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장은 신라 3기8괴(三奇八怪)중 하나인 금장낙안(金藏落雁)의 금장대(金藏臺)가 있어서 `금장` 이라 불렀다고 한다. 또한, 옛날 이곳에 한 스님이 살고 있었는데, 금(金)지팡이에 시주바랑을 달아 놓으면 그 지팡이가 혼자 나가서 한 사람 분의 식량을 시주해 왔으므로, `금장(金丈)` 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이 마을은 금장과 옹기골 가삼골이 합하여 금장리를 이루고 있다. 전에는 석장도 금장에 포함되어 있었으나 동국대가 들어서면서 석장은 1988년 경주시로 편입되면서 석장동이 되었다. 지금의 금장리는 면소재지가 1리, 옹기골, 가삼골이 2리, 금성아파트가 있는 마을이 3리, 삼성아파트가 들어선 일대가 4리를 이루고 있다. 금장은 서천과 북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이 곳에는 임금이 노닐던 금장대가 있다. 얼마나 경치가 좋았던지 날아가던 기러기도 그 황홀한 경치에 취하여 쉬어갔다고하여 금장낙안이라 했던 금장대, 깍아지른 암벽위에 올라서면 서라벌이 한눈에 보이고 발 아래에는 애기청소가 있어 형산강의 맑은 물이 이 곳에 와서는 급한 걸음을 멈추고 쉬어가는 듯 맴을 돈다. 마을주민 이상조씨(67 금장1리 582-5)에 따르면 "금장대 정상에는 돌기둥으로된 8각정의 정자가 있었으나 6.25당시 현곡지서에서 돌기둥을 사격표적으로 사용하여 무너져 버렸다."고 한다. 금장대에는 애기청소에서 약15m 높이의 벼랑위에 열명정도는 둘러 앉을 턱이있고 그곳에 높이2m, 폭9m의 암벽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여기에는 수천년간 풍우에 시달려 희미하긴 하지만 방패형, 도토리형, 꽃문양 등의 선사시대 선각 암각화가 27점 남아있고 경상북도 기념물 제98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금장대 아래에는 김동리 무녀도의 작품 배경이된 애기청소가 있다. 물이 깊어 명주실 한 타래를 넣어도 끝이 닿지 않았다고한다. 애기청소는 해마다 애기가 한명씩 빠져 죽었다고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하며 옛날에 고관대작들이 기생들과 금장대에서 놀다가 기생이 빠져 죽었다고하여 예기청소(藝妓靑沼), 여기청소(女妓靑沼)라고도 한다. 옹기골은 이 마을의 흙의 질이 아주 우수하여 옹기토(壅器土)로 적합하여 옹기가마가 많았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 주민 설관주씨(현곡새마을금고 이사장)에 따르면 "80년도 경지정리를 할 때 신라시대 토기조각과 기와조각들이 많이 출토되었으므로 신라시대부터 옹기를 생산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가삼동(加蔘洞)은 옛날 이곳에서 가삼(가삼:인삼)을 재배하였다고 하여, `가삼동(加蔘洞)`이라 불렀다 한다. 다른 이야기로는 옛날 홍수로 강물이 밀려올 때 이곳에서 가삼(가자미)을 잡았다고 하여 `가삼동`, `까자미골`이라고 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가자미는 바다 고기로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보기에는 미심쩍은 점이 많다. 금장은 70년대 까지만 해도 홍수가 나면 형산강을 사이에 두고 고립되었다. 학교에서는 비만 오면 이 마을 학생들을 귀가시켰고 장마철에는 결석처리 조차 하지않았다. 강을 건너는 나룻배가 있어 금장도선장이라는 나루터가 있었으나 지금은 제방이 축조되고 다리가 놓였다. 금장은 1리(이장 조희우) 142세대 428명, 2리(이장 장기해) 85세대 262명, 3리(이장 조희주) 195세대 591명, 4리(이장 이상식) 631세대 2,011명이다. 이 마을 최고령자는 김정옥할머니(금장4리 삼성강변타운 102동 308호)로 92세이다. 서울시 부시장을 지낸 백상승씨가 이마을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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