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가 끝나면서 금관들은 각자의 소장처인 서울과 청주로 흩어졌다. 앞서 경주 지역사회에서는 ‘신라금관 경주존치 범국민운동연합’을 중심으로 출토지인 경주에 금관을 상설 전시해야 한다는 환지본처 요구가 일었으나, 소장 기관 이관과 순회 전시 일정이 예정대로 진행되면서 존치 운동은 사실상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이 같은 논의와 맞물려 회자되는 것은 정작 ‘진품’이 아닌 ‘복제품’의 가치를 둘러싼 이야기다. 경주신문 제289호, 1996년 8월 14일자에 실린 고(故) 최용주 신라문화동인회 회원의 기고문. 천마총에 전시된 금관 복제품을 만든 명장 고 김인태 선생의 삶을 다룬 이 글은, 원본 못지않게 정성과 혼을 쏟아 만든 재현품 역시 시간이 흐르면 그 자체로 하나의 문화유산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새삼 일깨운다.
기고문에 따르면 1976년 천마총을 복원해 일반에 공개하기로 하면서, 당시 문화재관리국은 국내 최고의 금관 제작자로 김인태 선생을 지목해 금제 유물 전체의 재현을 맡겼다. 김 선생은 열서너 살 때 금관총 금관을 처음 본 뒤로 마분지와 흙으로 금관 흉내를 내던 소년이었고, 스무 살 무렵에는 구리판에 금도금을 입히는 기술과 끊어진 전통 도금법인 ‘수은도말금법’까지 되살려낸 장인이었다. 그런 그에게 순금 7.5kg으로 진품과 똑같은 금관을 만드는 일은 “처절한 하나의 꿈”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글은 제작 과정의 디테일도 생생하게 전한다. 금판을 오려 망치로 두드려 두께를 맞추고, 금실을 꼬아 영락과 곱은옥을 매다는 손끝은 자주 떨렸다고 한다. 여섯 가닥 금실을 꼬아 만드는 띠드리개 작업은 ‘누구에게 물어봐도 알 수 없는’ 외로운 시간이었다. 완성된 재현품을 심사한 문화재 전문위원들조차 “어느 것이 진품이고 어느 것이 복제품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라며 혀를 내둘렀다는 대목은, 그의 기술이 단순 모방을 넘어선 독자적 경지였음을 보여준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제289호 1996년 8월 14일
최용주 <신라문화동인회 회원>
천마총 금관을 재현하던 고수
국립경주박물관에 학생들을 데리고 견학시키면서 고분관에 있는 금관 앞에서 자주 질문받는 말이 있다.
“저 금관 진짜입니까? 가짜입니까?”라고.
“지금 경주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는 금관은 모두 진품이다. 하나뿐인 옛 물건을 다른 곳에도 진열해야 될 경우가 있는데 그때는 똑같이 만들어야만 한다. 그럴 때는 가짜라고 하지 않고 복제품이라고 한다. 가짜란 실은 없으면서 겉만 그럴싸한 느낌이 드는 말이고, 모조품이란 창조성이 결여된 것으로 껍데기만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에, 옛 물건을 그대로 만드는 진지한 작업 과정을 재현한다고 하고 작업 결과 만들어진 물건을 ‘복제품’이라고 한다”고 설명한다.
이런 경우가 바로 천마총이다. 천마도 그림이 출토되기 전에 이 무덤은 155호분이라 불렸다.
1970년대 「경주종합개발계획」의 한 부분으로 황남동에 있는 큰 쌍둥이 무덤인 98호 고분(황남대총)을 발굴하여 내부를 공개할 목적으로, 옆에 있는 이 155호분을 예비적 조사사업 대상으로 발굴했다.
여기서 유물이 출토된 73년 7월부터 계획대로 98호분을 발굴하기 시작하였다. 98호분에서도 금관을 비롯한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으나 천마총보다 월등하거나 특이한 유물은 없었다. 그래서 본래의 계획을 수정하여 이 천마도가 나온 무덤을 공개하기로 한 것이다.
출토된 유물은 전부 박물관으로 옮겼다.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말다래에 그려진 천마도 그림이나 모자챙 같은 나무 제품은 보존 처리를 해야만 한다. 무덤 구조가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이기 때문에 피장자가 묻힌 나무널(목관)은 썩었으며, 역시 나무로 된 덧널이 쓴 바람에 위를 덮였던 돌덩이가 떨어진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그때 피장자에게 착장시켜 두었던 장신구들이 손상을 입었다. 우그러지고 찌그러진 금으로 된 관, 금허리띠, 귀고리, 띠드리개 등은 세심하게 정성 들여 처음 상태대로 복원하였다. 이렇게 손질한 진품들은 모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거나 전시되어 있다.
복원 공개한 무덤은 남쪽에 출입구를 만들고 가운데는 관람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동서로 반 자른 내부 모습을 볼 수 있게 쌓았는데 나무덧널은 본래 모습대로 복원하였고, 그 속의 껴묻거리 상자와 피장자의 복식은 발굴 당시 상태대로 재현시켜 놓았다.
또한 무덤 속에는 진열실을 만들어 특이하거나 중요한 유물의 복제품을 전시해 놓았다.
