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대와 서라벌대의 통합 추진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학교법인 원석학원 산하 경주대와 서라벌대는 지난 18일 경주시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11일 교과부에 두 대학의 통폐합 승인 신청서를 제출했다고 밝혔다. 이들 대학은 정부의 교육정책과 시대와 사회의 요구에 부응해 구조조정을 통한 교육 혁신의 필요성을 인식해 통합에 합의했다고 한다. 2023년 통합대학의 신입생 모집을 목표로 하고 있다. 원석학원은 그동안 이해관계자들 간의 갈등으로 인해 대학은 존폐위기에 내몰렸다. 원석학원이 지난 2017년 교육부 종합감사로 2018년 기존 이사들이 모두 해임되고, 임시이사가 선임돼 운영됐었다. 그러나 지난 2018년 해임됐던 이사들이 교육부를 상대로 ‘정이사해임취소’ 소송을 제기했으며, 법원은 2018년 12월 교육부가 정이사를 해임할 사유가 없다고 판결했다. 이로 인해 선임된 임시이사를 취소하라는 소송까지 이어졌고, 1심은 원석학원이 패소했다. 반면 2심은 원석학원의 손을 들어줬고, 최종심인 대법원 판결에서도 결국 승소했다. 그러는 동안 경주대의 재학생 수는 줄어들었고, 교직원들은 급여를 받지 못해 소송으로 대응하는 등 난관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제라도 두 대학의 통합을 위해 뜻을 모은 점에 대해서는 지역사회를 위해서라도 환영할 만한 일이다. 원석학원 설립자와 양 대학 총장대행은 기자회견에서 “경주대와 서라벌대를 통폐합해 기업과 경주시, 시민과 함께 전진하는 일류 대학을 만들겠다”며 지역사회에 대학 통폐합에 대한 신뢰와 지원을 당부했다. 그리고 원석학원이 통폐합을 의결하고 통폐합 추진위가 구성돼 추진 중에 있으며, 지역 사회에 기여하는 대학으로 거듭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현 상황에서 원석학원 설립자와 이사장 간의 관계, 경주대 교직원 노조의 입장 등 내부 갈등이 감지되고는 있지만, 두 대학의 통합에는 임직원들의 뼈를 깎는 노력이 따라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경주대와 서라벌대는 빠른 시일 내 통합을 이뤄내고 사회와 기업이 꼭 필요로 하는 인재 양성에 매진해야 한다. 대학교육의 정상화와 함께 교육의 질적 향상을 통해 대학이 생존하고,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방향도 찾아야 한다. 두 대학은 통합과 갈등 해결에 앞장서야 하고, 지역사회도 더 이상 외면하지 말고 지대한 관심과 참여가 필요한 때다.
민주당 내 강경파들이 주도하는 소위 ‘검수완박’이 숨을 가쁘게 들이쉬며 진행 중이다. 이달 15일 그 법안을 제출했고, 4월 임시국회에서 통과시킨 뒤 새 정부가 들어서기 전에 전격적으로 법률로 확정시킨다는 계획이다. 그런데 주도자의 한 사람인 황운하 의원이 법안발의를 촉구하며 동료의원들에게 급히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검찰 수사권을 폐지한다고 해서 검찰의 6대 범죄 수사권이 경찰로 가는 게 아니라 그냥 증발한다”라며, 검찰수사를 아예 없애겠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드러내었다. 그것은 곧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하여 이 정부의 고위공직자들이 저지른 부패범죄의 혐의를 완전히 덮어버리겠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온 힘을 다하여 추진해온 소위 ‘검찰개혁’은 결코 잘못된 사법과정을 바로잡아 억울한 피해자가 생기는 것을 줄이려는, 혹은 검찰권의 독재를 막고 민주적 통제하에 두겠다는 선한 목적과 의도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이 정부하에서 저지른 위법행위에 대한 검찰수사를 막겠다는, 그래서 20년이건 30년이건 장기집권을 하겠다는 날것의 욕망을 실현하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그들은 자신들의 이 비열한 욕망을 감추어왔다. 황 의원의 말은 바로 그 욕망에 감추어진 진실을 노정하였다. 대담한 커밍아웃이다. 황 의원의 이 고백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며 뜬금없이 우크라이나 정부 내에 있는 파시스트를 제거하여 우크라이나에서 파시즘을 완전 몰아내겠다고 하는 프로파간다(propaganda)를 내걸었다. 이와 똑같이 보면 된다. 민주당이 지금까지 내건 검찰독재의 방지나 검찰권의 민주적 통제의 회복 같은 것은 러시아의 프로파간다와 같다. 그리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실효적으로 통치하겠다는 야심은 바로 민주당 인사들의 부패행위에 대한 검찰수사를 막겠다는 야심이다. 이 정권에서 이루어진 권력에 의한 부패행위를 수사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것은 우리 헌법의 원리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이는 곧 ‘헌법질서의 유린’이자 ‘헌법의 파괴’이다. 이를 방지하고자 우리 헌법은 여러 제도적 장치를 두고 있으나, 현재 민주당 측이 국회에서 압도적 다수를 점함으로써 대단히 어려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무너지는 헌법을 일으켜 세우는 ‘헌법의 수호자’는 궁극적으로 국민이고, 지금의 현실에서 반헌법적, 반민주적 민주당 강경파의 의도를 분쇄해야 하는 가장 큰 책무를 걸머지고 그에 맞서 권한을 행사해야 하는 것은 윤석열 대통령이다. 그는 어쩌면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대통령과 같은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헌법의 수호’를 둘러싼 이 전투의 결과를 낙관한다. 즉 민주당 강경파들의 ‘검수완박’을 통한 헌법의 파괴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그 근거로서, 첫째 우리의 국운이 아직 다하지 않았고 오히려 상승기에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둘째 윤 당선인은 일찍이 찾아보기 힘든 강력한 카리스마를 갖춘 대중정치인으로 성장하였으며, 그의 확고하고 올바른 헌법관이 이 전투의 과정에서 그와 국민을 꿋꿋이 버텨줄 것이라고 본다. 셋째 민주당 내에도 냉정하게 국익을 챙기고 국민의 의사를 따르려는 의원들이 다수 있다. 그리고 ‘검수완박’에 생명을 걸다시피하며 돌진하는 황운하, 최강욱 의원 등에게 한 마디 조언을 하고 싶다. 문명국에서는 어느 나라건 ‘회피(recuse)’제도를 둔다. 법안의 심사나 수사, 재판과정 등 공적 결정과정에서 이해관계를 가진 국회의원, 판사 혹은 검사, 수사경찰관 혹은 배심원 등은 거기에 참여하지 않고 물러나는 제도이다. 이것은 ‘법의 기본원리’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법문상의 명시규정이 없는 경우에도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인류의 오랜 지혜가 만들어낸 고귀한 원리이다. 우리는 재판의 과정에서 판사에 관하여서나 국회 상임위 배분에서 혹은 고위공직자 주식 백지신탁 등에서 이를 실현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명문규정이 없는 많은 경우에 회피제도의 원리를 배제해서는 안 된다. ‘검수완박’ 돌진에 앞장서고 있는 민주당 강경파 의원들은 대체로 현재 수사나 재판에 걸려있다. 그들로서는 지금이라도 검찰의 수사를 완전히 배제할 수 있다면, 최소한 재판의 시기를 연기시키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많은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은 ‘검수완박’의 법안심사 과정에서 회피제도의 원리에 따라 배제되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그들이 공직자로서 최소한의 양식을 갖고 있다면, 사적 이해관계 혹은 사익의 존재를 인정하며 스스로 법안심사, 표결에서 물러나야 한다.
디아스포라(그리스어: διασπορά[*])는 ‘흩뿌리거나 퍼트리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특정 민족이 자의적이든지 타의적이든지 기존에 살던 땅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한자어로는 파종(播種) 또는 이산(離散)이라고도 한다. 디아스포라란 본토를 떠나 항구적으로 나라 밖에 자리 잡은 집단에만 쓴다. 경주역 앞 북정로나 성건동은 외국인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밤의 시내 거리는 어둡고 외국인들이 몰려 있어서 성인 남자도 혼자 걷기 두렵다. 과거 신라백화점 자리는 상당히 규모가 큰 다이소가 들어 왔지만 외국인들이 더 많다. 무언가 이질감이 들고 지역사회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인류에 대한 보편적인 존중이란 차원에서 매우 비뚤어진 생각이다. 그들이 사는 거리나 관광객이 넘치는 황리단길은 똑같이 중요하다. 젊은 관광객들이 찾는 황리단길은 활력이 있지만 주중에 그들이 떠나면 활력을 잃는다. 경주 시가지 상가는 공실이 너무 많다. 천정부지로 솟는 황리단길은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나기 직전이고 시내와 성동시장은 문 닫은 점포가 너무 많다. 구도심에는 노인들만 살고 젊은 사람들은 황성동과 용강 쪽에 살아 구 시내와는 교류가 없다. 경주역이 사라져서 도심이 더 빨리 공동화 되어 가고 있다. 구 시내는 노인들만 살고 있고 110년 이상의 전통 있는 계림초등학교는 시골분교 수준으로 작아져 도심은 도시재생 같은 특별한 조치를 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경주만 겪는 일인 것 같지만 우리나라 대부분의 중소도시가 겪고 있는 일이다. 많은 중소도시가 위기의 시간을 걷고 있다. 코로나 이후 더 심해지고 있다. 일부 인기 있는 관광지를 제외하고는 활력을 잃어간다. 그런 반면 많은 도시가 노화하는 도시는 내버려 둔 채 개발자본과 지역정치가 결합하며 여기저기에 신도시를 만드는 바람에 구 도심은 더 활력을 잃어간다. 어떻게 하면 도시에 활력을 일으킬 수 있을까? 생각보다 간단할 수 있다. 현재 경주에 살고 있는 사람만이 아니라 살고 싶은 도시를 만들고 사람들이 찾아오게 만들면 된다. 외국인들도 쉽게 정주하면서 그들의 삶의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열린 도시를 만들면 된다. 남해는 외국에 나가 있는 한국인들의 노후를 남해로 데려와서 독일마을을 만들었다. 경주에도 일본인 마을이 있고 고려인 마을이 있다. 경주에도 차이나타운, 베트남거리, 태국거리를 아예 관광지화 하면 어떨까? 필자는 해외로 출장 갈 때는 현지에 정착한 한인 마을이나 식당을 찾아간다. 아무리 바빠도 현지의 한식을 먹는 것을 룰처럼 가지고 있다. 외국에 정착한 현지 한식당에 가면 지친 출장이나 여행에서 발견하는 오아시스처럼 편안함을 느낀다. LA에서 먹는 김치찌개와 스톡홀름이나 타슈켄트, 홍콩, 푼타아레나스, 말라보에서 먹는 김치찌개가 같은 듯 맛이 다르다. 한국을 떠나 전 세계 각국의 거리에서 정착해 그 나라의 재료로 만들어낸 한식은 같지만 다르다. 그 맛을 보는 한국에서 온 여행자의 입맛은 행복하다. 입장을 바꿔보자 외국관광객들이 엔데믹 이후에 경주에 오더라도 자국 거리를 만나거나 자국의 음식점을 만난다면 좀 더 편안함을 느끼고 더 잘 찾아 올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더 많은 경제 활성화를 이룰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경주의 물품과 식재료가 더해진 그들 나라의 국가 음식을 경주에서 먹으면 경주여행의 또 다른 특색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경주라는 좁은 도심에서 전 세계를 만날 수 있으면 황리단과 또 다른 매력으로 경주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외국인들이 정착할 수 있는 도시라면 내국인들은 더 쉽게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경주는 열린 도시가 되고 세계 속의 도시가 되면서 전 세계인들이 찾고 싶어 하는 도시가 되면 디아스포라가 꽃을 피는 멋진 도시가 되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도 인종과 피부색, 후진국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깔보거나 무서워 하는 섣부른 선입견을 버리고 그들 모두가 똑 같은 우리 국민이고 이웃이라는 생각을 명확히 가지자. 그래야 디아스포라들이 경주에 즐겨 안착할 수 있을 것이다.
