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리(大洞里) 큰 골짜기 ‘한골’ 한자표기 ‘대동(大洞)’ 시집가기 전 남편 죽음 따라 죽어 눈 소식과 함께 수은주가 갑자기 영하로 뚝 떨어졌다. 노랗게 물들었던 은행잎 밤새 몽땅 바닥으로 내려앉았고, 막바지 가을 색 자랑하던 단풍들 추위에 질린 듯 하얗게 퇴색해 간다. 대동못에는 이미 청둥오리가 무리지어 노닐고 있었다. 대동은 안강 무릉산 동쪽 기슭의 큰 골짜기에 자리한 마을이다. 그래서 본래 ‘한골’이라고 불리던 것이 한자로 표기하면서 ‘한동(漢洞)’, ‘대동(大洞)’으로 불린 것으로 보인다. 이 마을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통 ․ 폐합에 의하여 박전, 산전리 일부를 병합해 대동리라고 했다고 하니 아마 이때부터 ‘대동리’가 된 것이 아닌가 싶다. 대동못 안쪽 골짜기에 자리한 이 마을은 동쪽은 대동못을 경계로 그 바깥쪽을 갑산리에 내어주고, 서쪽은 무릉산을 경계로 두류리, 북쪽 역시 무릉산을 경계로 근계리, 남쪽은 칠보산(형제봉산)을 경계로 검단리와 맞닿아 있다. 대동은 한골이라는 이름처럼 큰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이다. 한때 270여 가구에 이르는 큰 마을이었다고 한다. 마을이 크다보니 처음엔 1,2리로 분구되어 있었으나 1960년대에 이르러 합구되었다고 한다. 젖소 560두 높은 소득 대동은 8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졌다. ‘대김’, ‘박어리’, ‘산전(山田)’, ‘아래골’ 등이 당수나무숲 아래쪽에 대동못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고, ‘거랑골’, ‘웃마을’, ‘너망골’, ‘새테’ 등이 그 위쪽 산기슭에 한 마을처럼 올망졸망 모여 있다. 현재 이 마을은 총 96가구(실 거주 84)에 남자 122명, 여자 130명 등 주민 252명이 생활하고 있다. 주로 벼농사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외 젖소 8가구 560두, 한우 집집마다 1~2마리씩 약 100두 정도 기른다. 옛날에는 감도 많이 했으나 최근 감나무밭 3천여 평이 공장부지로 들어가면서 감은 거의 없어졌다. 이 마을은 10여 년 전 자동차부품공장 2개가 입주해 있고, 현재 공장부지를 조성하고 있어 4개의 공장이 더 들어올 예정이다. 이 마을 최고령자는 최복순(88 호산댁) 할머니로 바깥출입이 어려울 정도로 건강이 안 좋은 편이라고 한다. 동제 해마다 음력 정월 보름날 새벽에 동제를 지낸다. 당나무 마을 가운데에 있는 느티나무 ․ 물포구나무 ․ 소나무 등으로 수령 각 500년 정도 된 것으로 추정하는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옛날에는 숲이 지금도 훨씬 큰 규모로 있었으며 당집도 있었다고 한다. 나무가 늙고 쇠약해 태풍 등에 많이 죽었고, 당집도 40여 년 전에 허물어지고 없다. 10가구 안팎의 마을만 8개 대동(大洞) ‘한골’, ‘한동(漢洞)’이라고 하며, 한골못 서쪽에 있는 큰 마을이다. ‘한’은 크다는 우리말로 대동은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붙인 이름이다. 대김(代金) 옛날에 금이 나온 곳이라 하여 ‘대금’, ‘대김’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지금도 당시 금을 파내던 굴이 20m정도 남아 있으며, 그곳엔 현재 박쥐가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7가구) 박동(朴洞) 본래 박이 잘 되는 곳이라 하여 ‘박어리’, ‘박동’이라 불렀다고도 하며, 한골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혹은 박씨(朴氏)가 많이 살아 ‘박동’이라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지금은 박씨가 한집도 없다. (14가구) 산전(山田) 산을 개간하여 밭을 일구었던 곳에 마을이 생겨 ‘산전(山田)’이라고 했다고 한다. 