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즉위한 일본의 효덕천황은 실권자인 중대형 황자와 자신의 누나인 황극천황(중대형 황자의 어머니)이 협의하여 임명해 놓은 천황이었다.
말하자면 바지사장이었다. 이름만 천황이었던 효덕천황에게 실권자 중대형 황자가 어느날 나니와(難波, 지금의 오사카)에서 아스카(飛鳥)로 도읍을 옮겨가자고 하였다. 효덕천황은 이를 거부함으로써 큰 파란이 일게 되었다.
중대형 황자가 퇴위해 있던 어머니(황극천황)와 누이인 간인황후(효덕천황의 비)를 데리고 함께 아스카로 떠나가 버린 것이다. 다른 신하들도 명목상의 천황인 효덕을 버리고 중대형 황자를 따랐다. 버림받은 효덕천황이 향가 한 편을 만들어 아내에게 보냈다. 이 작품은 향가가 무엇인지 그 본질을 명확히 드러내 보이는 작품이다. 작품을 향가창작법으로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舸 娜 紀 都 該 阿 我 柯 賦 古 / 磨播比 枳 涅 世儒 阿 我 柯 賦 古 / 磨 乎 比騰 瀰 都 羅 武箇. “큰 배에 실린 짐 중 실 한 오라기 정도만을 세금으로 거두어들이자고 하였음에도, 모두가 중대형 황자에게 알랑거리며 온갖 세금을 매겨대더라. 삼나무를 물에 불린 다음 돌로 두드려 몹쓸 껍질은 버리고 좋은 것으로만 골라내 삼베 실을 뽑아내자고 하였음에도, 모두가 중대형 황자에게 알랑거리며 곡식 한 포기도 자라지 않는 갯땅에까지 세금을 매겨대더라. 삼나무를 물에 불려 돌로 두드려 삼베 실을 뽑아내는 것처럼 모두들 모여 나와 함께 일하자고 하였어도, 세차게 흐르는 물에서 나 혼자 그물질해야 하더라”
■일본인들은 이 작품을 다음과 같이 풀고 있다. 앞의 풀이와 비교해 보시기 바란다. “도망 못 가게 머리에 나무를 붙인 내가 기르던 말은 어찌 되었나. 마구간에서 꺼내지도 않고 소중히 기르던 말을 어찌하여 타인이 보았을까”
■지난 천년 간 일본인들이 고심을 거듭한 끝에 풀어낸 위의 결과는 효덕 천황이 버림받았다는 일본서기의 내용과 전혀 연결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엇인가 되게 잘못되어 있다. 효덕천황은 실권자 중대형 황자의 건의를 거부했다가, 모두가 자기로부터 떠나는 사태를 맞았다. 바지사장이 자기가 주인 행세를 하려 했으니 진짜 주인이 가만 있을 리가 없다.
작품을 살피면 효덕천황은 신하들에게 세금 감면이라는 달콤한 꿀을 제시하면서, 중대형 황자를 따르지 말고 자기와 함께 하자고 하였다. 중대형을 고립시키려는 책략이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중대형 황자였다. 자신을 따를 자와 효덕을 따를 자, 선택하라면서 아스카로 가버린다. 결과는 모두가 중대형을 따랐다. 왕따가 된 효덕천황이 또다시 수단을 동원하였다. 보복을 비는 향가를 만든 것이다.
‘나의 원한이 후손들에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도록(古=十+口=십대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 해달라’고 천지귀신에게 빈 것이다.
효덕천황은 이 작품을 만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사망(654년)하고 말았다. 죽음을 앞두고 만든 작품임이 분명하다. 문제는 그가 향가 속에 담아놓은 저주의 문자(古)가 훗날 현실화 되었다는 데 있다. 저주가 사람들을 들쑤시고 다녔다. 그가 죽은지 19년이 지났을 무렵 일본 고대사 최대의 난인 ‘임신의 난’이 발발하고야 말았다. 중대형 황자의 아들 홍문(弘文)천황이 반란을 일으킨 숙부에 의해 목이 베이고 황위까지 찬탈 당하고 말았다. 고대 일본인들은 효덕천황이 죽기 전에 만든 향가가 비극적 결과를 빚어내었다고 굳게 믿었다.
향가는 우리가 알고 있는 단순한 서정시가 아니었다. 작자의 소원을 이루어주는 주술가였다. 이것은 향가의 본질이다. 이를 알아야 ‘신라인들은 향가를 숭상했다’고 하는 저 유명한 구절의 뜻을 이해할 수 있다. 향가는 일본에서도 한반도에서도 가공할 마력을 가진 노래로 숭상받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