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악동 서악서원을 지나 고분군을 따라 선도산(仙桃山) 정상부에 이르면 그곳에 성모사(聖母祠)가 있다. 성모사는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의 어머니이신 선도성모정영(仙桃聖母精靈)을 모신 사당으로, 신라 때 건립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선도산은 부의 서쪽 7리에 있다. 신라 때에는 서악(西嶽)이라 불렀고, 혹은 서술(西述)ㆍ서형(西兄)ㆍ서연(西鳶)이라 하였다. 성모사 옆에는 마애여래삼존불이 있고, 성모사에서 동쪽으로 200여미터 가면 성모사 유허비(遺墟碑)가 있다.
변한(卞韓)이 통솔했던 내륙의 13국과 해상 10국 가운데 사로국(斯盧國)이 바로 신라의 옛 호칭이고, 신라를 신로(新盧)라고도 호칭하였으니, 혁거세 이전에 벌써 군장(君長:부족의 우두머리)이 있었다. 『삼국사기』에 “진한(辰韓) 사람들은 박[瓠]을 박(朴)이라고 하는데, 그 큰 알[卵]이 마치 박처럼 생겼었기에 박(朴)을 성(姓)으로 삼았다”하였는데, 바로 포(胞)를 깨어 태어난 아이를 동천(東川)에서 목욕시키니 온몸에 광채가 나고, 가까이 있던 새와 짐승들이 신인(神人)의 탄생을 축복하여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는 서야벌(徐耶伐) 신라의 시조왕 박혁거세이다.
『삼국사기』와 『여지승람』 등에서 ‘성모사’를 언급하는데, 성모(聖母)는 본래 중국 황실의 여자로, 이름이 파소(婆蘇)이다. 일찍이 신선이 되는 술법을 배웠는데, 해동에 와서 머무르며 오래도록 돌아가지 않고, 마침내 신(神)이 되었다. 전설에 혁거세는 곧 성모가 낳은 이라 하고, 『동경잡기』에는 중국 황실의 여자 이름이 ‘사소(娑蘇)’로 기록된다.
미수(眉叟) 이인로(李仁老,1152~1220)는 시중(侍中) 김부식(金富軾,1075~1151)이 송나라에 조회하러 가서 우신관(佑神館)에 들렀을 때 어느 당(堂)에 설치해 놓은 여신상(女神像)을 구경하였는데, 관반(館伴) 왕보(王黼,1079~1126)가 ‘이는 귀국(貴國)의 신인데, 그대들은 그를 아는가?’라고 묻자, 김부식이 ‘옛날 제실(帝室)의 여자가 남편도 없이 잉태(孕胎)하여 남에게 의심을 받게 되자, 곧 바다를 건너 진한(辰韓)에 와서 낳은 아들이 곧 해동의 첫 왕[始王]이 되었다가, 뒤에 천선(天仙)이 되었다. 제실의 여자는 지선(地仙)이 되어 오래도록 선도산에 있게 되었는데, 이것이 곧 그 상(像)이다.’라고 하였다.
중국 사람이 지은 찬(讚)에, “선도성모가 어진 이를 잉태하여 나라를 창건하였다”라고 성모가 혁거세를 낳았다고 전한다. 그리고 『삼국유사』에 진평왕 때 영주의 안흥사(安興寺) 여승 지혜(智惠)가 불전(佛殿)을 수리하는데, 꿈에서 선도산의 성모가 나타나 “내 자리 밑에서 금 열 근을 꺼내 쓰라”는 계시를 받고, 황금 160냥을 얻어 무사히 불전 수리를 마친 「선도성모수희불사(仙桃聖母隨喜佛事)」 전설이 있다.
약산(藥山) 오광운(吳光運,1689~1745),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1705~1777) 등이 「성모사」를 지었지만, 성모의 실존 여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신재(信齋) 이영익(李令翊,1738~1780)은 『동국악부』「성모사」에서 “중국 사람이 선도성모가 어진 이를 낳아 나라를 창건했다고 기록하지만, 동방은 이 시기에 문물이 열리지 못하였으니, 실로 허황된 일이 많다. 어찌 중국 한나라 제실의 여인이 있단 말인가? 이는 속이는 흔적이 있고, 또 중국 서책의 이치에 조금도 보이지 않으니, 이는 거짓됨이 심하다 할 것이다”라고, 중국의 성모 연관설을 거짓이라 평한다.
광주노씨 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1855~1931)은 김해군 생림면(生林面) 금곡리(金谷里) 출신으로, 성재(性齋) 허전(許傳,1797~1886)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창녕 추원재(追遠齋)·극기재(克己齋)·금산서당(錦山書堂) 그리고 밀양 자암초려(紫巖草廬) 등에서 강학하며, 경남 산청과 함안의 학풍을 주도하였다. 게다가 1919년 3월 파리장서 서명에 참여한 독립운동가로 유명하다. 그는 「선도산 성모사 중수기」를 지었고, 이 사당은 비단 박씨만을 존숭해 받드는 곳이 아니라, 나라의 사람이 마땅히 더불어 존경해야 할 공간이라 주장하였다.
선도산 성모사 중수기(重修記)-소눌 노상직
신라 옛 도읍에 숭덕전(崇德殿)이 있는데, 숭덕전에서 그곳을 바라보면 서쪽에 우뚝한 진산(鎭山)이 선도산이다. 고을의 부인과 어린아이가 종종 양산(楊山:남산)의 오색구름과 용마가 절하며 울고, 동천에서 목욕시킨 등의 형상을 얘기하는데, 자세하기가 어제를 보는 듯 성모의 자취가 이미 오래되었으나 더욱 새롭다.
선도의 정상에 오래된 사당이 있는데 순조 임진년(1832)에 후손 참봉 박규동(朴圭東)이 거듭 새로 지었으나, 지금은 비바람에 훼손되었다. 전 침랑 박기문(朴基汶)의 9세조 박언수(朴彥秀)가 임진왜란을 당해 전패(殿牌)를 받들어 선도산에 옮겨 모셨는데, 성모와 성자의 혼령이 마치 서로 어려운 상황에 감응하였고, 7일간 먹구름에도 여전히 남은 빛이 있었다. 성모사의 보수는 우리의 임무이니 이에 혼자 수고롭도다. 이때 재랑(齋郞:참봉) 박찬배(朴瓚培)가 종인 박태진(朴泰鎭)에게 책을 보여주며 “문헌록이 마침내 완성되었고, 사당 역시 공효를 거두었으니, 어찌 과정 기록의 글을 받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대개 박태진 군이 바야흐로 나[노상직]와 머물며, 나에게 사당공사의 전말을 기록하고자 하였기에, 나는 사양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