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지역균형발전특별위원회가 지난 8일 대구 엑스코에서 대구·경북 공약 보고회를 갖고 15대 정책 과제를 공개했다. 경북 관련 15대 정책과제 중 경주에는 SMR 특화 국가산업단지, 원자력안전위원회 경주 이전, 글로벌 원자력 공동캠퍼스 등 원전 관련 공약이 반영됐다. 또 국립탄소중립에너지 미래관 설립, 입자빔 기반 산학연 R&D 통합지원센터 설립, 미래차 전환기술 실증지원 플랫폼 구축, 천년 신라왕경 글로벌 디지털 복원, 디지털 세계문화유산관 건립 등이 정책과제에 들어갔다. 그리고 2025 APEC 정상회의 경주 유치도 포함돼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이들 사업들이 정책과제에 반영됨에 따라 향후 원전 관련 산업과 미래자동차산업 등의 추진에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재 100MeV에서 단계적으로 200MeV, 1GeV로 성능 향상을 위한 양성자가속기 2단계 사업은 정책과제에 포함되지 않았다. 대신 ‘입자빔 기반 산학연 R&D 통합지원센터 조성사업’이 포함돼 가속기 기반 첨단산업단지 조성으로 자동차·반도체 기술고도화를 통해 주력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한다는 계획이다. 양성자가속기는 중저준위 방폐장 유치지역 지원사업으로 국비 1836억원, 자자체 1180억원, 민간 125억원 등 총 3143억원을 투입해 건천읍에 44만㎡ 규모로 지난 2012년 조성됐다. 100MeV 성능의 양성자가속기를 완공하고 2013년부터 본격 운영에 들어갔다. 이어 2단계 사업은 2600억원을 투입해 2023년부터 2027년까지 5년간 이미 확보된 부지 약 3만2310㎡에 성능이 향상된 200MeV의 양성자가속기를 구축할 계획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2012년 1단계 사업 완료 후 지금까지 정부의 국정운영 계획에 포함되지 않으면서 2단계 사업추진은 지지부진한 상태다. 이런 가운데 이번 인수위 지역균형발전특위가 발표한 공개 자료에는 양성자가속기 2단계 사업이 포함되지 않으면서 많은 시민들이 의아해하고 있다. 경주시는 인수위 지역균형발전특위가 발표한 자료에는 전체 공약이 포함돼있지 않고, 또 관련한 사항들은 일절 함구하고 있어 구체적인 사실은 확인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국책사업으로 추진된 양성자가속기 사업이 그동안 눈에 띄는 성과가 없어 시민들로부터 외면 받아 왔다. 경주시와 정치권이 정책과제 포함과 관련한 진위 파악과 함께 2단계 사업이 제대로 추진될 수 있도록 역량을 모아야 하는 이유다.
경주시가 유니세프로부터 아동친화도시 인증을 받았다. 지난 1월 여성가족부와 여성친화도시 지정 협약을 체결한데 이어 이번에 아동친화도시 인증으로 여성과 아동, 노인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도시를 만들어나가는 골격을 갖추게 됐다. 아동친화도시는 18세 미만의 모든 아동이 유엔 아동권리협약에 따라 4개 권리(생존·보호·발달·참여권)를 누릴 수 있는 지역을 말한다. 아동보호 전담기구 설치, 관련 예산 확보 등 10개 구성요소를 모두 충족시켜야 심사를 통과한다. 경주시는 지난 2019년 5월부터 아동친화도시 인증을 위해 아동권리전담부서 신설, 아동친화적인법체계정비, 아동참여체계운영, 아동권리교육 및 홍보 등 10개 구성요소 이행을 위해 노력을 기울여왔다. 또 경주시가 도내 최초로 외국인 아동 보육료, 영유아ADHD 검사비 지원, 다함께 돌봄센터 확충, 주민참여형 어린이놀이터 조성, 아동권리옴부즈퍼슨 운영 등 다양한 아동친화사업을 추진한 것이 높은 평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니세프의 인증이 곧바로 아동이 살기 좋은 도시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근래 들어 ‘정인이 사건’ 등 여러 건의 아동학대 뉴스가 국민을 분개하게 만들었다. 이들 사건은 아동친화도시를 무색하게 만드는 것들로 상식을 벗어나는 일들이 종종 있다. 시의 여러 정책과는 별개로 실생활에서는 아동 인권이 쉽게 무시되고 안전 측면에서도 제대로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 만큼 아동친화도시는 이를 잠재울 수 있는 대안이 돼야 한다. 아동친화도시와 여성친화도시 인증으로 시민 누구나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경주로 나아간다면 도시 경쟁력은 상승하고, 인구 증가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시는 이번에 아동친화도시 인증을 받은 만큼 이제 실제로 아동이 행복할 수 있는 여건 마련에 나서야 한다. 