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동읍 석계리(石溪里)
거랑에 돌 많아 ‘돌거랑’ ‘돌기’ ‘돌계(乭溪)’ ‘석계(石溪)’
당나무, 팽나무와 느티나무의 연리목
입동을 지냈다. 온 산천을 붉게 물들이던 단풍마저도 찬 기운에 못내 힘겨워 낙엽 되어 뒹군다. 황금빛으로 물들었던 들녘이 농민들의 바쁜 가을걷이 손길을 재촉한다.
석계는 신라충신 박제상과 김씨부인의 전설이 얽힌 치술령의 동쪽 기슭에 자리한 마을이다. 치술령에서 이 마을 가운데로 흘러내리는 석계거랑에 유난히 돌이 많아 ‘돌거랑’, ‘돌기’, ‘돌계(乭溪)’, ‘석계(石溪)’, ‘석촌(石村)’이라고 했다고 한다. 또 박제상을 그리다가 치술령 망부석이 되었다는 김씨부인의 혼령이 새가되어 숨었다는 은을암(隱乙岩)에 연유하여 ‘석을지(石乙只)’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1882년에 작성한 호적단자(戶籍單子)에서 ‘도계(道溪)’라고도 기록하고 있다.
이 마을은 경주에서 7번 국도를 따라 울산방면으로 가다가 모화역에서 14번 국도를 따라 문산공단쪽으로 우회전하여 문산을 지나면 치술령 기슭에 자리한 마을이 석계다. 경주시청에서 27km, 32분 거리에 있다.
풍천임씨 집성촌
아랫돌기(하석)의 평지마을·중지마을·아릿마을·양지마을·고천이 석계1리, 웃돌기(상석)의 큰마을· 수서·시래·마대가 석계2리로 구획되어 있다.
석계는 총 364세대 808명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석계1리가 230세대 540명, 석계2리는 134세대 268명이다. 그 중 풍천임씨 52가구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이 마을은 주로 벼농사에 의존하고 있고, 그 외 특별한 작물은 없으며, 소 650두(1리 500, 2리 150)를 기르고 있다. 옛날부터 산세 좋고, 물 좋고, 농토 좋아 살기 좋은 마을로 알려졌던 석계는 최근 100여개의 크고 작은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아늑한 시골마을의 분위기는 사라지고, 공단으로 탈바꿈해 가고 있다.
이 마을 최고령자는 1리에 이수화(93·원말댁) 할머니와 2리에 정임구(96·매호댁) 할머니이다. 그 외에도 아흔 넘은 분들이 많아 장수마을이라고 한다.
석계1리 → ‘하석’ → ‘하돌기’ → ‘아랫돌기’
아랫돌기 석계의 아래쪽 마을을 통칭해서 ‘아랫돌기’, ‘하돌기’, ‘하석’이라고도 부른다. 현재 석계1리 지역이다.
평지마을 아랫돌기의 가운데 있는 마을이며 석계리의 중심마을이다. 평지에 이루어진 마을이라 ‘평지마을’ 혹은 ‘평리(平里)’라 불렀다고 한다. (120가구)
중지마을 평지마을과 양지마을의 중간에 있으므로 ‘가운데말’, ‘중리’, ‘중지말’이라 불렀다고 한다. (30가구)
아릿마을 석계에서 가장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라 ‘아릿말’, ‘아랫마을’ 혹은 ‘하리(下里)’라고 한다. (30가구)
양지마을 이 마을은 볕이 잘 드는 따뜻한 마을이라 ‘양지마을’, ‘양리(陽里)’라 부른다고 한다. 본래 대나무가 많은 마을이라 ‘대밭각단’이라 부르다가 석계의 큰 마을인 평지마을의 건너편에 있으므로 ‘건너마을’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20가구)
고천(古泉) 웃돌기 북쪽에 있는 마을로 오래된 샘이 있었다고 하여 ‘고천’이라 불렀다고 한다. (5가구)
동제 아랫돌기는 해마다 음력 정월 보름날에 동제를 지낸다.
