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면 한 가지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 바로 미국 사람들이 잔디밭에 물주는 모습이다. 미국에 다녀온 사람들이 하나같이 신기하게 느꼈다고 말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잔디밭에 물주는 모습이다. 잔디밭에 물주는 것이 무엇이 그리 신기하겠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 사람들 일하는 모습을 보면 융통성이 없고, 때로는 미련해 보이기까지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를 포함해 여러 사람이 기억하는 것은 한여름 소나기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정해진 시간이 되면 스프링클러를 작동시켜 물을 준다는 것이다.
맑은 날 잔디밭에 물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폭우가 쏟아져도 물주는 시간에는 어김없이 물을 준다. 언뜻 보기에는 어리석고 쓸데없이 물을 낭비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정해진 원칙에 따라 일한다’라는 태도가 자리 잡고 있다. 우리의 사고방식과는 상당히 달라 보인다.
내가 그동안 겪어 본 우리나라 직장 상사 중에도 원칙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그분들은 한결같이 ‘곧이곧대로 한다’ 혹은 ‘소털을 뽑았으면 반드시 그 자리에 다시 꽂아야 한다’라는 식의 소신이 있었다. 이처럼 까칠하거나 깐깐한 분들을 상사로 만나면 아랫사람들이 피곤하고 힘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 주변에서는 큰 문제가 발생하거나 사고가 나는 일이 드물다는 장점도 있다.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 때로는 융통성이 없어 보일지라도, 조직 전체로 보면 오히려 예측 가능성과 안정성을 높여 주는 것이다.
올 6월 전국 지방자치단체장을 뽑는 선거가 있었다. 당시 여러 지역 선거구에서 투표용지가 부족해 유권자들이 오랜 시간 기다리거나 투표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일부 유권자들이 투표함 반출을 막는 등 항의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투표용지는 유권자 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적정한 여유분까지 확보해 두어야 한다. 그런데 과거 통계를 참고해 투표율을 예상하고 투표용지를 부족하게 인쇄했다면, 그것은 원칙보다는 효율성과 예산 절감을 지나치게 앞세운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예산을 아끼려다 더 큰 사회적 비용을 치르는 것은 ‘소탐대실(小貪大失)’이 아닐 수 없다.
미국 사람들이 폭우 속에서도 정해진 시간에 잔디밭에 물을 주는 것처럼, 선거관리 업무에서도 정해진 원칙과 절차를 지켰다면 이런 혼란은 애당초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얼마 되지 않는 예산을 절감하려다가 국민에게 큰 불편을 끼치고 기관의 신뢰와 명예까지 훼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특히 선거처럼 국민의 권리와 직결되는 업무를 담당하는 기관이라면 어느 기관보다도 공신력 있고 빈틈없이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는 인상을 국민에게 준다면 실망이 클 수밖에 없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라는 속담처럼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이와 비슷한 사례가 적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 국민이 경제적으로는 과거보다 훨씬 풍요롭게 살고 있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이 우리 사회를 완전한 선진국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유 가운데 하나도 바로 이런 데 있지 않을까. 선진국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국민소득이 높아지고 건물이 높아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맡은 일을 정해진 원칙과 절차에 따라 성실하게 수행하고,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기본을 지키는 사회가 되는 것이 진정한 선진국으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미국 사람들이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서도 잔디밭에 물을 준다고 해서 그들을 미련하다고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 모습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정해진 원칙에 따라 수행하는 태도를 배울 필요가 있다.
때로는 융통성이 필요하다. 그러나 모든 일의 융통성만을 앞세우다 보면 반드시 지켜야 할 기본과 원칙까지 흔들릴 수 있다. 폭우 속에서도 잔디밭에 물을 주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물을 주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여지려는 그들의 태도일 것이다.



홈
오피니언
칼럼
경주논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