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천리(邑川里)
큰 포구마을 ‘읍내(邑內)’, ‘읍내포(邑內浦)’ → ‘읍천(邑川)’
대밭 끝에 마을이라 ‘대밭끝’, ‘대밭골’ → ‘죽전(竹田)’
달랑 한 장 남긴 채 매달린 빛바랜 달력이 슬픈 12월.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다고 했던가?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강물처럼 인간의 삶에 주어진 시간, 한번 흘러가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기에 회한을 남긴다.
경주시 양남면 읍천리는 월성원전 남문쪽의 나아해수욕장 남쪽 해변에 위치한 마을이다. 경주에서 국도 4호선을 따라 관해동재를 넘고, 양북 어일삼거리에서 감은사, 문무대왕수중릉을 거쳐 국도 31번을 타고 월성원전을 지나 월성원전 남문이 있는 나아리를 지나면 바닷가에 펼쳐진 마을이 읍천이다. 동쪽은 동해바다에 이르고, 북쪽은 나아리, 서쪽은 환서리, 남쪽은 하서리에 맞닿아 있다.
경주시청 기준으로 40km, 50분 거리이다.
읍천은 본래 이 일대의 중심 되는 큰 마을이며 포구를 끼고 있는 마을이라 ‘읍내(邑內)’, ‘읍내포(邑內浦)’라고 불러오다가, 나중에 ‘읍천(邑川)’, ‘읍천포(邑川浦)’라 고쳐 부른 것으로 보인다. 왜 읍천이라고 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전하는 바 없고, 마을 가운데로 내가 흘러 ‘읍천’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실제 이 마을 가운데 내가 있지만 평소에 물도 흐르지 않는 조그만 개울에 지나지 않아 설득력이 부족하다. 이 마을은 1914년 행정구역 통 ․ 폐합에 의하여 죽전리를 병합하여 ‘읍천리’로 했다고 하니 이때부터 ‘읍내’가 ‘읍천’으로 바뀐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읍내’가 읍천1리, ‘죽전’이 읍천2리에 해당한다.
해안마을이면서 농토까지
이 마을은 포구를 끼고 있는 해안마을이면서도 농토를 겸비하고 있어 예전부터 주민의 반은 어업, 반은 농업에 종사해 왔다. 그러나 월성원전이 들어선 후로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횟집, 모텔 등 상업과 직장을 나가는 주민이 늘어나고, 상대적으로 어민과 농민이 줄어들었다. 또 외지에서 유입된 인구가 급격히 늘어났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한전사택이 다. 한전사택의 경우 현재 주민등록상으로는 약 560세대가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나 실제로는 약 1천 세대가 입주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워낙 변동이 잦고, 마을과 교류도 거의 없는 상황이라 마을에서도 이들을 마을주민으로 인정하지 않고 실제로도 거의 한전사택은 자치구로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집계에서 이들을 제외했다.
그 외에도 마을에는 이주해온 사람과 세입자 등 외부에서 유입된 주민들이 많아 전통적인 시골마을의 정취는 사라진지 오래다.
원전으로 상업과 직장인 늘어
읍천1리는 총 191가구에 남자 254명, 여자 246명 등 500명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주민의 약 1/3은 어업에 종사하고, 약 1/3은 농업에 종사하고, 나머지는 횟집, 모텔 등 상업과 직장인 등으로 구분된다. 농업은 주로 벼농사에 의존하고 있고, 어업은 참전복, 돌미역, 문어, 도다리, 광어, 해삼 등의 해산물이 주산물이다. 이 마을 최고령자는 정문순(93 학선댁) 할머니로 건강이 좀 좋지 않다고 한다.
동제 이 마을은 해마다 음력 6월 초사흘에 동제를 지낸다.
당목 이 마을의 당나무는 두 군데에 모셔져 있다. 한 그루는 31번 국도변에 있는 회나무로 ‘아랫당수나무’라고 한다. 또 한 그루는 국도 서편 등성이에 있는 소나무(해송)인데 ‘윗당수나무’라고 한다. 두 나무가 모두 수령이 약 200년 정도 되었다고 한다.