민관이 협력해 관련 정책을 발굴하고 시행하는 것은 물론이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길지도 모르는 아동학대 예방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초·중·고·대학 그리고 직장생활, 결혼과 자녀양육 … 참 바쁘게도 살았다. 휴~ 무엇을 위해 내달렸던가? 왜 사는가? 피로스는 그리스 북서부 산골 마을 에페이로스의 왕이었지만, 강대국 마케도니아를 물리치고 로마 본토까지 쳐들어갔다. 출정을 앞두고 참모 키네아스가 피로스 왕에게 물었다. “전하, 이번 로마에 출정해서 승리를 거두면 그 다음엔 뭘 하실 건가요?” 피로스가 신이 나서 말했다. “그 다음엔 이탈리아 정복이지!” 키네아스는 잠깐 뜸을 들였다가 다시 물었다. “이탈리아도 정복하면요?” “그 다음엔 시칠리아가 기다리고 있지.” “그럼 시칠리아까지 정복하고 나면 전쟁은 끝나겠네요?” “아니지, 그 다음엔 지중해를 건너서 카르타고로 가야지” 이 말을 들은 키네아스는 감동한 듯 말했다. “와, 그럼 세계를 정복하는 거네요? 세계를 정복하고 나면 뭘 하실 건가요?” 피로스는 만족한 듯 대답했다. “그 때는 편히 쉬어야지” 키네아스는 마침내 조심스럽게 한마디 했다. “전하, 편히 쉬는 거라면 지금도 할 수 있지 않나요?” 피로스는 키네아스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끝내 로마 원정을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스스로의 몰락을 자초했다. 역사상 가장 싸움을 잘한다는 피로스 왕의 이야기다. 그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는데, 자신이 왜 싸우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전투에 이기고도 지는 상처뿐인 영광을 ‘피로스의 승리’라고 한다. 혹시 우리들의 현역시절도 수단과 목표가 뒤바뀐 ‘피로스의 승리’는 아니었을까? 치열한 경쟁과정에서 진정한 목표는 잊어버리고 헐떡대기만 했다. 결국 은퇴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어, 내가 왜 이렇게 살아왔지?’라고 깨닫게 된다. 이 시대의 초보노년들. 그들은 대부분 앞만 보고 달려왔다. 학업과 취직, 승진, 가족 돌보는데 청춘을 쏟아 부었다. 틈틈이 취미와 여가를 즐겼다고는 하나 온전히 자기 자신만을 위한 시간은 없었다. 정말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살아왔다. 단지 경쟁하면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다. 숨 막히게 질주하다가 이제 은퇴해서 사막 한가운데에 선 낙타 신세가 되었다. 세상풍파를 겪으면서 빗줄기는 굵어지고 축축한 옷은 납덩이처럼 무거워졌다. 불나방이 불빛만 쫓듯 살아오다 그 열기에 몸이 타들어간다. 은퇴했지만 뒤로 물러나서 하늘의 명을 기다릴 형편은 아니다. 아직 살아갈 날이 많다. 그래서 많은 노년들이 다시 일자리를 찾아 떠도는 ‘노마드족’이 되기도 한다. 누군가 “안 바쁘지요? 저녁에 술 한 잔 해요.”라고 하면 그저 서글퍼진다. 이들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왜 노년을 살고 있는가? 우리는 지금 우리의 삶을 그 자체로 사랑하고 즐기는가?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알고 있고 그 목적과 의미대로 살고 있는가? 진정 어떤 모습으로 살다가 생을 마감할 것인가? 60~70대는 인생을 진정한 목적과 의미대로 새롭게 살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기다. 이보다 더 좋은 시기가 어디 있겠는가? 인생이라는 것이 뭔지를 아는 시기이며, 나대로의 삶에서 진정한 멋이 나오고 귀가 열리고 눈이 뜨이는 시기다. 6070세대여, 다시 일어나라! 죽을 때 못해본 것들 때문에 ‘걸, 걸, 걸’하면서 죽을 수는 없지 않는가?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그것이 어렵다고? 그렇지 않다. 마음을 바꾸면 한순간에 달라질 수 있다. ‘지극히 어려운 것은 지극히 쉬운 데서 나온다’는 채근담의 이야기를 참고하자. 어느 날 거지 성자가 동냥 그릇을 챙겨 들고 강가로 나갔다. 강가에 도착하여 동냥 그릇으로 막 물을 뜨려는 순간 어디선가 개 한 마리가 나타나 쏜살같이 달려오더니 거지 성자를 뛰어넘어 물을 마시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거지 성자가 혼잣말을 했다. “세상에! 나는 무엇 때문에 지금까지 이 그릇을 들고 다녔지? 저 개가 나보다 훨씬 낫구나!” 거지 성자는 동냥 그릇을 강에 버리고 개가 물을 먹는 것처럼 물을 마셨다. 그 이후로 거지 성자와 개는 친한 친구 사이가 되었다.