경주시 강동면 호명리에 가면 호계(虎溪) 이을규(李乙奎,1508~1546) 선생을 모신 북산서사(北山書社)가 있는데, 이는 예전에 호계 선생이 학문을 익히고 강론하던 호계정사(虎溪精舍)로 불렸다.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것을 문중과 유림의 논의로 1932년 봄에 중건하였으며, 진보이씨 효암(曉庵) 이중철(李中轍,1848~1937)의 호계정사중건기(虎溪精舍重建記)가 전한다. 「연보」를 보면, 이을규는 부친 이한주(李漢柱)․모친 창녕조씨 조계량(曺繼亮)의 따님 사이에서 경주부 남교서중리(南校西中里) 집에서 태어났다. 6세에 부친상을 당하였고, 7세부터 소학․중용․논어 등 경서를 배웠다. 17세에 용궁전씨 전회옥(全懷玉,1477~1540)의 따님인 창녕조씨 망기당(忘機堂) 조한보(曺漢輔)의 외손녀를 부인으로 맞이하였고, 21세에 모친상을 당하였으며, 신묘년(1531) 24세에 진사에 합격하였다. 임진년(1532) 25세에 호명리로 이거하였고, 지명을 본따 ‘호계정사’라 하였다. 옥산과 호계의 거리는 10리로 종종 회재선생을 찾아 질문하였고, 이때 독락당이 완성되었다. 26세에 도덕산 정혜사에서 독서하였다. 30세에 경산현령 제수, 31세 초계군수, 34세에 북경을 다녀와 이듬해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와 두문불출하며 학문을 닦았다. 인조반정 이후 산릉(山陵)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39세에 옥산 계정에서 회재선생을 뵙고 도를 논하고 학문을 배웠으나, 안타깝게도 병으로 죽었다. 부의 동쪽 북군 화개산에 장사지냈다. 회재 이언적(李彦迪,1491~1553)과 같은 시대와 공간에 살면서 계정을 오가며 도의를 맺고, 배움을 이어간 호계 이을규는 회재와 특별한 인연을 수록한 한시 작품이 전한다. 『회재집』 권2에 「서울로 가는 진사 이을규를 전송하다(送李進士乙奎向洛)」시를 보면, 1535년 3월 성균관으로 들어가기 위해 상경하는 28세 나이의 이을규에게 회재가 당부의 말을 시로 지었고, 9월에 별시에 급제하였다. 『호계실기』에는 「晦齋先生贈別韻二首」로 수록되었고, 훗날 북산서사를 지으면서 지경묘(持敬廟), 포요당(抱瑤堂), 동재 심득재(心得齋), 서재 의중재(義重齋), 공심문(共尋門) 등 모두 회재의 증별시에서 글자를 취해서 편액하였다. •호계정사 중건기 - 효암 이중철 옥산과 거리가 10리쯤에 호계(虎溪) 이을규(李乙奎,1508~1546) 선생이 학문을 닦은 호명촌(虎鳴村)이 있는데, 골짝의 이름으로 직접 명하였고, 바야흐로 선생이 마을을 택해서 은거하였다. 풍경이 아름다운 옛 도읍에 그 처소가 없음을 근심하지 않으나, 반드시 이곳을 장수(藏修)처로 삼은 것은 오로지 집안과 가까워서였다. 가깝기 때문에 그 교화(敎化)가 오래가고, 오래 되었기 때문에 두루 나아가고 물러나는 여가에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낀 것 가운데 실로 사람이 알아주지 못함이 있었지만, 오직 문원공 회재선생만이 그것을 알았다. 그 재덕(才德)의 빼어남을 받아들이고는 “온아하고 무리에서 재주가 뛰어난 그대를 사랑하네(愛君溫雅才超衆)” 또 그 도의(道義)의 꼭 들어맞음을 말하고는 “알아주는 이 드물어 홀로 옥으로 꾸민 거문고를 타네(獨抱瑤琴相識少)” 또 그 공부(工夫)의 진취함을 추천하고는 “충성과 공경으로 자신을 지켜가야 한다(忠敬相須好自持)”라 말하였으니, 무릇 회재선생의 한 말씀을 천하의 보물보다 중하게 여겼고, 다른 논변을 기다리지 않고 그 조예의 깊이를 다시 생각해본다. 이로써 어려서 청환(淸宦)과 현직(顯職)에 발탁되어 거듭 고을의 치적을 칭송받았고, 세 번이나 중국사신에 뽑혔다. 지우(知遇)의 융성함은 장차 그 재주를 펼쳤으나, 옛 동산이 그립고 앞 시내의 풍월에 마음이 끌려 마침내 의연하게 이 산야 한 칸의 초야로 돌아가 도를 구하고 닦는 뜻이 더욱 매우 절실하였다. 계정에서 돌아오는 높고 낮은 강주변이 어찌 지팡이 짚고 거닌 곳이 아닌 것이 없고, 풀 한포기 나무 하나에도 어찌 훌륭함이 미치지 않은 것이 없겠는가? … 선조의 업이 타락할까 크게 두렵고, 옛 자취의 빈터를 차마 오래 버려두지 못하여 이에 임신년(1932) 봄에 4칸의 집을 완성하였다. 앞 기둥과 나는 듯 용마루, 채색된 서까래로 아침저녁 아름다움 경치가 들어오고, 따뜻한 방과 시원한 집 모두 겨울과 여름 공부하기에 좋다. 후손 이종윤(李鍾胤)․이집만(李集晩) 여러 사람이 족인 이진영(李晉榮)과 이준영(李峻榮)을 보내 나에게 현판의 글을 부탁하며 “우리 집안의 문헌이 여러 차례 전쟁의 화재로 소실되었고, 나머지 수습된 글은 오랜 세월을 겪으며 세대가 멀어져 기록된 글이 있는지 없는지도 자세하지 않으니, 어찌 하물며 중간 연혁이 예전만 같지 않겠습니까?”라 하였다. 생각해보면, 선생의 빛나는 덕업과 학문은 진실로 정사의 흥폐와 관련이 없고, 삼가 이요당에게 보낸 편지를 살펴보면 ‘꽃과 대나무를 심고 못을 파서 물을 끌어들여 마음을 탁 터놓고 세월을 보내는 바탕으로 삼았고, 이때 계정에 가서 배우고 질문하여 깊이 자득하고 한가로이 스스로 즐거워하였으며 마침내 만년에 귀의처로 삼았다.’고 말하니 이곳 터와 이곳 당(堂)이다.
베토벤의 3번 교향곡 영웅은 하일리겐슈타트 유서(1802) 사건 이후 중기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초기의 작품에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면, 중기의 작품은 전에 없던 베토벤 특유의 음악성으로 고전파 선배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난다. 영웅은 음악 자체가 묵직하고 장중하다. 길이도 파격적으로 늘어난다. 이전 고전파 교향곡은 기껏해야 30분 정도였지만, 영웅은 무려 50분에 달하는 대작이다. 훗날 9번 합창과 낭만파 교향곡의 대작 경향에 초석이 된 작품이 되었다. 고전파 형식을 준수하는 작품이었지만, 동시에 파격을 보이기 시작한 작품으로도 기억된다. 영웅교향곡은 나폴레옹 관련 일화로도 유명하다. 원래 영웅교향곡에서 ‘영웅’은 나폴레옹이었다. 공화주의자였던 베토벤은 나폴레옹이 프랑스혁명(1789)의 과업을 완수할 거라는 큰 기대를 가졌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1804년 스스로 황제가 된다. 이에 배신감은 느낀 베토벤은 표지에 쓰여 있는 나폴레옹의 이름 ‘보나파르트(Bonaparte)’를 박박 지워버린다. 얼마나 화가 났으면...
