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천리(乾川里)
‘까치내’→‘거치내’→‘건치내’→‘건천(乾川)’
김유신 장군의 깃발 꽂았던 돌(기간지주)
갑자기 추워진 탓에 주부들의 김장일손이 분주하다. 건천리 작원마을 잘감들 응달진 논배미의 얼어버린 물웅덩이가 한낮인데도 녹지 않고 하얗게 웃고 있었다. 고지마을 석문정 골목어귀에는 노랗게 송골송골 피어난 감국이 향기를 머금은 채 언 입을 앙다물고 있었다.
건천은 경주시 건천읍 소재지로 행정, 상업, 교통의 중심지이며 서경주의 중심이다. 건천은 까치로 변해 신라 진영을 탐색하던 백제공주를 잡은 김유신 장군의 전설이 얽힌 신라 때 쌓은 토성 ‘작원성(鵲院城)’이 있는 곳이라 본래 대곡을 포함해서 ‘작원(鵲院)’이라고 불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지금도 작원마을이 건천리 중심에 자리하고 있음이 이를 뒷받침한다. 또 ‘거치내’, ‘건치내’라고도 불렸으며 이를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보이는 ‘건천(乾川)’으로 불린 것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구역 통 ․ 폐합 이후 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마을을 흐르는 냇물이 고여 있지 않고 배수가 잘 되어 항상 건조하고 한발이 심해 ‘건천’이라 불렀다는 설이 전해오고 있으나 이는 한자표기를 그대로 의역함으로써 빚은 오류로 설득력이 부족하다. 이 지역이 자갈땅으로 물 빠짐이 잘되긴 하지만 엄연히 물이 흐르는 거랑을 마른거랑으로 부르는 것은 이치에도 맞지 않는다. 이 보다는 경주의 서북쪽[건(乾)방향]에서 흘러드는 거랑이므로 ‘건천(乾川)’이라 했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아 보인다. 그러나 이 보다는 ‘건천’ 이전의 ‘거치내’, ‘건치내’에 대한 유례를 밝히는 일이 더 중요해 보인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까치와 관련해 ‘까치내’가 ‘거치내’로 된 것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하면서 숙제로 남긴다.
경주 서북쪽 거랑이라 ‘건천(乾川)’
건천은 행정구역상 4개리로 구획되어 있지만 고지마을(건천4리) 외에는 읍 소재지를 중심으로 아파트 등 다가구주택이 늘어나면서 도시화되어 밀집한 채 한 마을을 이루고 있다. 건천읍사무소 주변의 ‘건천’이 건천1리(249세대 566명), 건천초등학교 동쪽일대의 ‘작원’이 건천2리(680세대 1735명), ‘장터’가 건천3리(183세대 447명), 그 남쪽 거랑 건너편의 ‘고지’가 건천4리(83세대 207명)를 이루고 있다.
건천은 주민 약 60%가 농업에 종사하고, 직장인과 상업인이 각각 20%정도이다. 이 마을은 주로 벼농사에 의존하고 있고, 찰보리 재배와 한우 400여두를 기르고 있다. 건천시장을 중심으로 도로변에 상가가 형성되어 있고, 교통이 편리한 관계로 아파트 등에 입주한 직장인들도 많다. 그래서 건천은 인구가 꾸준하게 늘어나는 마을이다.
동제 이 마을은 1970년대까지는 매년 정월 보름날에 동제를 지냈다. 그 이후 동제를 지내지 않고 있다가 최근에도 몇 년간 동제를 지냈다고 한다. 최근 동제를 지내게 된 것은 자동차 등 각종 사고로 마을의 젊은이들이 많이 죽는 일이 발생하고 이런 일이 동제를 지내지 않아서 그렇다는 여론이 일어나 읍사무소가 주관해서 6년 전부터 몇 해 동안 고사를 지냈다고 한다.
당목 시장 앞 도로변 승강장에 수백 년 된 포구나무가 있었는데 6년 전에 태풍으로 쓰러져 죽고 지금은 그 후계목으로 느티나무를 심었다.