경북도가 추진하고 있는 동해안 원자력 거점 조성계획이 새 정부 110대 국정과제에 포함돼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지난 3일 발표한 110대 국정과제에 ‘탈원전 정책 폐기, 원자력산업 생태계 강화’가 포함됐기 때문이다. 경북도는 윤석열 대통령 당선 확정 후 인수위에 원자력 주요 사업을 건의하고 소관 중앙부처를 방문해 설명하는 등 활동을 펼쳐온 결과 국정과제에 반영되는 결실을 거뒀다. 경북도 전체로 보면 신한울 3·4호기 건설 및 기존 원전 계속 운전, 소형모듈원자로(SMR) 시장 선점 등이 눈에 띈다. 경주지역에는 SMR 특화 국가산단 유치, 글로벌 원자력 공동캠퍼스 조성, 국립 탄소중립 에너지미래관 설립, 원자력안전위원회 이전 등이 추진될 예정이다. 이를 통해 탈원전 정책으로 침체됐던 원전기술 연구개발, 원전 산업계 일감창출, 인력양성 활성화 등 원전 생태계의 경쟁력이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SMR 특화 국가산단’은 SMR 상용화를 통한 수출 공급망 확보를 위해 추진하는 사업으로 향후 경주가 이 분야 핵심 거점이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이미 경주에는 소형모듈원자로(SMR)의 연구·개발을 주도할 문무대왕과학연구소를 조성 중에 있다. 이 사업을 주관하는 한국원자력연구원에 따르면 연구소 내에는 연구기반시설과 연구지원시설, 지역연계시설 등 총 16개 시설이 구축될 계획이다. 지난 2021년 7월 착공해 2024년까지 일반시설, 1년 뒤인 2025년 말까지 원자력 시설을 준공해 전체 단지를 완성한다는 계획이다. 그리고 연구소가 본격 운영되면 한국만의 독자적인 소형 및 초소형 원자로 개발을 주도하게 된다. 또 연구소의 운영으로 경주는 이미 자리 잡은 한수원, 원자력환경공단, 원전현장인력양성원, 양성자가속기 등과 함께 원자력 연구·실증·산업화의 전주기 기술 생태계가 완성된다는 것이다. SMR은 300MW(메가와트) 이하의 소형 원자로로, 현재 가동 중인 원자력발전소 전기출력 1000~1400MW에 비해 규모가 작다. 증기발생기와 가압기, 냉각재펌프 등 주요 기기가 크고 작은 배관으로 연결된 기존 원전과 달리 이 기기들이 모두 하나의 압력용기 안에 들어가는 일체형 원자로다. SMR은 배관 사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없애 대형 원전 대비 안전성을 크게 높인 것은 물론, 공장에서 제작된 원자로 기기들의 현장 조립이 가능해 호기 당 건설비용이 적다. 특히 SMR의 가장 큰 장점은 다양한 용도로 활용 가능하다는데 있다. 세계적으로 500여기에 달하는 500MW 이하 노후 원전과 노후 화력발전소를 대체해 탄소중립과 기후변화 대응에 기여할 수 있고, 전력 생산 외에도 수소 생산과 수소 환원 제철, 해수 담수화, 초대형 선박과 극지 탐험 및 우주 탐사용 동력원 등으로 다양하게 활용 가능하다. 하지만 청사진만 있는 것은 아니다. SMR 건설 관련해 수용성 문제가 벌써부터 나오고 있어서다. 실제로 지난 3월 새 정부의 에너지정책을 맡았던 주한규 서울대 교수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충남 당진 등 기존 석탄화력발전소가 있던 지역에 SMR을 지으면 된다는 입장을 밝혔는데, 이에 대해 시민단체 등이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당시 당진환경운동연합은 “지역의 피해는 아랑곳하지 않고, 석탄발전 부지에 핵발전소 지으면 된다는 망언은 그간 수도권을 위해 묵묵히 고통을 감내해온 당진시민을 두 번 죽이는 파렴치한 짓”이라며 “당진은 수도권의 식민지가 아니다”고 비판했던 것이다. 기후위기비상행동 등 환경단체들도 ‘석탄발전 이후, 핵발전(SMR)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는 등 논란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경주에 건설 중인 문무대왕과학연구소가 본격 운영돼 SMR 기술이 상용화된다 하더라도 안전성과 주민수용성 문제 등으로 갈등이 발생할 여지가 눈에 선해 보이는 대목이다. 