마을의 절반이 외부 유입인구
읍천2리는 총 150가구에 180세대가 생활하고 있다. 주민 수는 약 450명이다. 그러나 마을의 어촌계원은 40명, 농업 조합원도 48명이며, 상업과 직장인 등 기존 주민들로 구성된 마을 회원은 75가구이다. 따라서 절반은 세입자 및 유입인구이다. 이 마을의 생산물도 1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마을 최고령자는 임장화(90 유동댁) 할머니로 마을회관에도 출입하고, 생활하는데 큰 불편이 없다고 한다. 다만 허리가 많이 굽었을 뿐이다.
동제 이 마을은 매년 6월 초에 좋은 날을 받아 동제를 지낸다.
당목 이 마을도 당나무가 두 그루이다. 할배나무인 소나무(해송)는 마을회관 앞에 있으며 1996년도에 심었다. 할매나무는 마을 뒤에 있는 200년 된 물포구나무이다. 이 나무는 굵은 밑둥치는 거의 썩고, 그곳에서 자라난 가지들이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고, 그 가운데 닥나무가 자라나고 있어 기이한 모양을 연출하고 있었다.
‘마쪽’(남쪽)마을과 ‘새쪽’(동쪽)마을
읍천(邑川) 자연부락 가운데에서 가장 큰 마을이며, 신라시대부터 어업의 중심지로 ‘읍내(邑內)’, ‘읍냇개’, ‘읍내포(邑內浦)’라고 불러왔으나, 훗날 마을 가운데로 내가 흘러 ‘읍천(邑川)’, ‘읍천포(邑川浦)’라 부르기도 한다. 죽전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죽전(竹田) 마을 뒤쪽 등성이가 모두 대밭이었는데 그 끝에 마을이 있어 ‘대밭끝’, ‘대밭골’이라 부르다 한자로 표기하면서 ‘죽전(竹田)’이라 불리고 있다. 지금도 이곳은 시누대밭이다. 읍천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나아와 읍천 사이에 있는 이 마을은 그 길이가 길어 대체로 남쪽에 있는 마을을 ‘마쪽’[죽전의 마쪽(남쪽)에 있는 마을], 그 동쪽에 있는 마을을 ‘새쪽’[죽전의 새쪽(동쪽)에 있는 마을]으로 구분해 부르기고 한다.
조공 바친 미역 생산한 ‘가지기돌’
가운데등 봉산골과 문등골 가운데 있는 등성이.
뒷절등 절이 있었다고 하는 등성이, 읍천 서남쪽에서 환서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망재 읍천 서쪽에 있는 고개. 환서로 넘어가는 길이다.
떡달골 읍천 남쪽에 있는 골짜기.
문등골 읍천 서쪽에 있는 골짜기.
봉산골 읍천 북쪽에 있는 골짜기.
가지기돌 읍천 북쪽에 있는 바위. 그곳에는 좋은 미역이 많이 난다. 이곳에서 나는 미역을 나라에 상납했다는 설이 있다. 지금도 미역이 많이 난다.
개채 나아천이 내려오는 끝에 위치한 바위이다. 지금은 원전에 매립되고 없다.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지점으로 모래벽으로 인해 이곳에 만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거시듬 가지기돌 남쪽에 있는 바위.
굼밧짬 대밭끝 남쪽에 있는 바위.
소금 굽던 가마 있던 바위
보릿돌 소금을 굽는 버리(가마)가 있던 바위로, 읍천 북쪽에 있다. 돌 가운데 제법 큰 웅덩이가 있는 평평한 바위다. ‘버릿돌’이라고도 한다.
삿갓듬 모양이 마치 삿갓처럼 생긴 바위로, 읍천 북쪽에 있다.
새이듬 가지기돌 남쪽에 있는 바위로, 바위 앞에 상여집이 있었다고 한다.
상두물 북쪽 방파제가 있는 곳으로 옛날에 상여가 지나는 길이라고 한다. 지금은 방파제로 매립되고 없다.
수리돌 대밭끝 남쪽에 있는 주변에서 가장 높은 바위다. 읍천마을과 죽전마을 경계지점에 있다.
수세돌 이곳에 미역이 많이 나는 바위로 죽전 미역의 30%를 차지한다. 죽전마을 동쪽에 있다.
양산할미 양산할매처럼 생긴 바위다. 혹은 양산군에 살던 어느 할미(할머니)의 바위였다고 한다. 읍천과 하서의 경계지점에 있다. 소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무속인들이 이곳에서 용황제를 많이 지낸다.
침목돌 가지기돌 북쪽에 있는 바위로 배의 침목(치, 방향타)처럼 생겼다.