지금은 모두 농토가 되어 있다. 박동 동북쪽에 있다. (8가구) 아랫골 가장 아래쪽에 위치한 마을이라 ‘아래골’, ‘아랫곡’이라고 한다. (11가구) 거랑골 거랑을 따라 마을이 들어서 ‘거랑골’이라고 했다. 지금은 거랑을 복개해 마을 안길로 사용하고 있다. (12가구) 웃동 가장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 ‘웃마을’, ‘웃동’이라고 했다. 거랑골 위쪽에 있다. (12가구) 너망골 웃동에서 산모롱이를 넘어서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너망골’이라고 했다. 거랑골 남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11가구) 새테 새로 생긴 마을이라서 ‘새테’라고 했다. 거랑골 남쪽에 있다. (11가구) 서원 정자 재실에 열녀각까지 직천서원(稷川書院)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공을 세운 영일인(迎日人) 수암(守庵) 정사진(鄭四震)을 추모하여, 후손들이 조선 숙종 37년(1711) 영천 우항(愚港)에 세웠다가, 고종 5년(1868) 금령에 의해 헐린 것을, 경주에 사는 후손들이 1979년 대동에 다시 세웠다. 당수나무숲 북편에 있는 이 서원은 둥근기둥으로 정면 4칸의 팔작지붕으로 가운데 2칸은 마루를 양쪽에는 방을 배치했다. 그 뒤쪽에는 사당인 숭학사(崇學祠)가 자리하고 있다. 매호정(梅湖亭) 조선 숙종 때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지낸, 경주인 매호(梅湖) 손덕승(孫德升)이 세운 정자로, 한골못의 위쪽에 있다. 본래 있던 것을 헐고 2003년에 새로 지었다. 야옹정(野翁亭) 무릉산 아래에 있는 정자로, 경주인(慶州人) 야옹(野翁) 김병하(金炳夏)가 세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지금은 거의 허물어지고 폐가가 되어 있다. 정면 3칸에 가운데 마루, 양쪽에 방을 배치했다. 이미 절반가량이 붕괴된 이 정자는 세월의 무상함을 웅변하고 있었다. 이의정(二宜亭) 영일인(迎日人) 곤봉(昆峰) 정사물(鄭四勿)과 쌍봉(雙峰) 정극후(鄭克後) 형제가 강학하던 곳으로, 본래 아랫골 골짜기에 있던 것이 오래되어 파손된 것을, 1970년에 후손들이 아랫골에 다시 세웠다. 영모재(永慕齋) 청안인 두촌(杜村) 이팽수(李彭壽)의 산소를 수호하기 위해 대동리 228번지에 세운 재실이다. 대숲 속에 고즈넉하게 자리한 이 재실은 정면 6칸에 동쪽에 3칸을 이은 ‘ㄱ`자형 건물로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었다. 고자실로 쓰였을 아리채도 3칸 건물이다. 그러나 약 20여 년 간 사람이 살지 않고 관리가 안 된 상태로 방치하고 있어 보호가 시급한 실정이다. 학질 걸려 죽은 남편 따라 죽은 열녀 경주손씨정열각(慶州孫氏旌烈閣) 열부(烈婦) 경주손씨(慶州孫氏)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조선 순조 때 세운 비각으로, 대동리 182번지 박동 입구에 있다. 본래 비(碑)가 있었으나 구한말에 도둑을 맞고, 근래 새로 세웠다. 경주손씨는 김성극(金聲極)의 아내로, 혼례를 치른 후 시집도 가기 전에 남편이 학질에 걸려 죽자, 연못에 몸을 던져 남편을 따라 죽었다고 전한다. 삼원사(三願寺) 한골에 있는 절로 영양인(潁陽人) 천영조(千榮助)가 1940년에 세웠다고 한다. 그 부인 구정원(具貞元)이 앞을 잘 보지 못하면서도 영검하여 사람의 운명을 점쳤다고 한다. 칠보산(七寶山) 안강읍 대동리와 사방리에 걸쳐 있는 높이 293m의 산으로 두 봉우리가 형제같이 함께 서 있다고 하여 ‘형제봉산’, ‘곤제산(昆弟山)’이라고도 부른다. 