원전 관련 전문가들은 연구소는 전기출력 수십 메가와트 규모의 초소형 SMR 원자로를 이용해 기술을 실증하는 순수 연구개발 시설이라고 강조한다. 상시로 전력을 생산하는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연구개발 과정에서 일부 방사성 물질이 사용되지만 그 양이 많지 않고 원자력안전위원회 등 정부와 관련 기관의 철저한 검증 과정을 거치게 돼있어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한 노력이 우선돼야 한다. 거액의 예산을 투입해 연구시설을 조성해놓고도 정작 SMR을 설치할 곳이 없다면 연구소도 무용지물에 불과할 뿐이다. 지금이라도 연구소 건설과 운영 등 사업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신뢰를 쌓아나가야만 미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하길 바란다.
기림사 홈페이지와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발간한 『문화 원형 백과』를 중심으로 이 절의 창건설화를 간추려 본다. 옛날 인도 범마라국이라는 나라에 임정사(林井寺)라는 사찰이 있었다. 이 절에 광유성인(光有聖人)이라는 도인이 어느 날 제자들을 모아 놓고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내가 전생에 부처님의 제자로 있을 때 파사익왕의 세 시녀가 한결같이 부처님과 그 제자들을 공양했다. 제자 중에는 인물이 출중한 스님이 한 분 계셨는데 시녀들이 그 스님과 그만 사랑에 빠져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게 되었다. 스님은 여인들의 유혹을 제도하려 했으나 여의치않아 산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스님은 세 여인을 잊지 못해 번민하다가 결국 도를 이루지 못한 채 입적했다. 나는 그때 그 스님의 도반이었는데 먼저 도를 이루는 사람이 서로 제도키로 약속을 했었다. 이제 금생의 인연이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도반인 그 스님과 세 시녀를 제도하려 하니 누가 그 사람들을 이곳으로 안내하겠느냐?” 그때 승열 비구가 나섰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오, 장하구나. 너라면 능히 할 수 있으리라, 그 스님은 금생에 수다라라는 나라의 왕이고 왕후와 후궁은 전생의 시녀이니라” “한 명의 시녀는 어디 있습니까?” “곧 왕의 아들로 태어나 스스로 여기 올 것이니라. 세 명을 한 번에 모시기는 어려울 테니 먼저 후궁인 월애 부인을 인도토록 해라” 승열 비구가 수다라국에 도착했을 때 왕은 궁녀들과 강가를 거닐다가 숲속에서 잠이 들었다. 그때 궁녀들은 좌선에 든 스님을 발견하고는 다가가 물었다. “어디서 오신 누구신지요?” “나는 범마라국 임정사에서 온 승려입니다” 이때 잠에서 깨어 이를 목격한 왕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소리쳤다. “너는 누군데 궁녀들을 유혹하느냐?” 왕은 불개미 집을 헐어서 승열 비구의 몸에 풀어 놓았다. 그런데 불개미는 스님을 물지 않고 모두 흩어졌다. 이에 왕은 스님이 예사로운 분이 아닌 줄 알고 궁중으로 정중히 모셨다. 이후 스님은 궁중에서 1년간 왕과 왕비, 후궁들을 교화했으며 수다라 왕국에 최초의 절 범승사를 세웠다. “이제 그만 임정사로 돌아가야겠습니다” 얼마 후 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스님은 떠날 채비를 하면서 월애 부인을 모시러 온 뜻을 밝혔다. 왕은 보내기 아쉬웠으나 월애 부인이 선뜻 나서니 어쩔 수 없었다. 이후 임정사에 온 월애 부인은 광유성인의 제자가 되어 열심히 정진했다. 어느 날 광유성인은 승열 비구에게 다시 수다라국에 가서 왕과 왕비를 모셔오도록 일렀다. 