당목 수령 300년 된 회나무(회화나무)로 1982년에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당집을 갖추고 있으며 그 옆에는 후계목으로 보이는 회나무 2그루가 나란히 서 있다.
석계못에 수몰된 ‘오만동’
웃돌기 석계의 위쪽 마을을 통칭해서 ‘웃돌기’, ‘상돌기’, ‘상석’이라고도 부른다. 현재 석계2리 지역이다.
큰마을 웃돌기의 중심마을로 ‘큰말’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옛날에 ‘동녘각단’이라고도 했다. 석계못 아래쪽에 있다. (64가구)
수서(水西) 석계못 아래에 위치한 마을로 큰 마을의 서쪽 거랑 건너에 있는 마을이라 ‘수서’라 불렀다고 한다. (19가구)
시래(時來) 웃돌기 큰마을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어떤 선비가 마을 뒤 산세를 보고 “큰 인물이 날 것”이라고 했는데 그 때를 기다린다는 의미로 ‘시래’라고 했다고 한다. 순흥안씨 집성촌이다. (9가구)
마대(馬垈) 옛날에 말을 많이 먹이던 마을로, 말의 무덤이 있다고 전한다. ‘말때’ 혹은 ‘마떼’라고도 부른다. 웃돌기 서북쪽 산기슭에 있는 이 마을에는 능으로 보이는 무덤이 있으며, 이 능이 말무덤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 일대에서 토기가 많이 나왔다고 한다. (4가구)
오만동 석계에 있는 다섯 개의 봉우리 가운데 그 다섯 번째 봉우리에 마을이 있어 ‘오만동’이라고 했다는 이 마을은 1964년 이곳에 석계못을 막으면서 수몰되고 없어졌다. 당시 17가구가 있었다.
동제 매년 음력 정월 보름에 동제를 지내다가 30년 전부터는 안 지낸다고 한다.
당목 이 마을 당나무는 포구나무(팽나무)와 느티나무가 밑둥치에서부터 붙은 연리목이다. 수령 300여년으로 추정되는 포구나무와 그 보다는 어린 느티나무가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모양은 참으로 신기하다. 그 중 포구나무는 1982년에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깊은 산중에 있는 ‘영모재’
영모재(永慕齋) 고천마을 북쪽 재공골에 있는 풍천임씨의 재실로 본래 있던 것은 6.25때 소실되었고, 지금 건물은 1957년에 다시 지었다. 마을에서 약 2km 떨어진 산골짜기에 있는 이 재실은 4칸, 2칸의 맞배지붕으로 가운데 1칸과 앞쪽에 마루, 동쪽에 방 1칸, 서쪽에 방 2칸을 배치했다. 현재 현판과 문짝이 모두 없는 상태이다.
추모재(追慕齋) 영월인 사윤공(士允公) 신석주(辛碩柱)를 추모해 그 후손들이 1959년 치술령 아래 고천에 세운 재실이다. 3칸, 2칸에 가운데와 전면에는 마루, 양쪽에는 방을 배치했다. 팔작지붕 형태이나 강판기와로 새롭게 단장했다. 수진당(守眞堂), 경신당(敬愼堂), 무본당(務本堂) 등의 현판과 수진당기가 나란히 걸려있다.
원모재(遠慕齋) 사정(司正)을 지낸 경주인 계암(溪庵) 이눌(李訥)을 추모하여 그 후손들이 석계 아랫마을에 세운 재사(齋舍)이다. 남향 5칸 맞배지붕으로 지은 이 재실은 가운데 2칸은 마루, 동쪽에 방 1칸, 서쪽에 방 2칸을 배치했다. 현재 현판만 남아있어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경모재 고촌에 있는 밀양박씨의 묘재 재실로 1988년에 세웠다. 콘크리트구조물의 현대식 건물로 마치 일반 가정집처럼 지었으며 현재 관리인이 생활공간으로 쓰고 있다.