천마총 안의 모든 전시 유물은 1976년에 진품과 똑같이 만든 복제품인 것이다. 목제품, 토기류, 금제품 등을 그 분야 최고의 제작자에게 의뢰하여 재현한 복제품을 만들어 진열해 놓았다.
그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것이 금관 복제품이다. 순금 제품을 재현시킨 사람은 명장 삼선방(三仙房) 김인태(金仁太) 형이다.
그는 열서너 살 때 구박물관 금고에서 본 금관총 금관의 신비스러움에 매혹되어 마분지로 오려서 사슴뿔 장식을 만들어 보았고, 흙을 빚어 굽은 옥을 만들어 불에 구워 구리 철사로 매달아 보며 찬란한 신라 금관의 신비함을 체험하려 노력했다.
스무 살쯤 되어서는 마분지가 구리판으로 바뀌고, 다시 구리판 위에는 금도금을 입히는 기술을 익히고, 때로는 끊어진 도금 방법인 ‘수은도말금법’을 되살려 신라 금관을 재현시키려고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 후 그는 순금으로 신라 금관과 똑같은 크기, 똑같은 기법으로 만들어 보았으면 하고 소망했었다.
그러나 부인의 금반지 하나 장만하기도 힘든 어려운 처지에 순금 금관을 만들어 보고자 하는 바람은 차라리 처절한 하나의 꿈이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드디어 때가 왔다.
1976년 천마총을 복원 공개하기로 확정한 당국 문화재관리국에서 우리나라 최고의 금관 제작자로 김인태를 지목해 모든 금제품의 재현을 그에게 맡긴 것이다.
2관(7.5kg)이 넘는 금관을 싸서 둘둘 말아 들고 집에 들어온 그의 표정은 이제야 신라의 금관을 그대로 재현해 볼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신라문화를 사랑하는 우리 후배 몇몇과 허름한 그의 작업장에서 막걸리에 오징어, 명태무침 안주로 취하도록 마신 것이 엊그제 같다.
금판에 본을 떠서 가위로 자르고 망치로 두들겨 두께를 조절하고, 금실을 꼬아 영락이라는 달개와 파르스름한 굽은 옥을 금테에, 출자 모양 장식판에 매어 달 때는 자그마한 손가락이 떨리기도 했다.
띠드리개를 만들 때는 누구에게 물어봐도 알 수 없는 꼬기, 여섯 가닥의 금실을 꼬아 줄을 만들어야 하는 외로운 긴 시간이 있기도 했다.
금관, 금관모, 금제 새 날개 모양 관장식, 금제 나비 모양 관식, 금제 허리띠와 거기에 매달린 띠드리개 등을 완성하여 서울에 가져가 문화재 전문위원들에게 심사를 받았다.
만드는 과정을 여러 번 와서 점검한 바 있는 그들이었지만 “잘 만들었소. 너무나 잘 만들었소. 어느 것이 진품이고 어느 것이 복제품인지 구분을 할 수가 없을 정도이니, 앞으로는 꼭 같은 것을 더는 만들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혼을 쏟아부어 만든 모든 것을 놓아두고 나온 그는 눈물이 핑 돌았다.
그 후 그 작품은 가까운 천마총 진열실에서 다시 대할 수 있었지만, 3년 전 그는 갔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저세상으로….
그러나 그가 만든 금판은 금의 생명이 영원하듯이 언제까지고 남아 있을 것이다.
29년 전 쓰인 이 글은 단순한 추억담을 넘어선다. 지역 문화계에서는 “1976년에 만들어진 김인태 선생의 재현품도 이제 반세기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며 “당대 최고 기술과 정성이 응축된 이 복제품들 역시 언젠가는 그 자체로 근현대 공예사의 유산으로 재평가받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원본 유물이 출토지 보존이라는 가치를 지닌다면, 그것을 온전히 되살려낸 장인의 손길 또한 별도의 문화적 가치를 지닌다는 취지다. 실제로 문화재 전문위원들조차 진품과 구별하지 못할 정도였다는 일화는, 재현품이 단순한 모조가 아니라 그 자체로 완결된 공예 작품임을 뒷받침한다.
이 같은 장인의 맥은 아들 김진배 씨로 이어지고 있다. 김 씨는 지난해 APEC 정상회의 기간 이재명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선물한 ‘천마총 금관’ 복제품을 직접 제작한 인물이다. 40여 년간 금속문화유산 복제 외길을 걸어온 그는 도금한 동판을 일일이 잘라 머리띠와 ‘출(出)’자 모양 장식을 만들고, 달개 장식 380여 개와 곱은옥 58개를 손수 제작하며 매일 10시간 이상 작업에 매달린 것으로 전해졌다. 경주 하동민속공예촌에서 ‘삼성방’을 운영해온 김 씨는 이번 작업에 아들 준연 씨와 함께 힘을 보탰다.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진 반세기 남짓의 재현 작업은, 진품의 소재지를 둘러싼 논쟁과는 별개로 “복제품도 시간이 흐르면 그 시대의 기술과 정신을 담은 또 하나의 유산이 된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운다. 경주존치 요구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사실상 일단락된 지금, 정작 그 금관을 지켜내고 되살려 온 장인들의 손끝에도 눈길을 돌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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