이 마을 남쪽에 있는 이 산은 7가지 보물이 묻혀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또는 금 강아지 8마리가 있었는데 한 마리는 잃어버리고 7마리가 있다고 해 ‘칠보산’이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장구미기 한골 서쪽에서 두류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장구처럼 생겼다. 장골재 한골 남쪽에서 검단의 장골로 넘어가는 고개. 이 마을에서는 ‘서낭미기’라고 부른다. 당수골 불당골과 서낭미기 사이에 있는 골짜기이다. 불당골 옛날에 절이 있었던 골짜기이다. 마을 남서쪽에 있다. 최근에도 이곳에서 불상이 나왔다. 호명사람들이 몰래 버린 개 구시골 길가에 공동묘지가 있는 산이다. 귀신이 나온다고 ‘구신골’이라고 하던 게 변해서 ‘구시골’이라고 했다고 한다. 도화동(桃花洞) 무릉산 기슭에 있는 골짜기라 ‘도화동’, ‘도화골’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한골 서쪽에 있다. 말무덤 서낭미기 입구에 있는 무덤으로 정승이 타고 가던 말이 이곳에서 죽어 그 자리에 묻었다고 한다. 막골 웃동마을 서북쪽 골짜기로 옛날에 막집이 많았다고 한다. 당수나무숲 이 마을 한 가운데 당나무로 받드는 노거수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옛날 한 정승이 마을 뒷산에 묘를 쓰고 나서 그것을 가리기 위해 마을 입구에 나무를 심은 것이라고 전한다. 옛날에는 숲이 크게 형성되어 있었으나 태풍 등으로 죽고 지금은 그 일부만 남아 있다. 칠성바우 아랫골 마을에 있는 7개의 고인돌이다. ‘칠성암(七星岩)’이라고 하는 이 바위들은 2개는 묻히고 5개가 남아 있다. 그러나 5개도 고임돌과 덮개돌이 거의 다 묻히고 그 일부만 지상부로 머리를 내밀고 있다. 개돌바우 한골들 논둑에 있는 바위로 그 위에 개를 다듬어 얹어 놓았는데 그만 그 개를 잃어버렸다고 한다. 주민들에 따르면 호명마을 사람들이 이 개 때문에 마을이 안 된다며 몰래 내다 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한골들 한골 앞에 있는 들. 한골못 안에 있는 들이다. 한골못 한골 동쪽에 있는 못으로 ‘대동지(大洞池)’라고도 한다. 신라 때부터 있었던 못이라고 전한다. 해마다 경로잔치 효성 깊어 한골은 산간마을이지만 대체로 넓은 농토를 가진 살기 좋은 마을이다. 지금도 젖소를 대량으로 사육하는 농가들이 많아 소득이 높은 마을이다. 이 마을은 주민들의 화합이 잘 되는 마을로도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이 마을 청년회와 부인회는 모임이 결선된 15년 전부터 해마다 3월 15일경이면 마을 어른들을 위한 경로잔치를 열어 오고 있는 효성 깊은 마을이다. 젊은이들은 어른을 공경하고 어른들은 젊은이들을 믿고 존중하는 가운데 주민화합이 이루어지는 모범된 마을이다. 박동마을 배수로공사와 마을농로 및 농수로 정비 이 마을은 그동안 누구나 기피했던 쓰레기매립장을 주민투표로 스스로 유치해 마을 숙원사업을 앞당겨 시행했다고 한다. 이 마을 어귀에 안강읍 쓰레기매립장이 5년간 가동되었다. 그러나 마을이 워낙 넓고 8개의 자연부락이 분포되어 있어 다른 마을에 비해 할 일이 많다고 한다. 현재까지도 마을의 농로와 농수로가 제대로 정비되지 않아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특히 박동마을 배수로공사가 시급한 과제라고 한다. 이 마을 출신으로는 정석권(56 경상북도청 서기관), 최현복(37 아시아나항공 기장), 도한은(59 경주경찰서) 등이 있다. 취재에 협조해주신 도두주 이장과 마을 어른들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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