양호정(養浩亭) 터 조선 철종 때 통정대부를 지낸 풍천인 임진재(任鎭宰)가 세운 정자의 터다. ‘고천정각터’라고도 하며 고천마을 재공골 어귀에 있다. 일제 때 없어진 것으로 알려진 이 정자는 당시 후학을 기르는 서당으로 사용됐다고 전한다.
돈수정 석계못안 점골입구에 있는 풍천임씨 돈수공 이양을 추모하여 그 후손들이 2005년에 세운 정자다. 본래 금오골에 있던 재실이 6.25때 소실된 것을 이곳에 다시 정자로 지었다고 한다. 정면3칸, 측면2칸의 2층 콘크리트구조물로 아래층은 기둥만 세워 누각형태로 지었다.
치술령에 ‘가마봉’
가마봉 치술령의 한 봉우리로 가마 모양으로 생긴 산으로, 마을 서쪽에 있다. 예전에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수리재만디 석계마을 뒷산으로 그 중 제일 높은 봉우리이다.
버무들뻔디기 고천 위, 현재 서라벌골프장 자리이다. 그 위에 범굴이 있었다.
능등고개 능이 있었다 전하는 고개로 윗돌기 마테에서 돌티미로 넘어가는 고개.
삼탯고개 석계에서 구어로 넘어가는 고개다. 옛날에 이곳에 살던 사람이 3쌍둥이를 낳았다는 전설이 있다.
사일고개 석계에서 제내리 사일로 넘어가는 고개다. 현재 서라벌골프장 입구.
아릿고개 상돌기에서 점골로 넘어가는 고개.
오뱃고개 큰 마을에서 오배로 넘어가는 고개.
원재 예전에 마을이 있었다고 하는 영골 남쪽의 들. 원지이들이라고도 한다.
금이 났다는 ‘금바우골’
고천골 아랫돌기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고천마을 안쪽 골짜기이다.
금바웃골 금바우가 있는 골짜기로, 괴매골 남쪽에 있다. 이곳에 옛날에 금광이 있었다고 한다.
노종골 갈미들 남쪽에 있는 들로, ‘노종(露宗)’이라고도 한다.
돌티미 돌이 많은 골짜기로, 중방고개 너머에 있다.
둔전(屯田)골 군인들이 농사짓던 둔전들 위에 있는 골짜기로, 하돌기 동북쪽에 있다.
뒷골 하돌기 뒤쪽에 있는 골짜기.
만암절 터 만암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전하는 골짜기로, 중방골 서쪽에 있다.
버무들골 범이 살았다고 하는 골짜기로 고천골 서쪽에 있다.
산밭골 점골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불선바우가 있는 곳이다.
어븐골 하돌기 서쪽에 있는 골짜기.
오구밧골 상돌기 서쪽에 있는 골짜기.
재충골 중지마을 서쪽에 있는 골짜기.
점골 중방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쇠부리가 있었다고 전한다.
중방골 돌트미 넘어가는 고개로 능등고개 너머에 있는 골짜기.
석이 나는 ‘석이바위’
굴앞바우 범굴바위를 굴앞바위라고 한다. 그 앞에 석문사가 들어섰다.
금바우 괴매골 입구 금바웃골에 있는 바위로 옛날에 금을 캤다고 전한다.
부처바우 모양이 부처처럼 생긴 바위로, 중방골 서남쪽에 있다.
불뱅이바위 고천입구에 있는 바위로 영검하므로 주민들이 불을 켜 놓고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불썬바우 불을 밝히고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하여, 마을사람들이 정성을 드리던 바위로, 점골 남쪽에 있다.
석이바우 석이(石耳)가 났다는 바위로, 점골 북쪽에 있다. 바위가 높아 줄을 타고 가야 딸 수 있다.
선돌 선돌배기에 있는 입석(立石)으로, 마을의 지형이 마치 떠다니는 배와 같은 모습이라 안정을 위해 배의 닻줄을 이 돌에 매기위해 인공으로 세운 돌이다.
