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 강동면 호명리에 가면 호계(虎溪) 이을규(李乙奎,1508~1546) 선생을 모신 북산서사(北山書社)가 있는데, 이는 예전에 호계 선생이 학문을 익히고 강론하던 호계정사(虎溪精舍)로 불렸다.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것을 문중과 유림의 논의로 1932년 봄에 중건하였으며, 진보이씨 효암(曉庵) 이중철(李中轍,1848~1937)의 호계정사중건기(虎溪精舍重建記)가 전한다.
「연보」를 보면, 이을규는 부친 이한주(李漢柱)․모친 창녕조씨 조계량(曺繼亮)의 따님 사이에서 경주부 남교서중리(南校西中里) 집에서 태어났다. 6세에 부친상을 당하였고, 7세부터 소학․중용․논어 등 경서를 배웠다. 17세에 용궁전씨 전회옥(全懷玉,1477~1540)의 따님인 창녕조씨 망기당(忘機堂) 조한보(曺漢輔)의 외손녀를 부인으로 맞이하였고, 21세에 모친상을 당하였으며, 신묘년(1531) 24세에 진사에 합격하였다. 임진년(1532) 25세에 호명리로 이거하였고, 지명을 본따 ‘호계정사’라 하였다. 옥산과 호계의 거리는 10리로 종종 회재선생을 찾아 질문하였고, 이때 독락당이 완성되었다. 26세에 도덕산 정혜사에서 독서하였다. 30세에 경산현령 제수, 31세 초계군수, 34세에 북경을 다녀와 이듬해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와 두문불출하며 학문을 닦았다. 인조반정 이후 산릉(山陵)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39세에 옥산 계정에서 회재선생을 뵙고 도를 논하고 학문을 배웠으나, 안타깝게도 병으로 죽었다. 부의 동쪽 북군 화개산에 장사지냈다.
회재 이언적(李彦迪,1491~1553)과 같은 시대와 공간에 살면서 계정을 오가며 도의를 맺고, 배움을 이어간 호계 이을규는 회재와 특별한 인연을 수록한 한시 작품이 전한다. 『회재집』 권2에 「서울로 가는 진사 이을규를 전송하다(送李進士乙奎向洛)」시를 보면, 1535년 3월 성균관으로 들어가기 위해 상경하는 28세 나이의 이을규에게 회재가 당부의 말을 시로 지었고, 9월에 별시에 급제하였다. 『호계실기』에는 「晦齋先生贈別韻二首」로 수록되었고, 훗날 북산서사를 지으면서 지경묘(持敬廟), 포요당(抱瑤堂), 동재 심득재(心得齋), 서재 의중재(義重齋), 공심문(共尋門) 등 모두 회재의 증별시에서 글자를 취해서 편액하였다.•호계정사 중건기 - 효암 이중철 옥산과 거리가 10리쯤에 호계(虎溪) 이을규(李乙奎,1508~1546) 선생이 학문을 닦은 호명촌(虎鳴村)이 있는데, 골짝의 이름으로 직접 명하였고, 바야흐로 선생이 마을을 택해서 은거하였다. 풍경이 아름다운 옛 도읍에 그 처소가 없음을 근심하지 않으나, 반드시 이곳을 장수(藏修)처로 삼은 것은 오로지 집안과 가까워서였다. 가깝기 때문에 그 교화(敎化)가 오래가고, 오래 되었기 때문에 두루 나아가고 물러나는 여가에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낀 것 가운데 실로 사람이 알아주지 못함이 있었지만, 오직 문원공 회재선생만이 그것을 알았다.
그 재덕(才德)의 빼어남을 받아들이고는 “온아하고 무리에서 재주가 뛰어난 그대를 사랑하네(愛君溫雅才超衆)” 또 그 도의(道義)의 꼭 들어맞음을 말하고는 “알아주는 이 드물어 홀로 옥으로 꾸민 거문고를 타네(獨抱瑤琴相識少)” 또 그 공부(工夫)의 진취함을 추천하고는 “충성과 공경으로 자신을 지켜가야 한다(忠敬相須好自持)”라 말하였으니, 무릇 회재선생의 한 말씀을 천하의 보물보다 중하게 여겼고, 다른 논변을 기다리지 않고 그 조예의 깊이를 다시 생각해본다.
이로써 어려서 청환(淸宦)과 현직(顯職)에 발탁되어 거듭 고을의 치적을 칭송받았고, 세 번이나 중국사신에 뽑혔다. 지우(知遇)의 융성함은 장차 그 재주를 펼쳤으나, 옛 동산이 그립고 앞 시내의 풍월에 마음이 끌려 마침내 의연하게 이 산야 한 칸의 초야로 돌아가 도를 구하고 닦는 뜻이 더욱 매우 절실하였다.
계정에서 돌아오는 높고 낮은 강주변이 어찌 지팡이 짚고 거닌 곳이 아닌 것이 없고, 풀 한포기 나무 하나에도 어찌 훌륭함이 미치지 않은 것이 없겠는가? … 선조의 업이 타락할까 크게 두렵고, 옛 자취의 빈터를 차마 오래 버려두지 못하여 이에 임신년(1932) 봄에 4칸의 집을 완성하였다. 앞 기둥과 나는 듯 용마루, 채색된 서까래로 아침저녁 아름다움 경치가 들어오고, 따뜻한 방과 시원한 집 모두 겨울과 여름 공부하기에 좋다.
후손 이종윤(李鍾胤)․이집만(李集晩) 여러 사람이 족인 이진영(李晉榮)과 이준영(李峻榮)을 보내 나에게 현판의 글을 부탁하며 “우리 집안의 문헌이 여러 차례 전쟁의 화재로 소실되었고, 나머지 수습된 글은 오랜 세월을 겪으며 세대가 멀어져 기록된 글이 있는지 없는지도 자세하지 않으니, 어찌 하물며 중간 연혁이 예전만 같지 않겠습니까?”라 하였다.
생각해보면, 선생의 빛나는 덕업과 학문은 진실로 정사의 흥폐와 관련이 없고, 삼가 이요당에게 보낸 편지를 살펴보면 ‘꽃과 대나무를 심고 못을 파서 물을 끌어들여 마음을 탁 터놓고 세월을 보내는 바탕으로 삼았고, 이때 계정에 가서 배우고 질문하여 깊이 자득하고 한가로이 스스로 즐거워하였으며 마침내 만년에 귀의처로 삼았다.’고 말하니 이곳 터와 이곳 당(堂)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