재바우 양산할미돌 북쪽에 있는 바위로 그 아래 굴이 있는데 관성에서 불을 때면 이곳에서 연기가 났다고 한다.
참시미 찬물이 나는 샘이 있는 바위로 지금은 메워지고 없다. 재바우 남쪽에 있다.
타르방 죽전마을 북쪽, 나아해수욕장 남쪽에 있는 바위. 수세돌 남쪽에 있다.
정자처럼 경치 좋고 평평한 곳
해기정(海崎亭) ‘海崎亭’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던 바위, 상두물 뒤 산 위에 있었다고 한다. 이곳은 마치 정자처럼 경치 좋고 평평한 곳이다. 이곳에 큰 바위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읍천포(邑川浦) 읍천 앞에 있는 항구로, ‘읍냇개’, ‘읍내포’라고도 한다. 1987년에 접안시설이 마무리되어 각종 선박이 드나들고 있다.
죽전나리 죽전 앞에 있는 나루터. 지금은 없어졌다.
한골나리 읍천 동쪽에 있는 큰 나루터. 지금은 없어졌다.
대밭끝 불락케 대밭끝 앞 해변에 있는 모랫벌로 예전에는 그 폭이 30~40m에 이르렀는데 원전 방파제 때문에 대부분 유실되고 지금은 거의 없다.
대밭목 대밭끝 뒤쪽에 있는 들. 지금의 나산초등하교 정문에 해당한다. 이곳으로 31번국도 가 뚫렸다.
새탄들 읍천 서쪽에 있는 들로 ‘우합평(牛合坪)’이라고도 한다. 31번 국도 위 한전 사택 아래가 된다.
나산초등학교 본래 나아리에 있던 이 학교는 원전시설지구로 편입되면서 1998년에 이곳 죽전으로 옮겨 세웠다.
본래 나아에 있던 이 학교가 나산이라는 교명을 쓴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나산에 살던 김판용이라는 사람이 학교 부지를 희사했기 때문에 비록 나아에 학교를 지었지만 나산초등학교라고 명명했다. 결국 나아에서 읍천으로 이전했다. 최고의 시설을 자랑하는 이 학교는 학생수가 430명에 이른다.
마을진입로 확장, 해변공원 조성
옛날부터 읍천은 포구가 있어 큰 배들을 보유하고 큰 고기를 많이 잡았다. 귀상어(돈배기)를 많이 잡았고, 2년에 한 번씩 배손(풍어제)를 지냈다. 그러나 지금은 큰 고기도 없고, 풍어제도 동제를 지내는 걸로 대신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죽전은 멸치잡이(불배)로 살아나왔다고 한다. 이 마을은 지금도 전복, 미역을 비롯한 해산물을 많이 생산하고 있다.
특히 죽전마을은 1973년과 1974년 연속으로 대통령 특별하사금을 받은 모범마을이다. 새마을사업이 한창이던 당시 이 마을 부녀회에서 나아, 나산 골짜기에 올라가 나무를 해다 팔아 마을기금을 마련한 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만큼 주민화합이 잘되고 단합이 잘 되는 마을이다. 그리고 진저리(해초)가 많이 나 이걸 원료로 동물사료를 만들어 소득이 높았다. 그러나 지금은 원전이 생기면서 바다부지가 원전에 매립되어 진저리가 적게 난다고 한다.
이 마을 주민들은 31번 국도에서 이 마을로 들어오는 진입로의 확포장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이 길은 매우 좁아 차량 교행이 안 되고 대단히 불편했다. 올해 2차선으로 확장계획이 있는데 속히 이루어지길 바랐다. 이 길은 원전입구까지 해안도로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원전 방파제로 인해 마을 앞 해변의 모래유실로 인해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그리고 죽전마을에 1970년대에 방파제를 막아 돈사를 지어 쓰다가 방치되어 있는 것을 철거하고 이곳에 해안공원을 만들어 깨끗한 마을 환경을 가꾸는 게 또한 숙원사업이라고 한다.
이 마을 출신으로는 김영락(59 예비역 육군 중령), 엄경섭(55 예비역 육군 중령), 조한래(43 육군 중령) 등이 있다.
마을취재에 협조해 주신 000 이장(1리), 000 이장(2리)과 000 지도자(1리), 000 지도자(2리), 000 노인회장(2리)을 비롯한 마을 주민들에게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