칼치바우 모양이 칼치(갈치)처럼 생긴 바위로, 석이바우 서쪽에 있다.
쌀이 많이 난다는 두어미
가삼들 석계 남쪽에 있는 들.
갈미(乫味)들 아랫돌기 남쪽에 있는 들.
갓질 갓(산)아래에 있는 들로 평리마을 동남쪽에 있다.
괴매골 석계못 위에 있는 들.
굴앞 범굴의 앞쪽에 있는 들로, 아랫돌기 동쪽에 있다.
당그래미 평지마을 위에 있는 들.
두어미(斗於味) 아랫돌기 북쪽에 있는 들로 쌀이 많이 났다고 한다.
밀밭들 삼태못 위에 있는 밭인데. 지금은 논이 되어 있다.
사금달들 사근제(沙斤堤)라는 못이 있었던 들로, 아랫돌기 동북쪽에 있다. ‘사근제’라고도 한다.
새들 아랫돌기 앞에 새로 형성된 들이다.
선돌배기 선돌이 있는 논으로, 갈미들에 있다.
영골 상돌기 앞에 있는 들.
오배 큰마을 남쪽에 있는 들로 옆에 있는 산이 자라 등처럼 생겼다고 한다.
해밋들 갈미들 아래쪽에 있다.
약물탕 가삼들에 있는 떫은 약물이 나는 곳으로 특히 피부병에 좋다고 한다.
고치거랑 상돌기의 동쪽 고천에서 흘러내리는 거랑.
석계못 하돌기 서쪽에 있는 저수지로, ‘석계제(石溪堤)’라고도 한다. 1958년경에 시작해 1964년에 완공했다.
어븐골 못 어븐골에 있는 못.
매앞보 석계못에서 갈미, 가삼, 원지로 가는 제일 큰 보. 옛날부터 있던 보로 언제 만들었는지는 모른다.
질고지 원재 너머 노정골 밑에 있는 땅으로 물기가 많아 늘 질어서 붙인 이름으로 보인다.
좁은 14번국도 교통량 늘어 위험
석계는 동쪽에 동대봉산(봉서산), 서쪽에 치술령, 남쪽에 순금산, 천마산, 북쪽은 수리재가 둘러싸고 있는 산간마을이다. 수려한 산세와 맑은 물과 깨끗한 공기로 살기 좋은 장수마을이다. 그러나 최근 공장들이 많이 들어서고 차량통행이 많아지면서 환경이 많이 나빠지고 교통사고도 많다고 한다.
공단이 들어왔지만 도로가 제대로 설치되지 않고, 농로를 이용하고 있어 노폭도 좁고, 인도가 확보되지 않아 농민들의 농로이용이 대단히 위험하다. 특히 14번 국도의 경우 교통량이 많아지면서 사고도 잦다고 한다. 도로 확장이 이루어져야하고 우선 과속방지턱이라도 만들어 교통사고의 위험을 줄이는 등 대책이 요구된다.
그리고 광역상수도가 들어왔는데 오수관이 들어오지 않아 환경오염이 심각하다. 오수관 설치가 시급한 과제다.
석계2리 마을진입로도 현재 농로로 사용하고 있는데, 길도 좁고 버스진입이 안되고 마을 가운데로 통과해 사고 위험이 높다. 우회도로 개설이 추진되고 있고, 현재 설계가 나왔는데 빨리 시공하기를 바란다. 고천마을 진입로의 비포장 부분에 대한 포장도 빨리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신용범(74·전 모화초등학교 교장), 윤인호(69·전 외동읍장), 정병호(62·전 경상남도 소방본부장), 김영관(55·울산시청 사회복지과장), 박원동(52·육군 준장), 임관식(52·문화관광부), 안용락(48·육군대령), 박명숙(45·서울 변호사), 장태환(42·항공부문 명장), 변광수(36·포항공대 교수), 박종옥(31·행정자치부)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마을취재에 협조해 주신 석계1, 2리 이장, 노인회장과 임무혁(1리 전 이장)님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