아르헨티나 출신의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세르나’. 체 게바라의 본명이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언제인지 확실하지 않다. 아마도 대학 신입생 때 어느 집회에서 판매하는 티셔츠의 그림에서 일 것이다. 전설처럼 들려오는 그의 이야기를 짜집기하여 막연하게 쿠바의 민중혁명가로만 알고 있던 그를 제대로 들여다보고 이해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도 한참의 세월이 흐른 2005년 「체 게바라 평전」을 읽고부터이다. 그때는 80년대와 90년대 초를 관통하던 민주화의 거대한 흐름과 사회주의 체계의 붕괴를 몸살감기처럼 심하게 앓고 난 때이다. 이미 이념과 사상 따위는 먼지 냄새 풀풀 나는 낡아빠진 것들로 취급되던 그때, 나는 체게바라를 혁명가가 아니라 철저한 휴머니스트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체 게바라 평전」은 시대정신을 완벽하게 구현하였다고 평가받는 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쿠바혁명의 성공 이야기보다 그가 천식을 심하게 앓았던 어린 시절과 의과생으로서 오토바이를 타고 민중들의 삶을 돌아보았던 청년기를 비중 있게 다룸으로써 어떻게 민중의 가장 가까운 벗이 되었는지를 조명하고 있다. 체 게바라는 대륙의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니면서 가난한 민중의 처절한 삶을 목격하고 제국주의의 횡포로 무너지는 과테말라의 개혁정부를 보면서 각성하게 된다. 자신의 안위보다는 다수 민중들을 위한 삶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체 게바라는 쿠바의 민중혁명을 이끈 사령관이었고 아프리카 콩고에서, 남미대륙의 볼리비아에서 누구보다도 치열한 삶을 살았던 게릴라였다. ‘혁명은 다 익어 저절로 떨어지는 사과가 아니다. 민중의 힘으로 떨어뜨려야 하는 것이다.’라고 했던 그의 말은 수십 년이 지난 후 지구 반대편의 한국 사회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고 촛불혁명을 통해 그 진리를 체감할 수 있었다. 그는 늘 민중의 편에 선 세계시민이었고 나라와 대륙의 경계를 넘어 늘 핍박받는 민중들과 함께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혁명가 이전에 민중들을 누구보다 사랑한 휴머니스트였고 인간에 대한 예의가 지켜지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오롯이 그의 삶을 희생하였다. 이 책을 읽었을 당시 나의 상황을 돌이켜보면 지역자활센터의 실무자로 가난으로 인한 취약계층의 자립과 자활을 돕는 일을 하고 있었다. 사회복지사로서의 직업적인 관점보다는 빈민운동의 사회적 활동가로 스스로 인식하고 있었고 체 게바라의 일대기는 그대로 나의 삶에 투영되었던 것 같다. 내가 편안하고 안정되기보다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될 수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꿈을 꾸게 된 것도 그즈음부터이다. 하지만 고백하건데 나는 체 게바라처럼 되고 싶었으나 그 근처의 삶에도 닿아보지 못했다. 그는 나에게 늘 방향이었고 지향점이었다. 어쩌면 20세기 가장 완벽한 인간으로 평가받는 위대한 인물을 닮고 싶었던 것은 과한 욕심이었을지 모른다. 쿠바혁명을 완수하고 피델 카스트로에 이어 2인자로서 안정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체 게바라는 1967년 볼리비아 혁명에 참여하였다가 총살당한다. 그가 죽은 지 몇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는 여전히 혁명을 꿈꾸는 모든 이들의 ‘사령관’으로 살아있다. 체 게바라는 전 세계 좌파 진영과 시대 저항정신의 아이콘이며, 핍박받는 소수를 위한 가장 전투적인 게릴라로서 우리와 늘 함께하고 있다. 반백 살을 향해가는 지금의 나는 여전히 활동가를 지향하고 노력한다. 도시재생의 현장과 전통시장과 골목상권에서 주민들과 상인들의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일을 돕는다. 사회적경제 조직을 만들어가며 체 게바라가 꿈꾸고 만들고자 했던 사회주의의 작은 모델들을 실현하고 있다. 20대 청춘 시절의 세상을 향한 분노와 정의감은 조금 식기는 했지만 아직도 유효하다. 기득권이 주도하는 시대를 향한 전선(戰線)은 여전히 폐기되지 못했으며, 그때와는 다른 방식이지만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혁명의 길은 늘 삶의 방향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지만 당연하게도 체 게바라를 향해가는 나의 걸음은 여전히 소원하며 아직도 과한 욕심이다. 다만 그의 방향을 좇다 보면 언젠가는 그 위대한 삶의 발뒤꿈치쯤이라도 닿아있기를 희망할 뿐이다. 체 게바라의 ‘Che’는 ‘나의’ 라는 뜻을 가진 인디언 토속어라고 한다. 체 게바라는 영원히 ‘나의 게바라’ 이다.
지난 15일 동국대학교가 세계 불교학 연구소 산하에 ‘향가 만엽집 연구실’을 개설하고 본지에 향가 관련 칼럼 ‘향가식 해독으로 읽는 일본 만엽집’을 연재하기 시작한 향가 연구가 김영회 선생을 연구실장으로 임명했다. 한국 향가 역사상 대학 차원에서 독자적인 향가연구실을 설립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알려진 가운데 이번에 설립된 연구실은 향후 불교와 향가의 관계, 불교가 향가에 미친 영향, 향가와 일본 만엽집과의 관계 등이 심도 있게 연구될 것으로 알려졌다. 김영회 연구실장은 “동국대학교가 대한민국 향가 연구의 틀을 닦은 고 양주동 박사가 재직한 대학이란 면에서 이번 연구소 설립에 의미가 깊다”고 전재하고 “고대 동북아 주류 문화로서 향가와 불교의 관계에서 일어난 다양한 연구를 통해 고대 그리스 문화권과 같이 고대 동북아 문화를 구분 짓는 개념으로서 동북아 향가 문화권이라는 개념이 설정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며 이번 연구소 설립에 대한 사명감을 표했다.
새로 즉위한 일본의 효덕천황은 실권자인 중대형 황자와 자신의 누나인 황극천황(중대형 황자의 어머니)이 협의하여 임명해 놓은 천황이었다. 말하자면 바지사장이었다. 이름만 천황이었던 효덕천황에게 실권자 중대형 황자가 어느날 나니와(難波, 지금의 오사카)에서 아스카(飛鳥)로 도읍을 옮겨가자고 하였다. 효덕천황은 이를 거부함으로써 큰 파란이 일게 되었다. 중대형 황자가 퇴위해 있던 어머니(황극천황)와 누이인 간인황후(효덕천황의 비)를 데리고 함께 아스카로 떠나가 버린 것이다. 다른 신하들도 명목상의 천황인 효덕을 버리고 중대형 황자를 따랐다. 버림받은 효덕천황이 향가 한 편을 만들어 아내에게 보냈다. 이 작품은 향가가 무엇인지 그 본질을 명확히 드러내 보이는 작품이다. 작품을 향가창작법으로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舸 娜 紀 都 該 阿 我 柯 賦 古 / 磨播比 枳 涅 世儒 阿 我 柯 賦 古 / 磨 乎 比騰 瀰 都 羅 武箇. “큰 배에 실린 짐 중 실 한 오라기 정도만을 세금으로 거두어들이자고 하였음에도, 모두가 중대형 황자에게 알랑거리며 온갖 세금을 매겨대더라. 삼나무를 물에 불린 다음 돌로 두드려 몹쓸 껍질은 버리고 좋은 것으로만 골라내 삼베 실을 뽑아내자고 하였음에도, 모두가 중대형 황자에게 알랑거리며 곡식 한 포기도 자라지 않는 갯땅에까지 세금을 매겨대더라. 삼나무를 물에 불려 돌로 두드려 삼베 실을 뽑아내는 것처럼 모두들 모여 나와 함께 일하자고 하였어도, 세차게 흐르는 물에서 나 혼자 그물질해야 하더라” ■일본인들은 이 작품을 다음과 같이 풀고 있다. 앞의 풀이와 비교해 보시기 바란다. “도망 못 가게 머리에 나무를 붙인 내가 기르던 말은 어찌 되었나. 마구간에서 꺼내지도 않고 소중히 기르던 말을 어찌하여 타인이 보았을까” ■지난 천년 간 일본인들이 고심을 거듭한 끝에 풀어낸 위의 결과는 효덕 천황이 버림받았다는 일본서기의 내용과 전혀 연결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엇인가 되게 잘못되어 있다. 효덕천황은 실권자 중대형 황자의 건의를 거부했다가, 모두가 자기로부터 떠나는 사태를 맞았다. 바지사장이 자기가 주인 행세를 하려 했으니 진짜 주인이 가만 있을 리가 없다. 작품을 살피면 효덕천황은 신하들에게 세금 감면이라는 달콤한 꿀을 제시하면서, 중대형 황자를 따르지 말고 자기와 함께 하자고 하였다. 중대형을 고립시키려는 책략이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중대형 황자였다. 자신을 따를 자와 효덕을 따를 자, 선택하라면서 아스카로 가버린다. 결과는 모두가 중대형을 따랐다. 왕따가 된 효덕천황이 또다시 수단을 동원하였다. 보복을 비는 향가를 만든 것이다. ‘나의 원한이 후손들에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도록(古=十+口=십대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 해달라’고 천지귀신에게 빈 것이다. 효덕천황은 이 작품을 만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사망(654년)하고 말았다. 죽음을 앞두고 만든 작품임이 분명하다. 문제는 그가 향가 속에 담아놓은 저주의 문자(古)가 훗날 현실화 되었다는 데 있다. 저주가 사람들을 들쑤시고 다녔다. 그가 죽은지 19년이 지났을 무렵 일본 고대사 최대의 난인 ‘임신의 난’이 발발하고야 말았다. 중대형 황자의 아들 홍문(弘文)천황이 반란을 일으킨 숙부에 의해 목이 베이고 황위까지 찬탈 당하고 말았다. 고대 일본인들은 효덕천황이 죽기 전에 만든 향가가 비극적 결과를 빚어내었다고 굳게 믿었다. 향가는 우리가 알고 있는 단순한 서정시가 아니었다. 작자의 소원을 이루어주는 주술가였다. 이것은 향가의 본질이다. 이를 알아야 ‘신라인들은 향가를 숭상했다’고 하는 저 유명한 구절의 뜻을 이해할 수 있다. 향가는 일본에서도 한반도에서도 가공할 마력을 가진 노래로 숭상받고 있었다.
