마을에는 오래된 팽나무가 당나무로 있었는데 한 교인이 자기 밭에 그늘이 진다고 50년 전에 베었다고 한다. 천북 제일의 마을 모아(毛兒) 본래 모의(慕義)라고 했던 신당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경주이씨 집성촌으로 모아의 한가운데에 자리한 마을이라 ‘안마을’이라고도 한다. (65가구) 노린골 모아 남쪽에 있는 마을로 흙이 마사토이면서 노란색을 띠고 있다. 비만 오면 모래가 흘러내려 황토물과 토사가 내려와 마을과 들을 덮었다고 하여 ‘노린골’ 또는 ‘황곡(黃谷)’, ‘황동(黃洞)’이라 불렀다고 한다. (28가구) 배락골 옛날 이 마을에 큰 배나무가 있었는데, 해마다 많은 열매가 열지만 익지 않고 떨어지므로 ‘배락골’, ‘이락골[梨落谷]’이라고 했다고 한다. 모아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25가구) 사잇골 모아와 배락골 사이에 있는 마을이라 ‘사잇골’, ‘샛골’, ‘새골’, ‘간곡(間谷)’이라 불렀다고 한다. (20가구) 새터 일제강점기에 새 도로가 나면서 그 도로변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 ‘새터’, ‘신기(新基)’라 불렀다고 한다. 현재 양지아파트 들어선 곳이다. 모아장이 섰던 곳이라 ‘장테’라고도 한다. (38가구, 아파트 209세대) 포전마을 일제강점기 때 사과를 재배하는 농가가 들어서면서 이루어진 마을이며, 그 당시 물가에 밭을 일구었기에 ‘포전마을’이라고 했다. 지금의 모아2리로 형산강 건너편 청령과 사방사이에 있다. 본래는 형산강이 포전마을 서편 청령쪽으로 흐르고 모아와 포전마을이 이어져 있었는데 물길이 바뀌면서 지금처럼 그 사이에 형산강이 흐르고 있다. (38가구) 효자와 충신 줄이어 세효정(世孝亭) 경주인 운암(蕓庵) 박서주(朴瑞柱)와 그 아들 죽당(竹堂) 박원대(朴元大)의 효행을 추모하여, 1978년 후손들이 노린골에 세운 정자이다. 운암공은 조선 숙종 35년(1709) 현곡 나원에서 태어나 효성이 지극해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추증되었고, 아들 죽당공 역시 효행으로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추증되었다. 정면4칸, 측면2칸, 팔작지붕으로 가운데 2칸은 마루, 양쪽에 방을 배치했다. 의모당(宜慕堂) 임진왜란 때 창의해 순절한 경주인 모의당(慕義堂) 이극복(李克福), 석계(石溪) 이기복(李起福) 형제를 추모하여 1963년 후손들이 사이골에 세운 재실이다. 이들 형제는 선조 27년(1594)에 함께 무과에 급제해 극복은 훈련첨정(訓練僉正), 기복은 훈련판관(訓練判官)이 되어 계속 싸우다가 순절했다. 모두 선무원종공신일등(宣武原從功臣一等)에 녹훈되고, 뒤에 극복은 병조참판, 기복은 공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의모당은 본래 경주이씨 문중에서 세웠던 모의정(慕義亭)이 불타 없어지고, 그 터만 남아 있던 것을 사잇골에 옮겨 다시 지은 것이다. 모의정 터는 구망에 있으며 ‘쉰정자터’라고도 한다. 지금의 삼일주유소 자리이다. 정면4칸, 측면2칸, 팔작지붕으로 가운데 2칸은 마루, 양쪽에 방을 배치했다. 동강정(東岡亭) 임진왜란 때 창의한 경주인 동강(東岡) 이홍각(李弘懿)을 추모하여 후손들이 1958년에 공이 만년에 은거하던 곳에 세운 정자이다. 공은 만년에 찰방을 지냈다. 정면4칸, 측면2칸, 팔작지붕으로 가운데 2칸은 마루, 양쪽에 방을 배치했으며 앞면 마루에는 난간을 설치해 두었다. “산이 걷는다” 모아리 지석묘군(毛兒里支石墓群) 본래 20여기가 있었다고 전하는데 현재 용감방천에서 파라골 방향으로 7기가 있고 그 북쪽으로 조금 떨어져 1기가 더 있다. 남북으로 일렬로 배치되어 있는 이 고인돌은 현재 2기는 고임돌과 덮개돌이 모두 남아 있고, 나머지는 덮개돌만 있다. 이 고인돌에는 다음의 이야기가 전한다. 옛날 모아 북쪽의 황학산(黃鶴山)이 남쪽으로 걸어왔는데, 빨래하던 아낙이 보고 “산이 걷는다”고 소리치는 바람에 산이 물러가고 그 발자국이 남았다고 한다. 7개의 바위가 나란히 있어 ‘칠성암(七星岩)’이라고 불렀으며 이 바위에 치성을 드리면 아기를 낳는다고 하여 마을사람들이 기도하기도 했다고 한다. 골바우 배락골 뒷산에 있는 바위로 암바우와 숫바우가 있다. 왜놈들이 바위를 깨려고 하다가 큰 청 지네가 지나가서 못 깼다고 한다. 황학산 기슭으로 이 때문에 골산이라고도 한다. 황학산(黃鶴山) 천북면의 모아리와 오야리, 화산리에 걸쳐 있는 높이 194m의 산. 노리미기라고도 한다. 복병산(伏兵山) 노린골 남쪽에 있는 산으로 임진왜란 때 군사들이 숨어있었다고 한다. ‘빌봉재’라고도 한다. 일리(一里)갓 안마을 동쪽에 있는 산으로 옛날에 산이 헐벗어 비가 조금만 와도 토사가 흘러내려 마을주민들이 돈을 갹출하여 산을 사서 숲을 조성한 동네산이다. 지금은 개인산이 되어있다. 자래머리 오야와의 경계부분의 황학산 서쪽기슭으로 자라머리처럼 생겼다고 한다. 자래미기 모아 북쪽 황학산의 잘룩하게 낮아진 부분으로 자라형국의 그 목에 해당한다. 