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필자는 해마다 석가탄신일이 되면 가족들과 집에서 가까운 분황사(芬皇寺)를 찾았다. 너른 들판의 황룡사 문화재 발굴지를 지나 좌측으로 분황사를 들어서면 3층의 웅장한 석탑(石塔)이 반기고, 탑을 돌아 팔각 우물의 맑고 청량한 물을 마시며 부처님께 합장 기도를 올린다.
선덕여왕 3년(634)에 건립된 분황사는 보광전(普光殿)의 금동약사여래입상, 원효의 화쟁국사비, 승려 혜강(慧江), 솔거(率居)의 천수대비관음보살벽화 등 유구한 역사를 품은 천년고찰로, 어른이 되어서야 비로소 사찰의 진면모를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다.
분황사 석탑은 전탑(塼塔:구운 벽돌로 쌓은 탑)을 모방한 모전석탑(模塼石塔:돌을 벽돌 형태로 가공하여 쌓은 탑)의 특이한 양식을 갖는다. 몽고 침략과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되었다가 시절의 때를 만나 중창과 중수를 거쳤는데, 보광전 역시 1680년에 중수되었다. 훼손된 석탑은 1915년 일본인에 의해 3층으로 재복원되면서 원형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1845년에 증보·간행된 『동경잡기』 화주(火珠)에 관한 글에, “분황사 9층 탑은 신라삼보(新羅三寶)의 하나로, 임진왜란 때 왜적이 그 절반을 훼손하였다. 뒤에 어리석은 중이 개축(改築)하려다가 또 그 반을 훼손하고서 구슬 하나를 얻었는데, 모양은 바둑돌 같고 빛은 수정(水精) 같았으며, 들어서 비추면 그 바깥까지 꿰뚫어 볼 수가 있다. 태양이 비추는 곳에서 솜을 가까이 대면 불이 일어나 그 솜을 태운다. 지금은 백률사에 보관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분황사 모전석탑의 원형이 몇 층이었는지에 대해 지금도 의견이 분분하다.
1857년에 지어진 수종재(守宗齋) 송달수(宋達洙,1808~1858)의 남유일기(南遊日記)에서 “경주부의 동쪽 5리쯤에 분황사가 있다. 분황사에는 탑이 있는데, 돌을 방형으로 쌓아서 매우 기이하며, 신라 때 삼보의 하나이다. 무릇 9층이고, 왜란에 허물어져 지금은 2층 남짓 남아있다(府東五里許 有芬皇寺 寺有塔 以石方築甚奇 羅代三寶之一也 凡九層而見毁於倭亂 今存者二層餘). 절 앞 들판 가운데 양쪽으로 나열된 주춧돌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궁궐의 옛터로 정남향이고 단정함에 주안을 두었다. 대개 동경의 형세는 광대하면서도 평평하며, 산천은 밝고 수려하여 우리 동쪽에서 천년 왕조의 기틀에 필적하기가 드물었으며, 진실로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다. 아쉬운 점은 바닷가 한 모퉁이에 치우친 것이다. 동쪽에서 서쪽에 이르기까지 냇물과 도로가 화살처럼 곧아, 10리 길을 가도 굴곡이 없는데, 우리나라에 다만 이 길만 그렇다고 하였다”라고 허물어져 2층 남짓 남은 석탑을 설명한다.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1836~1905)은 송달수의 종조카로 1891년 3월 1일부터 4월 14일까지 총 43일간 봉화·태백산·청량산·안동·경주·동래 등을 유람하고, 「유교남기(遊嶠南記)」를 남겼다. 그 역시 송달수의 글을 가감 없이 그대로 인용하였다.
『동경잡기』는 1845년 경주부윤 성원묵(成原默)에 의해 증보·간행되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1857년에 송달수 그리고 1891년 송병선 등이 분황사 석탑을 9층으로 기록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즉 『동경잡기』와 송달수·송병선 등의 글에 의하면 분황사 석탑을 신라삼보로 언급한다. 통상적으로 호국(護國)을 상징하는 세 가지 보물 삼보는 황룡사 장륙상(皇龍寺丈六像)·천사옥대(天賜玉帶)·황룡사 구층탑을 말하지만, 황룡사 9층 목탑은 고려 고종 25년(1238) 10월 11일에 불이 났고, 분명히 석탑이라고 하였기에, 황룡사 9층과 분황사의 9층을 혼동하기는 어렵다. 신라삼보는 고려가 건국된 뒤에도 한동안은 존재했지만, 고려와 거란전쟁, 고려와 몽고전쟁 등을 거치면서 대부분 소실되어 그 존재를 확인하기에 어려움이 있고, 신라삼보의 9층 탑에 대해서 살펴볼 여지가 충분하다고 본다.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1420~1488)은 「경주십이영(慶州十二詠)」의 분황폐사(芬皇廢寺)에서, “분황사는 황룡사와 마주하고, 천년 옛터에 풀만 절로 무성하네. 우뚝한 백탑(白塔)은 나그네를 부르는 듯, 드문드문 청산(靑山)은 사람을 시름케 하네”라고 폐허된 분황사 그리고 우뚝한 백탑을 언급한다. 아마도 가공한 벽돌을 겹겹이 쌓아서 만들고, 사이사이에 백회(白灰)를 발랐기 때문에 분황사 석탑을 ‘백탑’이라 불렀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쉽게도 19세기 중엽에 와서야 분황사 석탑을 9층으로 기록하였으니, 신빙성이 결여될까 걱정이지만, 지금도 우뚝이 남아 황룡사의 아픔과 분황사의 슬픔을 모두 겪은 모전석탑만이 자신의 원형을 오롯이 기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