까치로 변했던 백제공주
건천(乾川) 건천읍사무소가 있는 마을로 천포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작원성 서편에 흐르는 내를 끼고 있는 이 마을은 작원성의 까치설화와 관련해 ‘까치내’가 ‘거치내’, ‘건치내’로 바뀌어 불리다가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건천’이라 부르게 된 것으로 보여 진다. 행정구역상 건천1리, 현재 총 249세대 566명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작원(鵲院) 건천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신라 때 김유신 장군이 백제를 공격하고자 이곳에 주둔할 때, 백제의 공주 계선이 까치로 변해 대장기에 앉아 신라 진중으로 염탐하다가, 김유신 장군의 장검에 의해 떨어졌다. 이후 이곳을 ‘작성(鵲城)’ 또는 ‘작원성(鵲院城)’이라 불렀고, 마을이름도 ‘작원’이라고 했다고 전한다. 건천초등학교 동쪽 일대에 자리한 마을로 건천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며 중심마을이다. 건천2리에 해당하며 총 680세대에 1천735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장터 건천읍의 시장터에 있는 마을이다. 건천3리에 해당하는 이 마을은 총 183세대에 447명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작원 남쪽에 있다.
고지(高旨) 경주최씨 집성촌으로 부근의 다른 마을에 비해 다소 높은 지대에 마을이 있으므로 ‘고지’라고 했다. 또 다른 이야기는 지체가 높은 양반이 산다고 하여 ‘고지’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건천 동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건천4리에 해당하는 이 마을은 총 83세대에 207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양포동 옛날부터 버드나무가 많은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와서 배를 대던 포구가 있었다고 해서 양포동이라고 했다고 전한다. 이곳은 깊이 파면 짠물이 올라왔다고 한다. 그리고 갯벌층의 흙이 나온다고 한다. 작원마을 북쪽 거랑 건너에 있다. (14가구)
신라 때 쌓은 흙성 아직 남아
작성(鵲城) 터 신라 때 왕성의 서쪽수비를 위해 쌓았던 토성(土城)이다. 총길이 4,340척(尺)으로 ‘작원성(鵲院城)’ 또는 ‘작성(鵲城)’이라고도 불렀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 때 김유신(金庾信)장군이 군사 5만을 이끌고 이곳에 진을 치고 있을 때, 까치 한 마리가 대장기 끝에 앉아 울었다. 이를 본 군사들은 불길한 징조로 생각하고 진중이 어수선해졌다. 이때 김유신 장군이 긴 칼로 까치를 향해 크게 소리치자, 까치는 땅에 떨어져 아름다운 여자로 변신했다. 이는 까치로 변해 신라 진영을 염탐하러 온 백제공주 계선(桂仙)이었다. 김유신 장군은 까치가 백제 공주 계선임을 이미 알고 호통을 친 것이었다. 이런 연유로 이곳을 ‘작원성(鵲院城)’ 또는 ‘작성(鵲城)’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지금도 이 마을을 ‘작원(鵲院)마을’이라 부르고 있다. 성의 남문(南門) 터에 초석이 남아 있다고 전하지만 주민들은 어딘지 잘 모르고 있었다. 토성을 확인하기 위해 대곡리 새알못으로 들어가는 좁은 농로를 통해 토성을 잘라 길을 냈다는 새알고개로 갔다. 이곳에는 너비 10여m, 높이 7m가량의 흙성벽을 확인할 수 있었다. 주민들에 따르면 이 흙더미 중심부에 흙을 고정하기위한 나무 막대가 박혀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황토로 이루어진 저 흙더미가 1천4백여 년의 세월을 견뎌온 신라 때의 토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떨렸다.
김유신장군 기간지주(金庾信將軍旗杆支柱) 김유신장군이 이곳에 주둔할 때 깃발을 세우기 위해 세웠다고 전해오는 고지마을(건천2리 206번지)에 있는 화강석으로 만든 둥근 사다리꼴의 기간지주이다. 높이 1m, 너비 50cm정도의 이 돌은 가운데에 깃대를 고정하기위해 판 것으로 보이는 홈이 있다.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최근에 이 돌이 하루 동안 없어졌다가 하루 만에 다시 제자리에 왔다고 한다. 소중한 문화재임에도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방치되어 있음이 안타깝다.