임진왜란 때 군사 숨은 곳 괴나골 못안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괴목이 많았다고 한다. 너구리골 옛날에 너구리가 살던 굴이 있었다고 하는 골짜기로, 못안골 동남쪽에 있다. 너구리봉 너구리골 위에 있는 산이다. 솔다배기 복병산 서북쪽에 있는 산등성이다. 솟태재 동산리에서 희망촌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우현(牛峴)이라고도 한다. 옛날에는 큰 통로였다고 하나 지금은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다. 댓골 못안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대나무가 많았으므로 ‘죽곡(竹谷)’이라고도 한다. 못안골 노린골 동쪽에 못이 있던 안쪽 골짜기로 지금은 못이 없어졌다. 무등골 ‘물골’이라고도 하는 댓골 동쪽 골짜기로 물이 흔하다. 업은골 대정터와 구망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지금의 천평가구 뒤 골짜기이다. 일리골 일리갓에 있는 골짜기다. 달맞이 하던 산이라 ‘달골’이라고 했다. 새받이보 새터 동남쪽에 있던 보로 지금은 없어졌다. ‘새보’라고도 한다. 구망(九望) 아홉 골짜기의 물이 합류하는 들로 새터 남쪽 끝에 있다. ‘구매이’라고도 한다. 삼일주유소 동쪽 일대이다. 오 정승 대문 밖 ‘댄밖’ 노리미 노리미기 밑에 있는 들이다. 골바우 밑이다. 대문밖 오 정승 집의 대문 밖이었다고 하는 들로, 새터 남쪽에 있다. ‘댄밖’이라고도 한다. 대정태 노린골 서남쪽에 있는 들로 옛날에 이곳에 대장간이 있었다고 한다. 등거리 안마을 서쪽 등성이 밑에 있는 들로 ‘등평’이라고도 한다. 속새미 대문밖 서쪽에 있는 들로 ‘속삼’, ‘속샘이’, ‘소천(小泉)’이라고도 한다. 안섬안 배락골 서쪽의 7번국도 서편에 있는 들로 주변보다 좀 높은 곳이라 물길이 돌아나가서 섬처럼 생겼다고 해서 ‘안섬안’이라고 불렀다. 경지정리하면서 지금은 없어졌다. 작은내이 새터 서북쪽의 들로 작은 내가 있다. 물이 없어 건모를 심었다고 ‘건모지기’라고도 한다. 만정지 모아 서쪽에 있는 버덩으로 옛날에 만정이라는 오씨들의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모아보 모아리와 오야리에 걸쳐 있는 봇도랑으로 ‘옥야보(沃野洑)’라고도 한다. 아주 오래된 보로 경주에서 제일 오랜 보라고 한다. 물 오염되어 용 날아가 용감 마을진입로에 있는 도랑으로 옛날에는 물이 좋아 용이 살았는데 지금은 물이 오염되어 용이 날아갔다고 한다. 이 물로 농사도 짓고 빨래도 하고 마을에서 다용도로 사용했다고 한다. 모아장(毛兒場) 5일, 10일 모아에 섰던 장으로 해방 후 1950년대에 들어섰다가 1970년대에 없어졌다. 지금의 새테에 있었다고 한다. 모아초등학교 마을 어귀에 자리한 모아초등학교(교장 권재민)는 1949년 12월 1일에 개교. 지난해까지 제53회 2천3백33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으며, 현재 본교 6학급, 모서분교 3학급, 본교와 분교에 병설유치원이 각각 1학급씩 있다. 재학생은 총 98명으로 본교 80명, 모서분교 18명이다. 닭똥냄새로 생활에 어려움 모아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한우단지이다. 따라서 엄청난 양의 소똥이 나오는데 이를 퇴비처리해서 자원화 하는 일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애로가 많다고 한다. 이 설비를 위한 막대한 재원이 소요되어 개인이 하기엔 무리가 있고, 시 차원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 마을은 희망촌에서 닭똥을 발효시키는 과정에서 나는 악취 때문에 창문을 못 연다고 한다. 특히 여름철에 남풍이 불면 악취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고, 생활에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이에 대한 대책이 시급한 실정이다. 또 양지아파트에 주차공간이 부족해 아파트 주민들이 도로변에 주차를 하는 바람에 아침 일찍 농기구를 몰고 나가면 차량 교행이 안 되어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에서 북쪽 진입로를 확장해 주 진입로로 사용하려고 한다. 이미 100여m는 확장했고, 나머지 350m 가량을 빨리 공사했으면 하고 바란다. 이 마을 출신으로는 이장수(67·전 경주시의장), 이진곤(59·국민일보 논설위원), 최삼호(49·경주축협 조합장), 이형락(43 ·대구지청 검사), 이춘건(37·대구지법 판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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