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
남길순
꽃나무는 탈춤을 추는 사자 같고
아기는
오늘 두돌을 맞았다
어디에 이렇게 많은 말을 숨기고 있었는지
쉴 새 없이 말을 쏟아낸다
마당으로 내려선 아기는 꽃을 가리키며 꽃나무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흙마당에 그림을 그리며 놀던
옛 아이들이 와서
뽁뽁이 신발 뒤를 쫓아다니는 것 같다
지붕 위에 누가 앉아 있기라도 한 듯
십년 넘은 개가
공중을 보고 짖는다
수년째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마을
오랜만에 사람 사는 집 같다고
수런거리며 빈 유모차를 밀고 가는 늙은 여자들
꽃나무 담벼락을 돌아
사라져간다
천천히 풀어야 할 수수께끼처럼
꽃시를 읽는 마음의 빛과 그늘
이렇게 아름답고 애련한 꽃시가 있었는가 싶다. 시는 서경에 잔잔한 서사가 결합된 구조로 진행된다. 서사의 중심은 “오늘 두돌을 맞”은 아기다. “쉴 새 없이 말을 쏟아”내는 그 아기가 풍경을 온통 꿈틀거리게 하며, 특유의 여백과 파문을 이리저리로 펼치며 여러 풍경들을 불러내고 있다. 놀라운 묘사력이다.
첫연은 단독으로 읽어도 무방하겠지만, 4연, “꽃을 가리키며 꽃나무 속으로 빨려 들어간” 아이의 풍경이 만들어낸 동적인 모습으로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겠다. 아이가 꽃나무 속으로 들어가니, “꽃나무는 탈춤을 추는 사자 같”이 신이 나서 덩실덩실 꿈틀거린다. 인간과 자연사물이 하나로 융합되어 나타나는 특이하고도 유쾌한 정경의 묘사다.
이어 말을 숨기고 있던 아이가 터져나오는 말들을 쉴 새 없이 쏟아내는 장면은 놀라와라, 옛시절의 시간 “흙마당에 그림을 그리며 놀던/옛 아이들”을 소환하여 두돌을 맞은 아이의 뒤를 쫓아다니는 환상을 부른다. “십 년 넘은 개”라는 유정한 존재도 “지붕 위”의 존재를 감지한 듯 공중을 보고 짖으며, 비가시적인 생명의 찬란한 잔치에 기꺼이 참여한다. 현재와 과거, 생과 사가 아기가 불러내는 ‘환(幻)’ 속에 깃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는 7연부터 “수년째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마을”이라는 오늘의 농촌 현실로 돌아온다. “빈 유모차를 밀고 가는 늙은 여자들”은 “뽁뽁이 신발 뒤를 쫓아다니는” 아이들 풍경과 얼마나 다른가. 그 늙은 여자들이 “꽃나무 담벼락”을 돌아나가자, 시대의 문제의식이 돋아나는 것이다. 시인은 그것을 “천천히 풀어야 할” 이 시대의 “수수께끼”로 보고 있다.
이 시는 담벼락을 기점으로 환(幻)과 현실이 분기되는 장치를 해놓았다. 환(幻)이 불러내는 과거의 정경이 아릅답고도 묘하지만, 시인은 미래의 을씨년스런 풍경, 아이가 사라진 농촌의 현실을 말하고 싶었으리라. 이는 시인이 시 제목을 살구꽃이라 하지 않고, 살구라고 한 데서도 드러난다. 살구는 씨, 후손을 염두에 둔 시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