전사한 두 아들 연금으로 다리 놓아
김순난자선비(金順蘭慈善碑) 대곡에 살던 김순난이라는 사람을 공덕을 기리기 위해 대곡마을 주민들이 작원에 세운 공덕비이다. 김씨에게 아들 2명 있었는데 6.25전쟁으로 모두 전사했다. 죽은 아들 대신 연금을 받게 된 김씨는 이를 뜻있는 일에 쓰고자 결심하고 대곡마을 사람들이 늘 건너다니는 거랑에 징검다리 대신 튼튼한 콘크리트 다리를 놓았다. 1960년대의 일로 대곡마을 사람들은 그 공덕을 기려 비를 세워 주었다. 마을주민들을 위해 선행을 실천한 가슴 뭉클한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이후 그 다리가 철거되고 그곳에는 5년 전 쇠로 만든 새 다리가 놓였다. 그런데 새로 다리공사를 하면서 이 공덕비를 뽑아 풀밭에 그냥 내버려두고 있어 보는 이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석문정(石門亭) 고려말 군자소감(軍資小監)을 지낸 경주인 충무공(忠武公) 최타(崔沱)를 위해 그 후손들이 1985년 고지마을에 세운 정자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지은 이 정자는 가운데 2칸을 마루, 양쪽 각 1칸에 방을 배치했다.
산골디 고동모양의 돌이 많이 나왔다고 하여 ‘산골디’라고 한다. 지금은 공단진입로를 닦으면서 없어졌다. 작원마을 동북쪽에 있다.
새알고개 건천의 동북쪽에서 대곡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덕고개’라고도 부른다. 본래 이곳은 작원성 성벽으로 막혀 있어 대곡사람들이 건천에 가기위해서는 고지마을로 돌아다녔다. 그러나 이곳 작원성 성벽을 자르고 길이 뚫리면서 건천으로 가는 지름길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이곳이 잘리면서 대곡사람은 좋아졌는데 그 후 건천은 처녀들이 바람나고 마을이 잘 안 된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개교 86주년 1만여 졸업생
숨은도랑 건천의 서남쪽에 있는 봇도랑으로, 은보(隱洑)라고도 한다.
잘감 건천 북쪽[감(坎북쪽을 가리킨다)]에 있는 들이다.
뒷번답 작원마을 뒤에 있는 들로 논이 많았는데 지금은 청우, 낙원, 금호, 전원하이빌 등 아파트가 들어서고 논 일부가 남아 있다.
번답못 번답에 있던 못이었는데 지금은 논으로 만들었다.
잘감보 잘감들에 물을 대고 있는 보.
건천초등학교 건천초등학교(교장 김재관)는 1921년 4월에 건천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한 이래 지금까지 1만432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명문이다. 현재 362명의 재학생이 이곳에서 미래의 꿈을 키우며 공부하고 있다.
건천장(乾川場) 건천에 있는 건천읍의 시장이다. 전에는 3일, 8일에 섰으나 지금은 5일, 10일에 장이 선다.
작원마을 쉼터 건립
건천은 아직도 상수도를 식수원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송선에서 내려오는 상수도 물이 아주 좋다고 한다. 그리고 건천은 재난이 거의 없고, 교통이 편리해 살기 좋은 마을로 지금도 꾸준히 주민이 늘어나고 있는 게 자랑이다.
이 마을 주민들은 김유신장군의 깃발을 꼽았던 기간지주가 있는 곳 일대에 쉼터를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그렇잖아도 관리가 잘 안 되는 기간지주의 관리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어 이곳에 주민들이 휴식할 수 있는 쉼터의 개설은 아주 절실하다는 주장이다. 또 비록 대곡 사람들을 위해 다리를 놓았지만 이 마을에 서 있던 김순난자선비가 쓰러진 채 방치되어 있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이를 제자리에 제대로 앉혔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그리고 건천리 일대가 도시계획이 잘 안되어 소방도로 확보가 거의 안 되어 있고, 특히 장터일대와 건천읍사무소 뒤쪽 등이 마을 안길 정비가 제대로 안 되어 있어 만약에 화재 등이 발생했을 경우 주민들의 안전이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한 정책적인 검토가 이루어져야할 것으로 보인다.
건천리 도시계획 다시 해야
건천리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분은 임준이(96 수곡어른) 할아버지로 아직은 혼자 생활하고 있을 정도로 건강하다. 이날은 마침 병원에 가고 안 계셨다. 뭐든지 다 잘 먹었다는 임 할아버지는 본래 술을 안 먹었고 담배는 피우다가 끊었다고 한다.
김판대(79 전 건천읍장), 박치현(74 전 무산중고등학교 교장), 정명구(58 예비역 육군중령), 황재윤(54 국세청), 이성환(48 육군대령)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추운날씨에도 취재에 협조해주신 000(2리), 000(3리)이장과 황시환(2리), 000(3리) 노인회장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