“복술 복술 최복술아, 타기 싫은 집둥질(짚으로 엮은 호송수레)에 넘기 싫은 문경새재, 관원이 출동하여 이 내 몸이 잡혀가네. 사랑하는 처자는 부모에게 전장하고 나는 가네 나는 가네 서울 관문 나는 가네. 땅 보고 통곡하니 하늘도 탄식하도다. 몹시도다, 몹시도다 우리 임금 몹시도다. 귀신이 시켰던가 하늘이 제시했던가, 하늘 밑에서 10년 공부하더니 이만하면 마쳤도다” (1973년 5월 3일 조선일보, “「新羅의 얼」 半世紀”) 위 내용은 수운 최제우 선생께서 동학을 창도 후 관원들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될 당시 부패한 조선왕조를 한탄하며 경주지방에서 애달프게 부른 노래 가사이다. 이 가사는 구비(口碑)문학의 한 부분으로 약 160년 전 경주지방의 고노(古老)들로부터 구전된 것을 필자의 선친께서 정리하여 발표한 것이다. ‘복술(福述)’은 수운 선생의 아명(兒名)이다. 19세기 중엽 수구왕조 체제의 구조적 모순 속에 있던 민중을 구제하고자 ‘나라 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자’는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旗幟) 아래 인간의 존엄성을 구현한 새로운 종교가 출현하였다. 이는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인내천 사상에 근간을 둔 무극대도의 동학이다. 동학(천도교)은 1860년 4월 5일 경주시 현곡면 구미산 중턱에 있는 용담정에서 수운 최제우 선생이 창도했다, 동학이 설파(說破)한 “시천주(侍天主), 사인여천(事人如天), 인내천(人乃天)” 등의 인본사상(人本思想)은 당시 신분과 남녀노소를 초월하여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인간 존엄을 최우선으로 하여 당시 억압받던 민초들에게 새 희망을 주었다. 수운 선생은 1824년 구미산 자락에서 출생하여 동학을 창도 후 조선왕조의 박애와 탄압으로 1863년 혹세무민의 죄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1864년 순교 후 구미산에 안장되었다. 하지만, 역사는 항상 민중의 편에서 정당한 심판을 내리듯 선생은 국내외를 걸쳐 역사의 위인으로 평가받아 왔으며, 경주시도 2014년 ‘동학발상지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생가를 복원하는 등 선생을 재조명하고 있다. 신라고도 경주에 우뚝 솟은 구미산은 시내에서 서북쪽으로 불과 10km 지점에 위치한 명산으로 경개절승(景槪絶勝)한 경치를 뽐내고 있다. 산 주위에는 신라의 효자 손순(孫順)의 애절한 사연이 깃든 홍효사지(弘孝寺址), 청동기시대 암각화가 있는 금장대(金丈臺), 신라 제28대 진덕여왕릉, 나원리에 국보 제39호인 신라 5층 석탑이 장엄하게 서 있다. 이러한 역사성을 인정받아 구미산은 1972년 당시 최덕신 천도교 교령과 필자의 선친 최남주(고고학자) 선생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용담정 또한 성지로 정비되었다. 구미산의 국립공원 지정 반세기 후 경주시는 ‘역사문화도시조성사업’의 일환으로 ‘동학발상지 성역화 2차 사업’을 진행하였으며 필자의 가족들도 2009년부터 경주시 ‘역사문화도시조성사업’ 추진위원회에 참여하여 위 사업 추진에 적극 협조하였다. 그 결과 용담정 일대 포덕문을 포함하여 주변 탐방로가 정비되었고 수운기념관 및 교육수련관도 설립되었다. 이와 같이 경주는 동학의 발상지이며 많은 위인들을 배출한 역사적인 도시이다. 필자는 앞으로도 천년고도 경주가 세계적인 문화도시와 동학의 성지(聖地)로 대내외적인 재조명을 받기를 바란다.
‘SDGs(지속가능발전목표) 이행·실천’은 ‘SDGs 달성을 위한 2030 의제의 이행’의 의미로 해석하고 사용된다. ‘SDGs 이행 전략’은 지속가능성을 진척하는 혁신적인 활동을 집합적으로 개발하고 이행하는 방책으로 정의된다. 우리 삶과 분리되지 않는 지방 SDGs의 이행 계획 수립과 실행은 총체적 도시전략의 특징과 가능성을 검토하는 작업이다(이창언, 2020c: 1734). 왜 정부(지자체)는 SDGs를 발전전략으로 도입해야 하는가? 왜 의원(국회, 지방의원)들은 SDGs를 공약화하고 실행해야 하는가? 그것은 환경위기, 빈부격차, 저출산, 고령화, 인구감소, 지방소멸 등 많은 과제를 지자체가 안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전략이 요구되고 있으며, 문제 해법의 기제로서 SDGs가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SDGs는 과제 해결뿐 아니라 과제 발굴 수단으로써도 활용할 수 있다(村上 周三, 2019: 7). 정부(지자체)의 SDGs 도입과 실행은 대체로 두 가지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첫째, 의무적·포괄적 도입이다. 이는 국가의 방침에 따라 지자체 행정의 임무로서 추진하는 SDGs를 의미한다. 둘째, 자주적·선택적 도입이다. 정부(지자체)의 자주적인 요구와 국가(도시) 발전전략으로 추진하는 SDGs는 성공 확률이 높다. 정부(지자체 혁신)와 지속가능한 국가-도시를 만들기 위한 SDGs 17개 목표는 모두 중요하지만 실질적인 이행 계획을 고도화하기 위해서는 ‘SDGs의 현지화 전략’에 따라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 지속가능발전의 현지화는 글로벌 의제를 그래도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의 특성, 맥락, 기회, 우선순위 및 아이디어를 활용하는 것에 기반을 둔 정치적 과정이다. 지자체 SDGs 이행·실천은 시민참여의 강도·범위·역량으로 표현되는 국가(지역) 지속가능발전 역량과 공론장, 지방분권을 강화하는 과정이다. 여기서 협력적 거버넌스(collaborative governance)는 SDGs의 성공 요소로 작용한다. SDGs를 국가전략, 지자체 발전전략에 도입하면 어떤 긍정적 효과가 있을까? 정부(지자체)는 구체성을 띤 국가(도시)의 지속가능성 전략 수립과 관리는 물론 조직 운영 패러다임과 조직 구조의 혁신을 가속화·고도화를 촉진한다. SDGs는 국가(지자체)의 빈곤, 먹을거리, 건강, 교육, 성평등, 환경, 고용 외에도 지역의 도시계획이나 지방 활성화 등 지방자치단체의 중요한 행정 과제를 취급한다. SDGs의 목표, 세부목표, 지표를 통합적으로 활용함으로써 국정·시정 현황 파악이나 중장기적 시점에서 정책목표를 설정하는 것이 가능해져서 삶의 질(Quality of life) 향상을 위한 효과적인 정책 추진이 쉬워진다. 또한 SDGs의 현지화를 통해 국가와 도시의 고유한 특징을 인식하고, 정체성을 활용하여 매력적인 국가-도시 조성을 가능하게 한다. SDGs 추진 과정에서 국가-지역의 정체성과 연대성, 국가-도시 브랜딩을 제고하고 국가-도시 앞에 제기된 도전 과제 해결을 촉진한다(이창언, 2020e: 248). SDGs 목표의 성취도나 국제적 순위를 떠나 SDGs는 2030년까지 더 평등하고 평화롭고 탄력적이며 번영하는 사회로 전환할 수 있는 국제적-지역적 틀과 방법론을 제공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SDGs를 주류화, 현지화하는 과정에서 정부(지자체)의 역할은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중요하다. 정부(지자체)는 재정적 수단의 접근이 상대적으로 용이하며, 투명하고 공정하며 포괄적인 공공 서비스를 제공해야 할 의무와 권한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이창언, 2020e: 273). 물론 SDGs 이행실천은 정부(지자체)에도 유익하다. 경제, 사회, 환경 정책의 통합을 목표로 하는 SDGs 추진은 국정·시정의 영향 영역과 효과를 정리함으로써 애당초 전망했던 편익 이외의 편익 창출이 이루어질 수 있다. SDGs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정부(지방정부 포함) 이외의 이해 당사자와 제휴가 필요하므로 다 부문적 파트너십 강화로 이어진다. 또한 중앙과 지방정부, 부처 간의 장벽도 넘어설 수 있다. 중앙정부는 지방자치단체의 SDGs 대응을 위한 자금지원이나 성공사례 보급을 전개하고 지방자치단체의 대응 과정에서 국가(지자체) 정책에 관한 상호 관여와 공헌, 소통이 강화된다. 정부(지자체)와 의회는 자신의 활동을 SDGs 틀로 정리해 발신함으로써 그 해법이 있어야 하는 세계의 국가·자치단체와 협력할 기회도 창출된다. 정부(지자체)의 이니셔티브는 SDGs를 통해 더욱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다. 정부는 신속하게 전환을 주도할 체제를 구축하는 한편, SDGs를 추진해 나갈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이창언, 2020e: 248). SDGs 대응을 위한 정부의 활동은 국가(지자체) 차원의 SDGs 추진체계 구축과 구체적인 SDGs 전략과 실행지침 제시, 전국적인 확산을 위한 지방자치단체 SDGs 지원으로 구체화한다. ‘SDGs 전략과 실행지침’이 SDGs와 관련한 정책의 집합이라면 ‘지방자치단체 SDGs’는 지방 지속가능성을 위한 종합전략과 관련되는 정책의 집합이라 할 수 있다(이창언, 2020e: 272). 정부의 SDGs 추진 시스템과 수단(도구)은 SDGs 모니터링(유엔에서 SDG 지표의 측정 협력, SDG 글로벌 지표의 정비 등), 일상적 홍보·교육, SDGs 모델 개발, 국제적 스포츠와 박람회, 행사와 연계한 SDGs 추진, 지방 자치 단체와 지역 기업의 강점을 살린 국내외 협력(민관산학)사업 추진, SDGs 추진 기구에 참여한 다양한 이해당사자 그룹과 네트워크 등의 연계, SDGs 달성에 동참하는 기업과 대학, 기관의 지원 등이다. 그리고 적정한 글로벌 SDGs 연계망 구축, SDGs·ESG 경영 이니셔티브와 ESG 투자 추진, 개발도상국의 국내 자금 동원을 위한 세제·세무 집행 지원, SDGs 달성을 위한 혁신적인 자금 조달의 기획·집행 등이다. 정부와 지방정부가 SDGs를 국정과 시정 전략으로 삼고 구체적인 시스템과 수단 통해 체계적인 실행을 전개할 때 SDGs는 달성될 수 있다(이창언, 2020e: 272).
