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술 복술 최복술아, 타기 싫은 집둥질(짚으로 엮은 호송수레)에 넘기 싫은 문경새재, 관원이 출동하여 이 내 몸이 잡혀가네. 사랑하는 처자는 부모에게 전장하고 나는 가네 나는 가네 서울 관문 나는 가네. 땅 보고 통곡하니 하늘도 탄식하도다. 몹시도다, 몹시도다 우리 임금 몹시도다. 귀신이 시켰던가 하늘이 제시했던가, 하늘 밑에서 10년 공부하더니 이만하면 마쳤도다” (1973년 5월 3일 조선일보, “「新羅의 얼」 半世紀”) 위 내용은 수운 최제우 선생께서 동학을 창도 후 관원들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될 당시 부패한 조선왕조를 한탄하며 경주지방에서 애달프게 부른 노래 가사이다. 이 가사는 구비(口碑)문학의 한 부분으로 약 160년 전 경주지방의 고노(古老)들로부터 구전된 것을 필자의 선친께서 정리하여 발표한 것이다. ‘복술(福述)’은 수운 선생의 아명(兒名)이다. 19세기 중엽 수구왕조 체제의 구조적 모순 속에 있던 민중을 구제하고자 ‘나라 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자’는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旗幟) 아래 인간의 존엄성을 구현한 새로운 종교가 출현하였다. 이는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인내천 사상에 근간을 둔 무극대도의 동학이다. 동학(천도교)은 1860년 4월 5일 경주시 현곡면 구미산 중턱에 있는 용담정에서 수운 최제우 선생이 창도했다, 동학이 설파(說破)한 “시천주(侍天主), 사인여천(事人如天), 인내천(人乃天)” 등의 인본사상(人本思想)은 당시 신분과 남녀노소를 초월하여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인간 존엄을 최우선으로 하여 당시 억압받던 민초들에게 새 희망을 주었다. 수운 선생은 1824년 구미산 자락에서 출생하여 동학을 창도 후 조선왕조의 박애와 탄압으로 1863년 혹세무민의 죄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1864년 순교 후 구미산에 안장되었다. 하지만, 역사는 항상 민중의 편에서 정당한 심판을 내리듯 선생은 국내외를 걸쳐 역사의 위인으로 평가받아 왔으며, 경주시도 2014년 ‘동학발상지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생가를 복원하는 등 선생을 재조명하고 있다. 신라고도 경주에 우뚝 솟은 구미산은 시내에서 서북쪽으로 불과 10km 지점에 위치한 명산으로 경개절승(景槪絶勝)한 경치를 뽐내고 있다. 산 주위에는 신라의 효자 손순(孫順)의 애절한 사연이 깃든 홍효사지(弘孝寺址), 청동기시대 암각화가 있는 금장대(金丈臺), 신라 제28대 진덕여왕릉, 나원리에 국보 제39호인 신라 5층 석탑이 장엄하게 서 있다. 이러한 역사성을 인정받아 구미산은 1972년 당시 최덕신 천도교 교령과 필자의 선친 최남주(고고학자) 선생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용담정 또한 성지로 정비되었다. 구미산의 국립공원 지정 반세기 후 경주시는 ‘역사문화도시조성사업’의 일환으로 ‘동학발상지 성역화 2차 사업’을 진행하였으며 필자의 가족들도 2009년부터 경주시 ‘역사문화도시조성사업’ 추진위원회에 참여하여 위 사업 추진에 적극 협조하였다. 그 결과 용담정 일대 포덕문을 포함하여 주변 탐방로가 정비되었고 수운기념관 및 교육수련관도 설립되었다. 이와 같이 경주는 동학의 발상지이며 많은 위인들을 배출한 역사적인 도시이다. 필자는 앞으로도 천년고도 경주가 세계적인 문화도시와 동학의 성지(聖地)로 대내외적인 재조명을 받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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