스님이 수다라국에 오자 백성들까지 크게 영접했다. “월애 부인은 대왕이 오셔서 함께 공부하길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왕이 도착하기 전 도를 얻고 사바의 인연을 마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슬피 탄식했다. 그러나 승열 비구로부터 전생 이야기를 들은 왕은 참회하면서 왕비와 함께 광유성인에게 가기로 결심하고 왕위를 태자에게 물린 뒤 임정사를 향해 길을 떠났다. 만삭의 몸으로 길을 나선 왕비는 중도에 지칠대로 지쳐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대왕이시여! 전생의 숙업인 듯하오니 저를 여기서 종으로 팔아 그 대가를 임정사 부처님께 올려 다음 생에 다시 공부하도록 빌어주십시오” 더 이상 발걸음을 옮기기도 힘이 들어 하는 부인을 왕도 어쩔 수가 없어 눈물을 흘리며 부인을 두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대왕이시여! 아기를 낳으면 이름을 뭐라 할까요?” “아들이거든 안락국이라 하고, 딸을 낳으면 안양이라 하여 주오” 부인과 작별한 왕은 광유성인의 제자가 되어 세속 일을 잊고 정진에 몰두했다. 그렇게 7년이 되던 어느 날, 임정사로 한 남자아이가 왕을 찾아왔다. 원앙 부인이 낳은 태자 안락국이었다. 반갑게 상봉한 부자는 함께 공부했다. 수다라왕이 열반에 들자 광유성인은 안락국에게 전생 이야기를 들려주며 일렀다. “안락국아, 너는 인연지를 찾아가서 중생을 교화 제도하거라. 그 인연지는 여기서 2백 50만 리 떨어진 해동국인데 그곳엔 문수보살이 부처님의 부촉을 받고 계신다” 광유성인의 지시에 따라 해동 계림국에 도착한 안락국은 명당을 찾아 절을 지어 임정사라고 했다. 절이 창건된 지 150년 후, 원효대사가 이 절을 확장하고 절 이름을 기림사라 고쳤다. 달마스님 말씀으로 전해 오는 『혈맥론(血脈論)』에 이런 구절이 있다. 廣學多智 神識轉暗(광학다지 신식전암) 즉 ‘널리 배우고 아는 것이 많으면 오히려 자성이 어두워진다.’는 것이다. 이런저런 문헌을 뒤적이며 창건설화를 적고 나니 오히려 기림사가 더 멀어지는 느낌이다.
올해 부처님은 일요일에 다녀가셨다. ‘왜 하필 일요일이냐!’고 직장인들의 투정 어린 원성도 있었다. 늦었지만 부처님 오신 날을 다시 거론하는 이유는 그 의의가 특별하기 때문이다. 진리란 뭘까? 한 번에 깔끔하게 정의 내리기는 어렵지만, 얼핏 생각에도 몇몇의 조건들이 떠오른다. 먼저 시간적 조건이다. 과거엔 그랬는데 지금은 아니다? 그럼 진리일 수 없다. 옛날엔 몸속 벌레를 없애려고 일부러 담배를 피웠다는데, 지금의 과학 상식으로 보면 정말이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이야기다. 그래서 과거에도, 현재에도, 나아가 미래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그 무엇이어야 진리다. 장소도 불문이다. 우리가 사는 아시아나 저 멀리 유럽이나 아프리카나 어디서든 똑같이 유효해야 한다. 당연히 누구에게나 적용되어야 한다. 왼손잡이, 당뇨병 환자라서 안 된다면 진리일 수 없다. 이상의 시간적·공간적·대상적 엄격성으로 진리를 불변성(不變性)으로 요약해도 되겠다. 유한한 삶을 사는 우리의 염원은 그래서 불변(不變)과 영원(永遠)함이다. 우리에게 진리는 그렇다. 무엇보다 나를 통해 반복 검증이 가능해야겠다. 죽음이 그래서 학문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거다. 지구 상에 “어제 모처럼 죽어봤는데 좀 힘드네...” 이런 이야기 하는 사람은 없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도 엄격히 따지면 타인의, 간접적인 경험일 뿐이다. 우리는 죽거나 살아있거나 둘 중 하나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는 그럼 뭔가? 간단한 동작으로 한번 알아보자. 일단 고개를 좌에서 우로 돌려보면 뭐가 보이는가? 지금 글을 쓰는 내 눈에는 저기 저 도자기로 만든 코끼리 한 쌍이 보인다. 