경주를 배경으로 하는 문학 작품들은 많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빙허 현진건의 장편소설 ‘무영탑’을 꼽을 수 있다. 그것도 경주를 대표하는 불국사, 불국사를 대표하는 석가탑을 모티브로 하고 있으며 작품의 배경 또한 당연히 경주, 서라벌 땅이다. 소설 ‘무영탑’은 일본 제국주의의 억압이 극에 달하던 시기에 쓴 소설이다. 1930년대는 내선일치 구호 아래 창씨개명과 각종 징집령이 내려지던 험한 시기였다. 작가는 암울했던 시대적 분위기에 현재와 동떨어진 역사적 시간 속으로 이야기를 설정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하고자 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서, 작가로서의 책무였는지도 모른다. 이에 앞서 현진건은 동아일보 사회부장으로 근무 중이던 1936년 8월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일장기 말살 사건에 연루되어 1년간 복역하였고 신문사를 그만두어야 했다. 직장을 잃은 그는 양계업을 호구지책으로 삼으며 소설을 썼다. 1938년 7월부터 1939년 2월까지 총 164회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한 작품이 바로 ‘무영탑’이다. 1939년 박문서관에서 초판이 간행되었다. 우리나라 사실주의 대표적 작가인 현진건은 ‘빈처’, ‘술 권하는 사회’, ‘운수 좋은 날’, ‘B사감과 러브레터’ 등 뛰어난 단편들을 많이 발표했다. 다수의 작품이 교과서에 수록되어 친숙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하지만 장편소설 ‘무영탑’은 분량이 많다 보니 읽은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간략하게 내용을 살펴본다. 신라 경덕왕 시절, 불국사의 다보탑과 석가탑을 세우기 위하여 서라벌로 뽑혀온 부여의 장인(匠人) 아사달에게 서라벌 귀족 이손 유종(唯宗)의 딸 주만(珠曼, 일명 구슬아기)은 마음을 빼앗긴다. 부여의 아내 아사녀 때문에 괴로워하던 아사달도 마침내 주만의 열정을 받아들이지만, 이들에게는 험난한 장애가 가로막는다. 주만을 짝사랑하던 당학파(唐學派) 금지(金旨)의 아들 금성(金城)의 훼방이 그것이다. 더구나, 주만의 아버지 유종은 금성을 피하기 위해 경신(敬信)과 혼약을 정한다. 한편, 3년이나 아사달을 기다리던 아사녀는 아버지의 죽음과 더불어 달려드는 팽개(彭介) 무리의 겁탈 위기로부터 벗어나고자 무수한 고통을 겪으며 서라벌로 달려온다. 드디어 아사달의 석가탑은 완성되었으나 주만은 경신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에게 실행(失行)의 죄가 탄로 나서 화형(火刑)당하게 된다. 또한, 아사녀는 탑이 완성된 것도 모르고, 중과 뚜쟁이의 행패 때문에 남편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그림자못(影池)에 빠져 죽는다. 이에 아사달은 두 여인을 합하여 원불(願佛)의 조각을 새기고는 역시 물에 빠져 죽는다. 현진건은 이 소설을 쓰기 10여 년 전 1929년 동아일보에 고도순례-경주 기행문을 한 달간 연재했다. 고도 경주의 유적지들을 둘러보면서 남긴 글들이다. 이중 무영탑과 영지에 관한 글에서는 소설과는 달리 백제에서 온 여인이 아닌 당나라에서 온 여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에 관한 기록은 불국사고금역대기(佛國寺古今歷代記)라는 조선후기 승려 동은이 불국사의 역사적 배경과 유물·유적 등을 수록하여 1740년에 간행한 사적기가 존재한다. 원본은 동경대학(東京大學)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여기에 언급된 이야기에서 ‘석공은 이름 없는 당(唐)나라 사람이고, 그를 찾아온 사람은 누이동생 아사녀(阿斯女)’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현진건은 ‘고금창기’와 오사카 긴타로와 오사카 로쿠손가 영지에 관한 전설을 정리한 ‘무영탑 전설’을 바탕으로 소설 ‘무영탑’을 발표했다. 소설에서 현진건은 석공과 부인을 부여 사람으로 묘사하고, 석공의 이름을 아사달이라 했다. 이 역시 역사의식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아사달은 바로 단군 왕검이 도읍으로 정하고 다스린 지명이기 때문이다. 당나라 사람이 아닌 부여 사람으로 설정된 것 또한 현진건의 민족주의적 성향이 반영된 것이다. 소설 ‘무영탑’은 설화를 바탕으로 했고 일부 각색을 하였다. 예전부터 구전되어 오는 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형되기 마련이다. 모든 구비문학은 완벽한 전승은 없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변형, 각색되기 마련이다.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할아버지가 손자에게로 넘어가듯 자연스레 가감되거나 가공되기도 한다. 소설 속의 주인공 홍길동과 심청을 두고 지자체 간 서로 자기 고장 인물이라고 주장하며 대립하는 것도 사실이다. 모두 자기 고장의 이야기로 스토리텔링하고 관광 자원화하기 위한 싸움인 것이다. 석유를 두고 바다 싸움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원조 논쟁은 이른바 선점 효과를 통해 문화상품을 판매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통한 관광객 유치를 통해 지역 경제 활성화와 연계되기 때문이다. 다른 도시에 비하면 경주에는 문화 콘텐츠가 차고 넘친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가 되듯 아무리 좋은 것도 활용하지 않으면 그냥 책 속의 이야기일 뿐이다. 책 속에 갇혀있는 것을 꺼내어 상품화가 필요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 번 정도 경주를 찾을 것이지만 두세 번씩은 오지 않을 것이다. 이들이 다시 찾아오기 위해서는 새로운 신상품들을 창출해내어야 한다. 소설 무영탑은 여러 가지 형태로 재탄생되기도 했다.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 주연의 ‘무영탑’과 김수용 감독의 신영균, 김지미 주연의 ‘무영탑’은 모두 현진건의 원작 소설을 영화로 만들었다. 여러 편의 창작 오페라가 만들어졌고 무대에 오른 바 있다. 비록 옛날 노래이기는 하지만 가수 이인권이 부른 ‘무영탑 사랑’이라는 대중가요가 만들어져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가슴 저미게 한다. 또 국악계에서도 무영탑이라는 거문고 연주곡 4악장이 널리 연주되고 있다. 경주고에는 무영탑이라는 동아리가 60년 세월이 지난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시대를 초월하여 무영탑과 아사달과 아사녀가 등장하는 시들도 여러 편 찾아볼 수 있다. 조선 후기 초의선사가 불국사에 와서 머물기도 했는데 이때 당시 불국사를 회고하며 노래한 9수의 시들 가운데 무영탑과 아사녀가 등장하는 시가 있다. 승천교 밖의 구연지에는 칠보 누대가 물 밑으로 옮겨졌네 무영탑 바라보니 도리어 그림자 있어 아사녀가 지금 와서 비춰보는 것 같네. 그리고 소설 속 아사달과 아사녀의 고향 부여 출신 시인 신동엽(1930~19690)의 대표작이기도 한 시 ‘껍데기는 가라’ 시 중간에 다음과 같이 아사달과 아사녀를 노래했다. 다행히 영지 주변에 조성한 공원에 이 시를 돌에 새겨 놓고 있다.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과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신동엽 시인의 ‘껍데기는 가라’ 일부 한수산 필화사건에 휘말려 불운한 생을 살다간 박정만 시인 또한 장시 ‘떠오르는 탑’에서 아사달과 아사녀를 테마로 사설 연작시를 월간 문학에 연재하기도 했다. 그의 시 전집 속에서 여러 편의 시를 만나 볼 수 있다. 이외에도 많은 작가들 작품 속에 등장하고 있다. 이처럼 무영탑은 시대를 떠나 영감을 가져다주는 존재임은 확실하다. 아사달과 아사녀의 슬픈 이야기가 전해져오고 있는 영지 주변에는 그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영사(影寺)라는 절을 지었고 석불좌상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온다. 다른 한편으로는 영지석불좌상은 석공 아사달이 아사녀를 위해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띠고 있는 이 석불은 남아있는 것보다 닳아 없어진 부분이 더 많다. 세월을 건너온 흔적이 역력하지만 슬픈 설화를 곁들여 바라보다 보면 희미한 부분이 뚜렷하게 되살아날 수도 있을 것이다. 작년 겨울 어느 날 영지를 찾았을 때 얼음판 위로 뛰어다니고 있는 수달들을 만날 수 있었다. 멸종위기 동물을 아름다운 영지에서 만나는 행운을 가질 수 있었다. 다정스럽게 놀고 있는 그들이 마치 아사달과 아사녀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곳은 설화공원이라는 테마로 공원과 둘레길을 조성하여 놓았다. 뭇사람들에게 그 옛날 비련의 주인공들을 회상하며 걸을 수 있는 즐거움을 제공해주고 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세상의 지고지순한 연인들이 불국사 그림자 없는 탑을 둘러보고 그림자 못에서 사랑을 언약하면 그 사랑 반드시 이루어진다’라는 억지 소문이라도 내었으면 좋을 것 같다. 그러면 더 많은 사람들이 그림자 없는 탑과 그림자 못을 찾아 경주를 찾아올 것이다.
