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읍성은 동쪽에 향일문(向日門), 서쪽에 망미문(望美門), 남쪽에 징례문(徵禮門), 북쪽에 공진문(拱辰門) 성문이 있고, 성 안에 각각의 기능을 맡은 건축물이 가득하였지만, 일제강점기에 광폭(狂暴)한 총독의 사사로운 행보에 1912년 경주읍성과 많은 건축물이 훼손되거나 철거되었다하니 참으로 한스럽다.
경주읍성 내에 빈현루(賓賢樓)는 객관 동쪽에 있고, 예전의 군기청(軍器廳) 자리이다. 금학헌(琴鶴軒)은 관아 동쪽에 있고, 금학헌 동쪽에 광풍루(光風樓)가 있으며, 금학헌 남쪽에 제승정(制勝亭)이 있으며, 지금의 일승정(一勝亭)이다. 남문의 고도남루(古都南樓) 그리고 진남루(鎭南樓), 의풍루(倚風樓)는 객관 서쪽에 있고, 의풍루의 남쪽에 함벽루(涵碧樓)가 있다. 양무당(養武堂:장관 집무소)은 관아 북쪽에 있고, 옆에 주진당(主鎭堂:병마절제사 집무소) 등이 있다. 『동경잡기』에 의하면, 무학당(武學堂)은 관아 서문 밖에 있었다고 하지만, 1798년 「경주읍내전도」에는 읍내 동쪽을 가리킨다. 즉 시대의 변화에 건물의 위치와 명칭이 바뀌었기에 경주읍성 내 건축물 배치를 고증하기에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1711년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다녀온 돈와(遯窩) 임수간(任守幹,1665~1721)은 『동사일기(東槎日記)』 기행록을 남겼는데, “신묘년(1711) 5월 30일. 모량역에서 점심을 먹었다. 자인(慈仁) 수령이 나와 대기하다가 보러 왔다. 종일 비를 무릅쓰고 갔는데 경주 앞 내가 불어 다리가 거의 끊어질 뻔했으나, 간신히 물을 건넜다. 경주에서 묵으며 부윤 남지훈(南至薰,1653~?)을 만났는데, 영외(嶺外)에서 서로 보니 마냥 반가웠다. 하양의 김극겸(金克謙)이 나와 대기하다가 보러 왔다. 피폐한 고을에 백성도 적어서, 대접하는 음식도 거의 형식을 갖추지 못하였으며, 하졸(下卒)들 태반이 음식을 먹지 못하였다”라고, 당시 통신사 임수간은 하양을 통해 서울로 가는 길에 경주부를 지나며 남지훈을 만났다. 이후에 「동경망월루기(東京望月樓記)」를 지어 경주읍성 관청의 문[府治之門] 위에 망월루 누각의 존재를 기록하였다.
의령남씨 남지훈은 부친 남훤(南翧,1609~1656)과 모친 안동권씨 권현(權俔)의 따님 사이에서 7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1709년 7월부터 1711년 8월까지 경주부윤을 지냈고, 부임하고 얼마 뒤 정사가 간편해지고 백성이 서로 화합하였다. 사적인 여가가 많았기에, 관청의 문을 새롭게 하였고, 위에 층루를 설치하였는데, 누각은 세 칸으로 크고 아름다우며 활짝 트였다. 온 고을에서 모습이 바뀌었고, 장인을 부림에 비록 큰 비용이 들었지만, 부역은 백성에게 미치지 않았으니 매우 훌륭한 정사였다.
『동경잡기』는 전하는 『동경지』를 1669년 부윤 민주면(閔周冕) 등이 명칭을 바꿔 간행하였고, 1711년 부윤 남지훈이 증보해 간행하였으며, 1845년 부윤 성원묵(成原默)이 다시 중간한 것이다. 임수간이 부윤 남지훈을 만났지만, 『동사일기』에 망월루를 기록하지 않은 점이 아쉽다. 부윤은 망월루에서 공무의 여가에 피로를 풀고자 망월대에 올라 고도의 달빛을 즐겼고, 통신사의 전별식을 거행하기도 하였다. 망월루가 위치한 곳은 아마도 관청의 문 어느 성문이 아닐까 추측하며, 달빛이 유달리 밝게 빛나는 곳일 것이라 생각한다.
동경 망월루기 - 돈와 임수간
예로부터 이야기하는 자들이 고을 행정의 수불(脩不)과 누각의 흥폐(興癈)가 연관이 있다고 여겼고, 어떤 사람이 이 말에 대하여 책망하기를 “고을을 위함이 맞다. 누관(樓觀)은 숭상하고 꾸밈이니, 귀신으로 하여금 그것을 하게 하면 신을 수고롭게 하는 것이요,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을 하게 하면 또한 백성을 수고롭게 하는 것이다. 다만 결점을 보고도 오히려 어찌 자랑하는가?”라고 말하니, 대답하길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만 무릇 군수의 직임을 받아 백성을 괴롭히는 경우가 많습니다.”라고 하였다. … 해당 관청이 비록 황폐하고 퇴락해져도 구차히 보수하고, 다만 힘이 미치길 기다렸다가 돌아가니, 어찌 힘써 재목을 나르길 기다려 누관의 승경을 경영하겠는가? 그러므로 이는 군읍에서 누각에 거하길 좋아하는 자이고, 악착스러운 아전이 할 바가 아니다.
남지훈(자 熏叔) 공이 승정원의 측근 신하로 이곳 동경에 부윤이 되었는데, 동경은 신라 도읍의 유허지이다. 산하는 넓고, 땅은 비옥하며, … 첨성대와 월성은 서리(黍離:기장)와 덩굴 속에 매몰된 듯 관청은 낮고 비좁았다. 일찍이 높은 대와 넓은 정자는 옛 도읍의 제도가 조금도 남아있지 않으니, 사람들 모두 그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누관의 흥폐가 그 정사에 관계한 것이다. 누각이 완성되자 마침내 ‘망월’이라 이름을 걸었다.
내가 “부의 남쪽에 예로부터 반월성이 있는데, 대대로 제사지낸다고 하니 아득한 옛일이다. 호화로움이 이미 다하고 자취를 어루만지며 옛날을 생각하니 개연히 소침(消沈)한 느낌이 드는데, 이에 편액한 것입니까?”라고 그 연유를 물으니, 공은 “이는 진실로 그러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이 땅은 동쪽 모퉁이의 절반이고, 바다와 삼십 리 거리에 해와 달이 뜨는데 문득 먼저 떠오르고, 누의 높은 곳은 달이 비춤이 가장 많다. 때문에 이 누의 편액을 망월로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 왕의 심부름 길에 기한이 있기에 함부로 머물지 못하고, 남 부윤과 망월대 난간에 기대어 달을 기다릴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