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을 안고 사는 여자
김덕남
몽울진 왼 가슴에 메스날 지나갔다
봉긋한 바른쪽도 통째로 도려내어
정답던 가슴과 가슴 이별 없이 보냈다
젖 돌던 찌릿함이 궁벽에 닿았는가
휑하니 바람 일어 털려버린 곳간 속
생쥐가 쏠고 있는지 환상통을 앓는다
다시는 뼈저릴 일 넘어질 일 없을 거라
텅 빈 달을 안고 갈비뼈에 찍은 낙관
은입사 무늬로 새긴 몸의 내력 읽는다
우주를 품고 있는 여성의 몸
양쪽 가슴을 도려낸 불모의 여성을 그려낸 아픈 시를 읽는다. 상황과 맥락의 전개에 미학적 완결성이 있고, 수일한 문장을 갖추고 있으며, 한 군데도 풀어진 부분이 없다. 각 수 초·중·종장의 연결이 자연스러움은 물론, 각 수 사이의 여백도 웅숭깊다.
첫수에는 애이불비(哀而不悲)의 태도가 드러난다. 빠른 속도감을 보이는 초장 “몽울진 왼 가슴에 메스날 지나갔다”와 이어진 바른쪽 가슴을 도려낸 중장을 거치면서 “정답던 가슴과 가슴 이별 없이 보냈다”로 먹먹한 슬픔을 짐짓 차분한 어조로 서술한다. 여기에는 숨겨진 진실이 있다. 왼 가슴에 메스날이 지나간 후, 일정한 시차를 두고 “봉긋한 바른쪽도 통째로 도려”졌으니 서로가 잘 가라는 별사 한마디 변변히 하지 못하고 헤어졌다는 것이다.
둘째 수에서는 생명의 젖줄이 끊긴 가슴이 돌연 “털려버린 곳간” 이미지로 발상의 전환이 일어난다. 가슴은 먹는 식량(젖)을 간직하던 창고이니, 빈 가슴은 곳간이 털려버린 꼴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비유와 공간의 확장을 통한 상황 만들기 능력이 그에겐 있다, 더욱 놀라운 건, 종장에서 보이는 ‘생쥐’가 곳간인 가슴을 물어뜯는(“쏠고 있는”) 환상통으로 잇는 전개 능력이다. 가히 이 시의 감각의 파동점이라 할 만하다. 절단되었음에도 있는 것처럼 그 가슴은 여전히 걷잡을 수 없는 통증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둘째 수가 비유의 이동과 상황 만들기라면, 셋째 수는 시의 미학적 심화에 기여한다. 바른쪽 가슴을 절단하면서 불균형에서 오는 넘어짐이 없어졌다고 애써 자위하는 초장, 텅 비어 버린 가슴 MRI 검사로 갈비뼈만 덩그러니 남은 양상을 “갈비뼈에 찍은 낙관”으로 잡은 중장을 거쳐, 가슴 부분의 수술 자국 실밥 흔적을 금속 표면에 은사(銀絲)로 장식한 “은입사 무늬”라는 도자기 이미지로 잡아내는 세밀묘사 능력은 시의 밀도를 한층 두텁게 한다. 셋째 수 종장 역시 감각의 파동점이라 할 수 있다.
이 시는 그리하여 ‘도려낸 가슴 → 털린 곳간 → 환상통 → 갈비뼈 낙관 → 은입사’로 이미지가 이동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김덕남의 시는 어디서 어떤 이미지가 나올지 예측할 수 없는 감각을 가졌다. 그것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발상의 전환과 사물의 이면을 더듬는 감각의 촉수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것이 시인의 자산이다. 그래도 남는 여운이 있다. 제목에 나타난 ‘달’이다.
그것은 “텅 빈 달”이라는 불모의 가슴에 대한 비유로만 한정되지 않는다. 굳이 종교학자 멀치아 엘리아데의 이론을 빌지 않더라도 그것은 여성의 몸에 우주적 원리를 적용한 몸과 우주의 ‘통 이해’에 가깝다. 시인이 시의 안팎에 저며 넣는 이런 사유에 기대어 여성의 몸은 그 자체로 우주를 담고 있다고 시인은 감각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