이철우 도지사는 지난 15일 국무총리 주재 중대본 회의에서 포스트 코로나 전환에 맞춰 △해외사례 분석을 통한 과학적 방역 △의료진 헌신과 봉사에 대한 예우 △방역요원에 대한 특별승진 등 3개 선제적 특별대책을 건의했다. 또 이에 맞춰 경북도는 포스트 코로나 대응체계 대전환을 위한 계획을 수립해 발표했다. 확진자수가 감소하고 감염재생산지수가 0.82로 낮아지고 있으나, 요양시설·병원 등에서 여전히 중증자 발생 및 사망률이 높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당분간 △병상운영 △생활치료센터 유지 △외료진료센터 대면진료 강화 △의료기동전담반 운영 △예방접종 독려 등 5대 체제를 유지할 방침이다. 먼저, 위중증 환자의 안정적인 관리를 위해 중증병원 24시간 운영 및 병상 1000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생활치료센터 2개소를 단계적으로 축소, 안동 지역 1개소는 지속 운영한다. 또 비대면 진료의 불안감을 줄이고 필요시 신속하게 대면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현재 232개소인 외래진료센터를 300개소로 확대·유지한다. 전문 의료 인력으로 구성된 요양시설 의료 기동전담반은 27개소를 운영할 계획이다. 종국적으로 위중증 및 사망자 발생률을 낮추기 위해 기동전담반과 연계 고령층, 미접종자를 대상으로 예방접종도 독려해 나갈 방침이다. 한편 면역수준 감소 및 계절적 요인에 따른 코로나19 재유행을 대비해 공중보건위기 대응체계를 지속해서 강화하고, 안정적 일상체제로 전환하기 위해 △역학대응 △병상대응 △복지대응 △심리대응 △생활대응 등 5대 대응책을 마련했다. 역학대응으로 신속대응 정예반 교육과 메타버스를 활용한 체계적 교육 훈련 시스템 구축, 도-시·군 실시간 종합분석상황실 등을 운영한다. 또 위기 단계별 보건·행정인력 확보를 통한 협력 거버넌스 확립, 방역요원 사기앙양 대책 마련, 질병청과 같은 도민건강국 신설, 역학상황분석·조사 2개 전담팀 확대 등을 추진한다. 다음은 병상대응으로 재유행시 즉각 병상가동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소아·임산부·투석환자 등을 위한 특수병상 운영관리, 중증응급환자 대응을 위한 경북대병원 도청신도시 분원 설치, 확진자의 전문적 분류와 의료기관으로 연결되는 재택·병원·생활치료센터 매뉴얼 정립을 통한 응급 진료체계 구축에 나선다. 이어 복지대응으로 요양병원·시설에 의료 기동전담반을 지속해서 운영하고, 감염병 전파 차단을 위해 도내 요양병원·시설에 음압장비를 시범 설치할 계획이다. 또 효율적 재난지원금 지원을 위한 부단체장 중심 재난지원금 TF팀을 구성하고, 마음 안심 앱 등 스마트시스템 도입해 복지 사각지대 제로에 나설 예정이다. 심리대응으로는 코로나 블루 대응반과 비타버스 운영, 외로움 대책 수립으로 사회적 고립을 해소하고 외로움에 적극 대응해 나갈 계획이다. 끝으로 재유행 시 방역·의료적 대응 외에도 도민 생활과 직결되는 대응체계를 구축해 생활 대응에 나선다. 이를 위해 시군과 장례·장사 대응을 강화하고 취약계층을 위한 진단키트, 마스크 등 비축물자 확보, 영세·소규모(30㎡이하) 일반음식점 주방환경개선사업 추진, 출입문 해제 및 열감지기 철수 등 공공시설 방역을 점차 해제해 나갈 계획이다.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향후 재유행 등 위기가 발생하더라도 대구·경북의 협력과 국난극복의 정신을 밑받침으로 잘 극복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새 정부에서 공언한 ‘디지털플랫폼정부’ 구현에 메타버스 수도 경북 조성을 목표로 내건 경북도가 앞장선다. 제20대 대통령 당선인이 디지털 패권 국가, 디지털 플랫폼정부를 천명하고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도 메타버스 등 디지털 전환이 핵심 화두로 논의되는 가운데 메타버스를 선점하기 위한 경북도의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다. 경북도는 지난 19일 도청에서 최성광 민관합동 메타경북추진 공동위원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1실국 1시군 1단체 88개 메타버스사업 보고회를 개최했다. 앞서 도는 지난 4일까지 메타경북 정책자문단은 실·국, 시·군, 단체 등에서 발굴된 88개 메타버스사업에 대한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전략자문을 실시했다. 대표사업으로 △(플랫폼) 메타버스 대구경북 신공항 및 4대 한류 프로젝트 △(교육·체험) 지자체 최초 MR(혼합현실)기반 메타버스 교육·체험센터 △(인재양성+취업연계) 메이저 기업·대학 등과 협업을 통한 메타버스 아카데미 등이다. 메타버스 대구경북 신공항 및 4대 한류 프로젝트는 도 및 시·군, 단체 등의 메타버스사업을 담을 대표 플랫폼이다. 1단계로 올 하반기부터 메타버스 신공항 및 한글·한복·한식·한옥 등 4대 한류 메타버스 체험-존 서비스를 구축한다. 이후 2단계로 실국 분야별 메타버스사업 및 시군별 특화 메타버스사업 연동, 3단계 타 광역지자체 메타버스 플랫폼과 연결하는 등 시·도민들에게 다양한 메타버스 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이다. 지자체 최초로 구축하는 ‘MR 기반 메타버스 교육·체험센터’는 포항공대의 메타버시티 MR 강의실을 벤치마킹해 올 하반기부터 도민에게 메타버스를 체험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도청 내 방문객 접근성이 좋은 유휴공간을 리모델링해 메타버스 체험 공간, 교육 공간, 휴게 공간 등을 마련한다. 이를 통해 메타버스 기본개념, 제작기술 기초교육, 콘텐츠 제작 등 학생, 기업인들의 눈높이에 맞는 체험·교육프로그램을 제공할 방침이다. 메타버스 아카데미는 청년들이 필요로 하는 맞춤형 교육 제공을 통해 메타버스 개발자 및 창작자를 양성해 메타버스 창작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선수학습, 자기주도 학습, 기업연계 학습 등 단계별 학습프로그램과 국내 주요기업 및 전문가 밀착 학습지원으로 메타버스 우수인력을 양성해 수요가 있는 기업에 인력 풀을 제공한다. 또 온라인 학습과 함께 MR기반 메타버스 체험·교육센터를 연계해 학습효과를 극대화시키고 하반기에는 권역별 아카데미 개설도 준비하고 있다. 이를 위해 도는 메타버스 교육전문기업 및 도내 대학 산학협력단과 교육과정 개설에 대해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이와 함께 발굴된 4대 분야 메타버스사업도 전문가 자문에 따라 우선순위를 정하고 정부사업과 매칭, 사업 규모화 등을 통해 국비, 민자 등을 확보해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경북도는 메타버스사업의 구체적인 논리개발 및 타당성 확보를 위해 △메타경북 마스터플랜 수립 △메타버스-NFT(블록체인) 생태계 구축·연계 △메타버스 국책 및 지역거점기관 유치·설립 △메타버스 사회혁신센터 구축·운영 등의 연구용역을 진행하고 있다. 이 용역들은 6월 중 마무리 될 예정이다. 또 정부, 국회, 인수위 등에 메타버스 수도 경북 조성의 핵심사업인 메타버스 융합산업 클러스터 조성과 디지털플랫폼정부 대표과제를 건의하고 사업채택, 예산확보 등에 행정력을 집중하고 있다. 이날 보고회에 앞서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새 정부가 목표로 하는 디지털 플랫폼정부 구현과 메타버스 선도국가로의 도약은 경북에서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라며 “메타버스 수도 경북 조성을 통해 지방에서 성공적으로 뒷받침하겠다”고 말했다.
경북장애인자립생활센터는 지난 14일 센터 2층 교육장에서 2022년 제12기 밝은빛누리 장애인대학 개강식을 가졌다. <사진> 개강식은 2022 밝은빛누리 장애인대학 경과보고, 회장선출 및 소감발표, 학장 인사말, 내빈축사, 학생 대표 선서문 낭독, 활동영상 관람, 기념촬영 순으로 진행됐다. 밝은빛누리 장애인대학은 지난 2011년 개강해 현재까지 12년째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장애인복지 및 자립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분야를 주제로 한 강의로 장애인들이 삶에 활력을 찾고 자신의 역량을 강화 할 기회를 가지며, 사회참여 확대를 통해 통합사회를 구현하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2022년 제12기 밝은빛누리 장애인대학은 (사)경상북도장애인부모회 경주시지부·한마음정신보건재활센터와 연계해 진행된다. 이날 개강식을 시작으로 7월 현장견학, 11월 졸업여행 및 수료식 순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7개월간 47여명의 학생들과 함께 장애인복지와 인권강의를 비롯해 법률, 금융 및 재테크, 소통의 기술 등 자립생활에 관련된 다양한 강의가 총 30회에 걸쳐 실시된다. 신청문의는 경북장애인자립생활센터로 하면 된다. 한편 이날 개강식에는 밝은빛누리 장애인대학 명예학장인 서호대 시의장, 박귀룡 경북장애인자립생활센터장을 비롯한 배진석 도의원, 경주시 관계자, 경주시장애인종합복지관 관장 종성스님, (사)경상북도장애인부모회 경주시지부 이홍식 지부장, (사)경북신체장애인복지회 경주시지부 손진목 지부장, 장애인권익협회 경주시지회 정목민지회장, 경희학교 김정희학부모회장 등이 참석해 교육생들에게 격려와 지지를 보냈다.
