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곡은 덕동댐으로 일부가 수몰된 마을로 96년 행정동 폐합으로 지금은 보덕동에 속해 있다.
보문단지에서 물레방아를 지나 왼쪽으로 난 2차선을 따라 2km정도 산길을 가면 이 마을에 이른다.
암곡은 깊은 골짜기 안에 위치한 마을이라 `어두운 골짜기`란 뜻으로 암곡(暗谷) 또는 암실이라 불린 것으로 보인다. 한 때(조선 중엽) 경주부군 박종우가 남치암 공을 방문했을 때 마을 이름이 좋지 않다고하여 명곡(明谷)이라 고쳐 부르기도 했으나 조선 중기 남해창 공(公)이 암(暗)을 쓰면 밝음이 온다하여 다시 암곡으로 불렀다고 전한다. 또한 마을 주민 노용이씨(82 암곡 604)에 따르면 "불벵이산 옆에 있어 등잔밑이 어둡다하여 암곡이라 했다."고도 한다.
이 마을은 원래 큰마을과 계정마을이 덕동댐에 수몰되고 지금은 와동, 왕산, 시랫골, 명실, 갓골 등의 자연부락과 수몰지구에서 이주하여 새로이 마을을 형성한 일명 새마을이라 하는 대성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을소개 (수몰지역)
지연(止淵) 이 마을에는 조선 정조 때 정언 남경희가 세운 정자 지연정(止淵亭)이 있었는데 층층바위가 병풍처럼 뒤에 둘러 있어 가히 절경이었으나 수몰후 와동에 옮겨 놓았다. 지연은 못이 여기서 그친다는 뜻으로 해석되는데 1970년 덕동댐을 막고보니 물이 여기까지 찼다고 한다. 후일 이 곳에 댐이 들어설 것을 미리 예견한 선대의 예지를 보는 것 같았다.
계정(溪亭) 계정이라는 정자가 있어 붙여진 이름.
큰말 대리(大里)라고도 했으며 암곡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다. 수몰후 이주하여 대성마을이라하며 암곡의 첫 마을로 새로 단장한 마을이다.
고선사터 신라 제31대 신문왕 때 원효대사가 머물렀다는 고선사는 통일 신라 초기의 대표적인 탑의 하나로 꼽히는 국보 제38호 고선사지 삼층석탑이 있었다. 75년 수몰로 경주박물관에 옮겨졌다.
마을소개
와동(瓦洞) 옛날 이 곳에 기와를 굽는 가마가 있었다고 기와굴, 와동, 잿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지금은 암곡의 중심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400년된 느티나무가 숲을 이루며 마을 어귀에 서 있으며 시 보호수로 지정되어있다.
왕산(王山, 旺山) 암곡 골짜기 깊숙히 위치한 마을로 옛날 왕이 전쟁을 피해 머물렀다는 왕산 밑에 있는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 王山이라 하다가 일제 때부터 旺山으로 불렸다고 전한다. 왕생이, 왕새이라고도 한다.
갓골 와동 서북쪽에 작은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지북이라고도 한다.
시랫골 덕동댐 동편에 있는 마을로 암곡의 남쪽에 위치한다. 시릿골이라고도 하며 지형이 시루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다른 이야기는 마을이 너무 빈곤하여 잘 살 때를 기다린다고 시래(時來), 시리(時里), 시리골이라 불렸다 한다.
명골(明谷) 시랫골 남쪽에 있는 작은 마을로 명실, 명곡, 대명곡, 큰명실이라고도 한다.
무장사(0藏寺)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아버지 김효양이 지은 절,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더 이상 전쟁 없고 태평성대를 희구하는 마음으로 무기와 투구 등을 여기에 묻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절은 그 뜻을 따라 무장사라 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그 터에 사적비의 귀부와 이수가 남아 있고, 주위에 깨어진 탑재들을 모아 복원한 삼층석탑이 보물 제126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암곡은 행정구역상 보덕동에 속하며 10통(통장 남곤진 52 암곡 678-7) 27가구 82명, 11통(통장 김문도 49 암곡 702) 69가구 205명, 12통(통장 조희복 45 암곡 429-1) 71가구 231명이며, 최고령자는 김남연할머니(95 암곡 370)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