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                                   이재무   그늘을 편애하는 달 우람한 그늘의 등이나 어깨에 기대 혹은 그늘을 홑이불로 끌어다 덮고 누워 생을 다녀간 이들에게 나는 슬픔이었을까 기쁨이었을까 과연 그늘이었을까 왜 항상 그들은 그이고 나는 나였을까 시서늘한 그늘 서너 바가지 푹 퍼서 등에 끼얹으며 이 생각 저 생각에 그늘 깊어지는, 한 해 가운데 정서의 키가 가장 웃자라는 달   떠난 사람의 ’그늘’ 아래 자신을 되비쳐 보다   유월, 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한 해의 중간, 호국 보훈 같은 것도 생각나겠지만 뜨거운 햇살과 함께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는 달이라는 말이 가장 피부에 체감될 법하다. 요즘같이 더위가 지속되는 날은 그늘을 찾는 이들이 많다. 아파트마다 나뭇 그늘 아래 노인들이 부채를 부치고 앉아 있는 장면을 자주 보는 계절이 되었다. 시인도 “그늘을 편애하는 달”이라는 말로 첫구를 시작한다. ‘그늘’은 ‘어둠’과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대체로 어둠이 캄캄함, 유폐, 혹은 고통이라는 속성과 관련된다면, 그늘 역시 이런 속성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밝음이 스며들 여지를 언제나 가지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김현승 같은 시인은 오월 그늘의 밝은 속성을 “밝음에 옷을 입”(「오월의 환희」)힌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유월의 그늘은 훨씬 더 깊고 서늘하지 않겠는가. 이 시에서 ‘그늘’은 양가성 이상의 입체적인 의미의 상징을 가진다. 아닌 게 아니라 시인은 2행부터 나무 그늘 같은 눈에 보이는 그늘 대신, 자신의 주변 혹은 가까이서 “생을 다녀간 이들”이 베풀기도 하고 겪기도 했던 그늘, 혹은 자신의 그늘에 대해 쓰고 있다. 시인은 아마 문인이었을 주변 어른들의 “우람한 그늘의 등이나 어깨에 기대” 자주 배려받고, 자주 고단한 육체와 영혼을 쉬기도 했을 것이다. 그분들의 등이나 어깨가 거느린 그늘이 시인의 글쓰기와 생에 얼마나 많은 자산이 되었을지는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반면에 가난과 고난과 쓸쓸함이라는 “그늘을 홑이불로 끌어다 덮고 누워”, 글 쓰는 사람이라는 자부심 하나로 살다가신 분들이 드리운 그늘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시인은 막 스쳐가는 그분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더 간절해지는 그 그늘의 깊이를 헤아린다. 이제 질문은 자신에게로 향한다. 그분들에게, “나는 슬픔이었을까/기쁨이었을까” 과연 나는 그분들에게도 선한 그늘의 삶을 살았을까? 자신의 존재를 되짚어보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 자신에 대한 회오의 소용돌이가 막 올라온다. “왜 항상 그들은 그이고 나는 나였을까.” 나는 왜 그런 배려에 젖어들지도 못하고, 고난을 헤쳐온 이들에 깊이 동감하지 못하고 이기적인 자아로만 살아온 것인가. 시인은 의도적으로 ‘좀 으스스할 정도로 차고 서늘한’(시서늘한) “그늘 서너 바가지 푹 퍼서 등에 끼얹”은 각성의 자세로, “이 생각 저 생각에” 지난 삶을 돌아보며 성찰의 ‘그늘’을 깊게 몰고 가본다. 그러는 사이 마음에 여러 가지 감정이 활발하게 일어난다. 이는 “그늘을 편애하는 달”과 수미상관으로 쓰인 “한 해 가운데 정서의 키가/가장 웃자라는 달”이라는 결미를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시인은 해마다 한 해의 중간인 유월의 시간이 베푸는 그늘에 앉아서, 자신의 삶에 그늘을 드리우고 간 이들의 삶을 떠올리며 성찰의 자세를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아메리카 원주민인 체로키족은 유월을 ‘말없이 거미를 바라보게 되는 달’이라 했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유월은 어떤 달인가? 시인은 그것을 우리에게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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