경주시가 발달장애인의 자립과 사회참여를 위한 ‘발달장애인 지원서비스’ 인프라를 확대한다. 발달장애인 지원서비스는 낮 시간에 장애인들의 요구를 반영한 사회활동 참여를 지원함으로써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서비스다. 만18세~64세 발달장애인을 위한 주간활동서비스, 만6세~18세 미만 발달장애학생들을 위해 취미·여가활동 등을 지원하는 청소년방과후 활동서비스 등이 진행되고 있다. 시는 장애인들의 편의를 더욱 높이기 위해 주간활동서비스 제공기관은 5곳, 방과 후 활동서비스 제공기관은 4곳으로 각각 확대해 지원을 시행하고 있다. 서비스 제공기관은 장애인복지관을 비롯해 도담발달지원센터, 마음길, 위앤드드림사회적협동조합, (사)경북장애인부모회경주시지부 등이다. 단 경북장애인부모회경주시지부는 청소년 방과후 활동서비스는 제공하지 않는다. 서비스를 이용하려면 주소지 행정복지센터를 방문해 신청하면 된다. 경주시 관계자는 “장애인들의 안정적인 사회 참여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전했다. 한편 경주시 등록장애인은 1만6587명으로, 이중 발달장애인은 1475명으로 9%를 차지하고 있다. 발달장애인 가운데 12%는 거주시설에 입소해 돌봄서비스를 받고 있다.
자서전이라고 하니까 대부분 사람들이 인생 전체를 회고하듯 써야 한다고 지레짐작한다. 자서전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은퇴한 학자나 직장인, 공무원 등 시간은 남는데 딱히 소일거리가 없는 분들이다. 물론 이들 대부분 건강이나 의욕은 왕성히 남아 있다. 연령대로는 대체적으로 60대 어름. 그러니 적어도 60년 인생을 한꺼번에 돌아볼 생각을 당연히 한다. 그러나 이런 도전은 참 무모하고 재미없는 일이다. 생각해 보라. 스무 살 청년이 자서전을 쓴다고 가정해도 그 20년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났겠는가? 그런데 60년을 한꺼번에 돌아본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벅찬 일이다. 그러니 시작도 하기 전에 고만 기가 질려서 포기하고 만다. -특별한 순간들을 기록하고 파일과 SNS로 저장하자 그래서 권하는 방법이 가장 찬란했던 인생의 한 부분을 써보라는 것이다. 그 한 부분이란 언제부터 언제까지의 연령대이기도 하고 특정한 사건에 따른 기억도 될 수 있다. 자신만의 고유 영역이랄 수 있는 전공 관련 경험이나 지식, 직업에서 일어난 사실성 있는 경험담을 써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 경우는 새로운 전공서로 가치 있는 책을 쓸 가능성도 있다. 자서전이라고 해서 굳이 책으로 내야 한다는 부담을 가질 필요도 물론 없다. 21세기는 바야흐로 종이의 시대가 아니고 다양한 저장성을 갖춘 플랫폼들이 즐비한 세상이다. 우선 글부터 쓰고 그것을 개인용 컴퓨터나 외장 메모리 등에 보관한 후 한편씩 SNS에 올리는 것을 권한다. 내 경우 블로그 ‘386세대의 아름다운 추억’에 다양한 자전적 이야기들을 테마별로 묶어서 기록해 놓았다. ‘기절복통 초등시절’, ‘좌충우돌 중학시절’, ‘기고만장 고등시절’과 ‘최루탄속 대학시절’ 식으로 각각의 기간을 따로 분류해 에피소드들을 저장했다. 대학졸업 후에는 여행사에 근무하거나 직접 여행사를 경영하면서 전 세계를 돌아다닌 경험을 ‘도깨비 여행 이바구’라는 테마를 만들어 따로 썼다. 그런가 하면 아이들이 커가는 과정을 담담히 지켜보면서 쓴 일상과 내가 만난 사람들에 대해 집중적으로 쓴 인터뷰 기록, 시사 칼럼, 문화 칼럼, 시문학 평론 등 1500편의 글을 따로 모아두었다. 뒤에 카카오스토리와 페이스북이 나오면서 이곳에도 2천여 편의 글을 따로 올렸다. 이 과정에서 초등학교 때의 추억담을 ‘금붕어’라는 출판사 제의로 ‘니, 꼬치 있나?(2005)’라는 책으로 펴냈는데 이게 내가 전문 작가로 데뷔하는 계기였다. 당시 내가 daum의 최우수 블로그로 활동하던 때였는데 책을 내면서 이제 곧 엄청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될 줄 알고 설레기도 했다. 여기서 잠깐, 내가 전문 작가노릇을 하고 있으니 어릴 때부터 글 쓰는 재주가 탁월했을 것이라 짐작하실 것이다. 전혀 그렇지 않다. 어릴 때부터 일기를 꾸준히 썼다는 것 이외에 글 쓰는 재주는 별로 신통치 못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줄곧 백일장에 나갔지만 단 한 번도 입상해본 적이 없을 만큼 내 글재주는 형편없었다. 내가 처음으로 글로 어떤 성과를 보거나 인정받은 최초의 사건이 세종대학교 학보사 기자로 발탁된 것이었다. 논술과 기타 상식시험 등으로 진행된 1차 시험에 합격하면서 그나마 눈곱만큼이라도 글을 쓰는구나 싶었다. 학보사 기자로 활동하면서 체계적으로 글 쓰는 요령이 늘었지만 대학 졸업 후에는 다시 글과 멀어졌다. 그나마 꾸준히 쓰던 일기도 직장생활 시작하면서부터는 술 마시랴 출장 다니랴 일상에서 멀어졌다. 다시 본격적으로 글을 쓰게 된 것이 2003년 인터넷 카페가 생기면서부터다. 처음에는 장난삼아 닥치는 대로 글을 쓰다가 무언가 보람된 글쓰기를 해보자며 시작한 것이 어릴 적부터의 자전적 경험담이었다. 비록 나의 성장기를 다룬 에피소드지만 우리 시대의 일상도 중요한 역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그때 무엇을 하면서 놀았고 어떤 것을 먹었고 어떤 옷을 입고 어떻게 학교에 다녔나 등에 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기억 속에 꺼내기 시작했다. 이 글들을 블로그에 올리면서 인기를 얻어 하루에 몇만 명씩 내 블로그를 찾는 요즘말로 ‘인싸’가 됐고 그 덕분에 책을 내게 된 것이다. -가족, 의식주, 희노애락으로 검색하면 다양한 소재들이 줄줄 나온다. 그러나 일반적인 자서전은 인생전반을 주마간산식으로 정리해 단행본으로 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려면 차분히 메모장을 꺼내 인생에서 어떤 중요한 기억들이 있는지를 먼저 정리해 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메모를 시작해도 도무지 어떤 이야기들이 기억에 남아 있고 가치 있었는지 찾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이럴 때는 역시 구간을 나눈 후 시간을 들여 회고해 보는 것이 좋다. 이때 무턱대고 옛날 기억을 떠올리려 하지 말고 유년기, 초등학생기, 중학생기, 고등학생기 식으로 나눈 후 의식주와 원초적 본능에 충실해서 돌아보면 훨씬 기억나는 일이 많아진다. 대부분 이야기가 가족들 혹은 친구들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아버지, 어머니, 형, 누나, 동생, 친구 누구처럼 구체적인 대상을 키워드로 정한 후 머릿속을 검색하는 것이 유용하다. 또 한 가지 방법은 의식주와 감정을 활용하는 것이다. 맛있는 것을 먹었을 때, 좋은 옷을 입었을 때, 등 대한 추억이 기본이 되고 슬펐을 때. 기뻤을 때, 아팠을 때. 화났을 때, 부끄러웠을 때, 미안했을 때 등을 세밀하게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문득 떠오르는 추억이 있다. 좋아했던 친구나 사람, 동물, 소풍, 여행 등 구체적인 단어들을 모티브로 자신에게 물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렇게 소재들을 찾아 놓으면 자서전은 다 쓴 것이나 다름없다. 일단 소재가 정해지면 이것을 구체적으로 파고들어 기승전결 이어 나가면 되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자서전이라고 해서 인생을 전부 꺼내 쓸 필요는 없다. 자서전의 전(傳)은 전한다는 말이지 책 전(典)이 아니다. 일부러 드라마틱한 내용을 찾아 머리를 쥐어짤 필요도 없다, 위에서 말했듯 평범하지만 주변 사람들과 함께 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는 게 중요하다. 그게 무슨 재미가 있고 가치가 있을까고 의문을 품을 수 있다. 분명히 말하지만 자서전은 거창한 것이 아니고 거창한 사람이 쓰는 거창한 사건의 기록도 아니다. 자신의 가장 평범했던 일상을 꾸밈없이 담담하게 쓰다 보면 그게 의외로 거창해진다. 그게 바로 자서전의 매력이다.
경기도가 도내 초등학생 5000여명을 대상으로 미래 에너지 체험교육을 지원하는 ‘2022년 찾아가는 에너지교실’ 참여 학교를 모집해 눈길을 끈다. 오는 27일 모집이 만료되는 ‘찾아가는 에너지교실’은 에너지 전환 시대에 맞는 미래세대 양성을 위해 직접 학교에 찾아가 미래 에너지 체험교육을 실시하는 사업이다. 이 사업은 지난 2016년부터 경기도가 도내 초·중·고교생을 대상으로 진행해온 사업으로 올해는 ‘초등학생 에너지 체험교육’과 ‘중·고등학생 에너지 동아리 활동 지원’ 등 두 가지 분야의 사업이 추진된다. 경기도 내 ‘지속가능발전교육센터’가 주관하는 ‘초등학생 에너지 체험교육’은 모두 220개 학급 5000명을 선정해 교육을 진행할 계획이다. 선정된 학급과 학생들에게는 탄소중립과 기후 위기 대응에 대해 교육하며 태양광 로봇 만들기, 소금물 연료전지 자동차 만들기 등의 체험 활동도 시켜준다. 또 에너지 실천 캠페인, 공모전 등 다양한 활동을 진행할 예정이다. 신청방법은 지속가능발전교육센터(www.esdcenter.co.kr) 공지사항에 게시된 신청서류를 작성 후 접수기간 내에 이메일(esdcenter@naver.com)로 제출하면 된다. 추가문의 사항은 지속가능발전교육센터로 문의가 가능하다. 한편 중·고교 에너지 동아리 지원사업은 심사를 거쳐 도내 총 15개의 에너지동아리를 선발했으며, 지난 11일 비대면 협약식과 사업설명회를 개최했다. 선정된 15개 동아리에는 각각 150만~200만 원의 지원금이 교부되며, 오는 11월까지 기후변화대응과 에너지 인식 확대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추진하게 된다. 또 9월 예정된 제2회 경기도 탄소공감 행사에도 참여하고 모든 활동이 종료된 후에는 활동 결과발표회와 시상식도 개최할 예정이다. 경기도의 이번 사업은 기후변화 위기에 살아가는 도내 청소년들의 에너지에 대한 인식 변화에 기여할 수 있는 교육 사업으로 원자력발전소와 풍력발전소, 포항의 지열발전소 등이 있고 태양광 패널 설치 등이 활발히 이루어진 바 있는 경주에서도 해볼 만한 미래교육사업으로 관심을 가져볼 만한 사업이다.
