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향교는 유생의 수학장 그리고 선현을 모시는 제례 장소로 경주의 큰 자랑이다. 성균관 입성을 위해 지역의 선비들이 과거공부에 매진한 흔적이 역력한 향교에는 유교(儒敎)의 향기가 진동한다. 학업에 지친 젊은 유생들이 소나무 가득한 뒤뜰에서 휴양하였을 것을 생각하면 “옛날에는 자기 자신을 위해 배웠지만, 오늘날은 남을 위해 한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라는 자신의 본질을 밝히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이 떠오른다. 경주향교는 신라 신문왕 2년에 국학(國學)이 설치되었던 곳으로,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해 배향하고, 지방의 교육과 교화를 담담하였으며, 고려 때 국학에서 향학(鄕學)으로 개편되었다. 조선조 1492년에 부윤 최응현(崔應賢,1428~1507)이 성균관 제도에 준하여 중수하였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대성전을 1600년에 부윤 이시발(李時發,1569~1626)이 전사청과 함께 중건하였다. 1614년에 부윤 이안눌(李安訥,1571~1637)이 명륜당과 제독청, 동무·서무를 중건하였고, 대성전에는 5성(五聖:공자·안자·증자·자사·맹자), 송조2현(宋朝二賢:정호·주희), 해동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1655년에 명륜당 북편에 석축으로 송단(松檀)을 조성하였는데, 1856년까지 소나무 18그루가 있었다고 전한다. 이는 18현을 상징하며, 1601년에 제독관 오한(聱漢) 손기양(孫起陽,1559~1617)이 경주향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여가에 남산에서 소나무를 캐다가 향교 외삼문 밖과 명륜당 뒤뜰에 심었다. 신라 때 공문십철(孔門十哲)과 72제자 그리고 18현 신위는 고려 때 최지원·설총·안유, 조선에 들어와 대성전에 15현인을 추가 종사하였으며, 전국 유림대회를 통해 배향의 신위를 다음과 같이 결의해 왔다. ◆서배향 - 설총·안유·김굉필·조광조·이황·이이·김장생·김집·송준길 ◆동배향 - 최치원·정몽주·정여창·이언적·김인후·성혼·조헌·송시열·박세채 공자의 사당인 궐리(闕里)의 행단(杏亶)이 언제 말라 죽었는지 모르지만, 행단의 이름은 오래도록 전해져 지금에 이르기까지 어제처럼 밝다. 이처럼 나무가 이름을 얻어 후대가 이를 알아간다면 이 또한 의미 있는 일이고, 송단을 만든 의미일 것이다. 마치 이 소나무가 무성하면 유학도 융성할 것이고, 소나무가 죽으면 유학 역시 쇠퇴하리라는 믿음처럼. 1873년에 쌍취(雙翠) 이만운(李晩運)이 부를 다스릴 때 대성전과 명륜당을 중수한 노고에 송공비(頌功碑)가 세워졌고, 경주향교의 장의를 역임한 여강이씨 희암(希庵) 이우상(李瑀祥,1801~1877)은 「향교중수기」에서 “마침 조정의 명이 때맞춰 내려져 옛날 희공(僖公)이 반궁(泮宮)을 수리하던 뜻을 깊이 얻어서, 위에서 명하고 아래에서 행하여 안팎으로 서로 도왔다. 날을 논의해 공사를 시작하여 세금을 적게 거두어 자금을 마련하고 노는 손을 빌리니 힘들이지 않고도 일을 이룰 수가 있었다. 성묘(聖廟)와 명륜당이 차례로 새로워져 중당(中唐:사당마당)의 바닥벽돌과 바깥 담장의 벽돌담에 이르기까지 질서정연하지 않음이 없었다”라고 하였다. 1841년 한문건(韓文健)이 상량문을, 1873년 이우상, 1885년 최세학(崔世鶴), 1880년 손상규(孫相奎), 1889년 조의현(趙儀顯), 1919년 최현필(崔鉉弼), 1982년 류석우(柳奭佑) 등이 경주향교 기문을 지었다. 송단기(松壇記) - 쌍봉(雙峯) 정극후(鄭克後,1577~1658) 불행히도 임진년의 변고에 흔적도 없이 불타 재만 남아 무성한 풀밭이 된지 8년에 만력(萬曆) 경자년(1600)에 이시발이 이곳에 부윤으로 부임하였다. 마침내 옛 터에 성묘(聖廟)를 새로 지었고, 또 소학의 가르침으로 여러 유생을 이끌었다. 15년이 지나 갑인년(1614)에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 공이 부윤으로 와서 성묘 뒤에 이륜당(彜倫堂)을 건립하였으니 또한 옛 제도 그대로였다. 수개월 사이에 크고 아름다워졌고, 문옹(文翁)이 끼친 풍속으로 크게 바뀌었으며, 전후 두 재상께서 도학을 흥기하는 공이 이에 크게 되었다. 공사를 마쳤으나 아직 년월을 기록하여 후대에 전하지 못한 것을 사람들은 간혹 이에 서운한 생각이 들었다. 나아가 식물은 사람이 다 같이 보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학궁의 곁에 옛날에는 송백(松柏)의 나무가 없었고, 지난번 중수해 지은 성묘에는 있었다. 다음해 신축년 봄에 밀성 손기양이 이곳에서 가르침을 청하였고, 여러 유생을 이끌고 남산에서 소나무를 취해서 앞문의 앞과 뒷담장의 뒤편에 몇 그루의 뿌리를 옮겨 심었다. 지금으로 50여년에 아름드리나무가 되어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다만 나무가 담장 뒤에서 있어서 사람들이 날마다 세한(歲寒)을 대하는 모습을 알지 못하니 아쉽다. 을미년(1655) 4월 상한에 후학 오천 정극후 삼가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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