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
김덕남
초침을 갉아먹는 오밤중 쥐 한 마리
손가락 침을 발라 콧등을 톡톡 친다
쥐뿔도 중뿔도 없이 뻣뻣해진 종아리
미지에 닿으려나 검색창 두드린다
문장을 다듬는 손 모니터에 눈을 꽂고
꽃문 앞 오체투지로 마우스를 당긴다
클릭도 스크롤도 밤을 깔고 누웠다
어둠 타고 찾아오는 내 몸은 적산가옥
까만 눈 살살 굴리며 나를 갉아 먹는다
자신의 몸을 갉아 먹는 글쓰기의 고통과 책무
밤새도록 컴퓨터 자판, 그 막막한 허공 앞에 앉아서 감각의 촉수를 드리우며 창작을 하는 시인의 고통이 그려진 시다.
‘쥐’라는 제목은 둥근 모양의 몸통과 한쪽에서 시작되는 꼬리 같이 생긴 줄이 있는 생김새가 쥐를 연상시켜 붙여진 마우스라는 이름에서 가져왔다.
보들레르는 글을 쓰기 위해 빌린 친구의 집에서 한 자도 쓰지 못하고 골몰하다가, 멀리서 집으로 돌아오는 친구의 마차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할 때야 화들짝 첫 문장에 불이 붙었다고 한다. 이런 경우가 어디 보들레르뿐이랴.
“초침을 갉아먹는 오밤중 쥐 한 마리”를 보는 시인도 마감 시간을 앞두고 깊은 밤까지 잠을 못 이루고 촉박한 원고를 쓰고 있는 중이었으리라. “손가락 침을 발라 콧등을 톡톡” 치는 행위자는 마우스이면서 이리저리 골몰하는 시인의 표정이기도 하다. 그래도 유난히 눈에 띄는 문장이나 구절은 생겨나지 않으니(“쥐뿔도 중뿔도 없이 뻣뻣해진 종아리”) 글쓰기의 진척은 더디기만 하다.
시인은 이제 미지의 무슨 기발한 단어가 없나, 어떻게 하면 세계가 확장될까를 고민하며 검색창을 두드리고, 모니터에 시선이 꽂힌 채로 행간을 이리저리 당기고 밀어 문장을 다듬는다. 마침내 ‘꽃문’, 미문(美文)이라고 여겨지는 구절을 향해 낮은 자세로 “마우스를 당기며 득의의 미소를 지었으리라. 하지만 그뿐.
그러나 조금 후에 보면 그 문장도 시들해진다. 밤새도록 쓰고 또 고쳐도 창작에 더 이상의 진척은 없다. “클릭도 스크롤도 밤을 깔고 누”워 뒹군다. 하지만 결구에 이르러 비유와 시상 전개가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작품은 새롭게 도약을 한다. 한밤, 어느새 적산가옥이 되어버린 내 몸을, 쥐(마우스)가 “까만 눈 살살 굴리며” 갉아먹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마침내 이 작품은 육체의 소멸과 해체를 감행하는 시쓰기 과정으로 내닫는 것이다.
시 쓰기 과정이 고스란히 들어 있는 이 작품을 우리는 ‘시에 대한 시’, ‘메타시’라 부른다. 한 편의 작품을 쓰기 위해 작가들은 자신의 몸을 저당잡히며 얼마나 많은 불면의 밤을 보내야 하며, 오늘도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는가.
시인은 「내 혈액형은 나비야」라는 작품에서 “점프든 스핀이든 내 몸은 회오리야/대롱 끝 더듬이로 그리움에 불을 켜다/빙판에 몰아치는 해일, 그 끝에서 춤을 추지”라고 쓴다. 그렇다. “난바다 물살” 같고 “빙판” 같은 현실에서 고통과 투신 없이 새로운 세계는 열리지 않는다. 그럴수록 “포르릉 고요를 깔고 발끝에 힘을 주”어, 때로는 온몸이 대롱으로 말리는 회오리와 스스로를 해일로 몰아넣으면서, 나날의 성장과 재탄생을 기꺼이 감행해야 한다. 그것이 작가의 책무가 아닌가. 김덕남의 두 편의 시를 읽으면서 떠올려보는 화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