세시풍속은 아니지만 오래전 한옥 위주의 생활을 하던 때 거의 연례행사처럼 하던 큰일이 있었다. 묵은 문종이를 걷어내고 새 문종이를 바르는 일이었다. 문종이는 창호지(窓戶紙)라는 말로 더 익숙한데 나무로 짠 문짝에 바르는 넓은 종이를 일컫는 말이다. 창호지는 여러모로 쓰임이 많은 종이다. 닥나무를 두드려 그 조식을 걸러서 종이로 만드는데 이렇게 만든 창호지는 질기고 탄력이 좋아 문에 바르면 일 년쯤은 너끈히 견디고 좋은 환기성과 계절에 따른 습도 조절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방 공기를 언제라 쾌적하게 해준다. 창호지를 일 년에 한 번씩 갈아주는 이유가 있다. 우선 미관상 일년쯤 지나면 종이가 누렇게 변해서 보기 흉해진다. 담배 피는 집안 어른이 있으면 창호지가 훨씬 빨리 누렇게 변한다. 담배뿐만 아니라 종이에 난 작은 조직에 먼지가 끼어 종이 빛깔이 어두워지고 환기도 덜 된다. 또 한 가지, 아무리 탄력이 좋은 종이라도 결국 이게 얇은 종이이기 때문에 수시로 구멍이 난다. 짐을 옮기다가 뚫기도 하고 어린 아이들이 있는 집에는 손가락으로 장난삼아 쏭쏭 뚫기도 해서 특히 문짝 아래쪽으로는 더 많은 구멍이 뚫린다. 구멍이 나면 같은 재질의 창호지를 오려서 풀을 발라 봉하는 것이 보통인데 사람들이 부지런하지 않거나 집안이 좀 가난한 집은 문짝이 온통 땜빵 흔적으로 너덜너덜해진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예전 사람들은 창호지만 봐도 그 집안 사람들이 기본적인 품성과 빈부 여부를 알 수 있다는 말을 했다. 한옥 특성이 환기성은 떨어지는데 반해 보온성은 떨어져 자주 문 여닫는 것을 자제했는데 일부는 문짝 적절한 곳에 손바닥 만한 유리를 대서 문을 열지 않고도 밖을 내다볼 수 있는 붙박이 봉창을 만들기도 했다. 황담비 씨가 운영하는 한옥독채펜션 휴심원에 최근 창호지 바르는 행사가 열렸다. 문짝 전부를 물에 불려 기존의 종이를 떼 내고 닦은 뒤 잘 말린 다음 종이에 풀을 발라 문짝에 바르는 일이 보통 성가신 것이 아닌데 이를 즐겨 하는 황담비 씨를 보면 휴심원에 깃든 정성을 짐작할 수 있다. 종이 바른 문짝을 좋은 햇살에 말리면 탱탱하게 펴지며 눈부시게 빛나는데 그 모습은 마치 잘 피어난 꽃처럼 보기 좋다. 한옥이 급격히 사라지고 현대식 한옥은 문짝 대부분을 나무로 달거나 창도 유리로 대치하는 등 이전의 창호지 바른 문은 거의 사라졌다. 창호지 바르는 모습 올려준 황담비 씨 페이스 북에서 우리네 세시풍속을 새롭게 떠올리게 되어 무척이나 반갑다.
섬세한 펜으로 고왔던 어머니의 얼굴에 새겨진 깊고 짙은 삶이 흔적을 표현한다. 화려한 색채의 독락당 가을 풍경이 철저히 계산된 다양한 모노톤으로 구현된다. 펜드로잉 작가 허진석의 개인전 ‘사람과 자연’이 경주예술의전당 갤러리 달에서 오는 5월 1일까지 진행된다. 알천미술관 전시공간프로젝트 ‘공유’로 마련된 이번 전시에서 허진석 작가는 ‘어머니’ ‘양동마을’ ‘독락당의 가을’ ‘달빛능선’ ‘야화’ ‘달빛 물든 버들’ 등 인물과 풍경, 자연을 담은 펜화 22점을 전시한다. 인천 출신인 허 작가는 20대 시절 디자인 사무실에서 일러스트 작가로 활동했고, 출판, 신문, 방송 등 삽화 일러스트를 아날로그 작업 방식인 펜으로 그려왔었다. 그것이 계기가 돼 자연스레 전업 작가가 됐다는 허 작가는 모노톤으로 구성된 펜화의 개성과 매력에 매료됐다고 했다. “환경운동가는 아니지만 자연이 훼손되는 것을 굉장히 싫어합니다. 아름다운 자연을 제 작품에 담았고, 그 안에 사람이 모티브로 들어갔죠. 자연과 사람이 오버랩 돼 자연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여체의 라인을 차용해 사람도 자연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스스로를 자연 애찬론자라고 말하는 허 작가는 늘 새로운 변화를 위해 끊임없이 시도하고 연구하며 펜화 장르에서 주요인물로 떠오르고 있었다. 보통 펜화가들이 형태를 만들기 위해 외곽라인을 그리는 것과 달리 허 작가는 외곽라인 없이 자신만의 독창적인 기법으로 사물을 표현하고 있다. 표현의 깊이가 다른 만큼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작업과정이지만 허 작가의 이런 기법은 현재 많은 펜화가들에게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지난해 말 인사동에서 펜화 개인전을 가졌던 허 작가는 지역에서 활동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수가 그의 전시장을 찾았다. 그의 활발한 SNS 활동이 국내외 펜화 저변 확대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는 것이었다. 한국수채화협회 박 용 경북지회장은 “펜화는 선의 굵기에 따라 감정 기폭을 담아내며 마티에르의 농밀함은 사물을 재현하는 깊이감을 높여 보다 실재적 사실감에 이른다”면서 “인물, 또는 우리에게 낯익은 주요 문화재와 전국의 아름다운 풍경을 펜촉으로 작도한 ‘펜화의 달인, 허진석의 작품은 그만한 천착의 시간을 거쳐 왔기에 지금의 경지에 이를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하지만, 작가의 뛰어난 감각적 필촉은 독보적이다”라고 평했다. “경주 내려온 지 20년이 됐습니다. 30여년간의 펜화작업을 해왔고, 경주, 포항에서 활동을 하고 있지만 아직 펜화에 대해 생소하신 분들도 많습니다. 기회가 되면 외국에서도 펜화 전시를 가질 예정이며, 펜화가 우리 지역은 물론 국내외에서 많이 알려지길 기대합니다”고 밝혔다. 허진석 작가는 일러스트 작가이자 펜화 작가로 네 번의 개인전과 단체전 200여회를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경북창작미술협회, 한국펜화가협회, 아트비젼스페이스, 구상회, 포항예술문화연구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환경미술대전 심사위원을 역임했고, 동국대 사회교육원, 지역문화센터 강사, 소금화실 아트클래스를 운영하고 있다.
봄꽃의 향연으로 물든 경주의 풍경과 희망을 염원하는 하모니가 펼쳐진다. 경주시립합창단은 오는 29일 오후 7시 30분 경주예술의전당 화랑홀에서 기획공연 ‘봄의 소리’를 개최한다. <사진> 박수원의 사회로 진행되는 이번 공연은 ‘산유화’ ‘강 건너 봄 오듯’ 등 서정성 짙은 가곡 무대로 문을 연다. 이어 청소년들을 위한 뮤지컬 라이온 킹 OST 중 ‘하쿠나 카타타’를, ‘명상의 세계로’라는 주제로 ‘성불사의 밤’ ‘인걸’ ‘청산은 나를 보고’ ‘아제 아제 바라아제’가, 남녀노소 모두가 즐길 수 있는 가요 ‘벚꽃엔딩’ ‘봄봄봄’ ‘라라라’가 진행된다. 특히 이번 공연 중간에는 유림초 버들숲 어울림 학생오케스트라의 특별공연이 마련돼 눈길을 끈다. 차선영 교사가 이끄는 학생오케스트라 60여명은 이번 무대에서 ‘장난감 교향곡’,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OST 중 ‘내가 좋아하는 것들’, 호두까기 인형 모음곡 ‘트레팍’ ‘꽃의 왈츠’를 연주하며 프로그램의 다양성을 더할 예정이다. 경주시립합창단은 경주시민들에게 문화 향유 기회를 제공하고 더 나은 공연문화 정착을 위해 1996년에 창단됐다. 그동안 정기연주회와 기획연주회 및 해외 초청 음악회를 통해 음악적 기량을 나타내고 있으며, 참신한 기획력으로 합창음악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경주시립합창단 김 돈 지휘자는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는 다양한 레퍼토리를 담았다. 시립합창단의 ‘봄의 소리’ 공연이 여러분의 멋진 봄나들이가 될 것”이라면서 “거리두기나 모임 인원 제한이 풀린만큼 곧 예전의 일상도 다시 찾게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공연 예매는 경주예술의전당 홈페이지나 티켓링크에서 온라인으로 예매하거나 시립예술단 대표전화(1899-2138)로 예매하면 된다. 입장료는 전 좌석 5000원. 한편 경주시립합창단은 올해 코로나19 장기화로 지친 지역민들을 직접 찾아가 보다 가까이에서 흥겨운 무대를 선보이기 위해 ‘찾아가는 음악회 공감’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 9일 동궁원 공연을 시작으로 12일 선덕여자중·고등학교, 16일 현곡 센트럴 푸르지오에서 합창공연을 진행했으며, 오는 5월 17일 외동 효청보건고등학교, 19일 문화중·고등학교, 21일 두산위브트레지움에서 공연이 예정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