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투리                                           박목월   우리 고장에서는 오빠를 오라베라 했다 그 무뚝뚝하고 왁살스러운 악센트로 오오라베 부르면 나는 앞이 칵 막히도록 좋았다 나는 머루처럼 투명한 밤하늘을 사랑했다 그리고 오디가 새까만 뽕나무를 사랑했다 혹은 울타리 섶에 피는 이슬마꽃 같은 것을…… 그런 것은 나무나 하늘이나 꽃이라기보다 내 고장의 그 사투리라 싶었다 참말로 경상도 사투리에는 약간 풀냄새가 난다 약간 이슬냄새가 난다 그리고 입안에 마르는 황토흙 타는 냄새가 난다   고향 나무, 고향 하늘, 고향 꽃 자체인 사투리   ‘오라베’는 어려서부터 가장 많이 듣고 자란 말이다. 여동생은 물론이고 동창회에서 만난 여자 후배가 왁살스럽고 드센 억양으로 ‘오라베’라는 말을 했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그 때 내 마음이 얼마나 따뜻하고 편안한지 안 겪어 본 사람들은 잘 모른다. 무뚝뚝하지만 “오오라베” 부르는 그들의 말투엔 경상도 사람의 색이 묻어 있고, 경상도 사람 특유의 정이 들어 있다. 그러니 그 색과 정의 깊이를 아는 시인의 마음도 “앞이 칵 막히도록 좋”을 수밖에 없없을 것이다. ‘오라베’뿐인가? 나는 아직도 누이를 ‘누부’라고 부른다. 고향 집에 들어서자마자 “누부야 잘 있었나?” 하는 말에 내 아들과 딸도 ‘고모’고 부르지 않고 ‘누부야’라고 함께 부르며 함박 웃음을 터트리곤 한다. 생전에 어머니는 객지의 결혼식에서 몇 살이라도 많은 고향 여인을 만나면 꼭 ‘누부’라고 부르라 하셨다. ‘누나’ 대신에 간신히 터져나오는 “누부야!” 소리를 들은 이들은 한결같이 환한 웃음을 짓곤 했다. 왜 그랬을까? 사투리가 바로 고향의 인정이요, 풍물 나아가 생물 그 자체라는 것을 몸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머루처럼 투명한 밤하늘”, “오디가 새까만 뽕나무”, 울타리 섶을 타고 올라가는 “이슬마꽃”을 사랑했다고 하는데, 그건 “나무나 하늘이나 꽃이라기보다/내 고장의 그 사투리”라 여기고 있다. 청각은 시각과 후각으로 바로 이어지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경상도 사투리는 “풀냄새” 같은 수수한, “이슬냄새” 같은 맑은, 흙길이나 토방의 “황토흙 타는 냄새” 같은 들큰한 맛을 풍긴다. “아베요 알지러요” 하는 「만술아비의 축문」이 그렇고, “아우 보래이”로 시작하는「기계 장날」이라는 시가 그렇다. 목월의 사투리 섞인 시를 읽으며 우리는 고향의 정겨움에 휩싸이며, 고향의 냄새를 맡는다. 그의 사투리 시는 우리를 고향으로 데리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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