어머니가 “이거 놔두면 부자 된다”시며 기어이 놓고 가신, 그때의 추억이 문득 떠오른다. 고개를 돌려보니 하얀색 무릎 히터가 보인다. 진작 잘 닦아서 창고에 넣었어야 하는데 귀찮아 아직도 저렇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또 고개를 돌리니 창문 너머로 226동 아파트 옥상이 보인다. ‘저긴 남향이라 우리보다 햇빛이 잘 들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 일상적이고 평범한 이 세 가지 경우 뒤에 놓인, 이를테면 법칙을 찾을 수 있을까? ‘나’라는 인식 주체, 인식대상, 그리고 그 사이를 채우는 인식 내용이 반복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이들의 역할 관계를 이렇게도 비유한다. 주체라는 한 손바닥이, 대상이라는 다른 손바닥과 부딪치니(만나니), 원래 없던 (박수)소리가 짝! 하고 난다고. 이 세 가지 조건이 갖춰질 때 ‘마음’이 완성되는 것이다. 적선(積善) 행위를 복을 짓는 텃밭이라고 복전(福田)이라고 표현하듯, ‘마음자리’라고도 한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불변의 진리다. ‘진리가 뭐가 그리 심심하고 평범해?’ 하겠지만, 잘 살펴보면 오싹해질 거다. 인식 주체, 대상, 그리고 내용이라는 조건을 벗어난 행동은 하나도 없다. 보고, 듣고, 화내고, 상상하고, 행복해하는 우리의 모~든 행동 그 이면에 이 마음이라는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다. 그 예외 없음을 손오공 버전으로 ‘부처님 손바닥’이라고도 한다. 내 왼쪽 가슴에 있는 게 마음이 아니다. 마음은, 나를 둘러싼 인식 공간 전체다. 인식의 장(場)이 마음[一心]이다. 마음이라고 불리는 이 불변성을 알면 부처고, 모르면 중생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편의상 구분일 뿐이다. 알고 모름의 차이만 있지 여전히 마음은 작용 중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마음을 ‘활짝 열려 있는 비밀’이라고도 한다. 불변의 마음자리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비밀이지만 아는 사람에게는 그걸 증명할 기회가 24시간 일 년 내내 열려있기 때문이다. “개한테도 불성(佛性)이 있다”고 한 것도 진리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기 때문이다. 자, 부처가 되고 보니 기분이 어떠신가? 아무런 감흥이 없을 것이다. 진리는 나와 단 1초도 떨어져 본 적 없지만, 문제는 이 사실을 우리가 잘 까먹는다는 데 있다. 당장 내일 아침이면 또 잊어버린다. 올해도 어김없이 부처(如來)는 이 땅에 오셨다. 너무 가까이 있어 오히려 잊어버린 마음자리 환기하러 말이다. 잊었던 걸 되찾았으니 이제 우린 다시 태어난 셈이다. 부처님 오신 날은 지났지만 어디 가까운 절에라도 한번 가보시길 권한다. 이미 다녀가셨다는 부처님은 사실 나이기 때문이다.
봉지 박라연 허탈할 때 뭔가 가득 찰 때도 들어갑니다 따뜻하기도 하고 서늘하기도 하죠 섭섭한 대로 봉할 수 있어서 다시 풀 수 있어서 늘 희망적입니다 얼굴이 없으면 싶을 때도 들어갑니다 우리 나중에 봐요,라는 공간을 선물합니다 귀함을 넣어 좋은 이에게 배달하거나 처마에 매달아둘 때 세상은 더욱 눈부시죠 세상이 사라져버렸음 싶은 이유들이 한꺼번에 울 때 그 울음을 싸서 감아주는 이름입니다 울음소리에 놀란 산과 하늘과 바다도 도리없이 들어갑니다 당신도 상처 몇됫박쯤 잘 싸서 넣어보세요 어둠을 곱씹으며 아물던 상처가 봄의 입구 쪽으로 귀를 놓을 것입니다 -몽상과 치유의 거소, 봉지 봉지(封紙)는 말 그대로 “종이나 비닐로 물건을 담을 수 있게 만든 주머니”이다. 그러나 그 흔하디 흔한 ‘봉지’가 한 편의 시 속에서 얼마나 크고 아름다운 몽상과 치유의 숨결로 이루어진 공간인가를 알게 한다. 그렇다. 봉(封), 하고 발음할 때 그 말은 얼마나 아늑한 부피의 숨결을 가지는가. 허탈과 충만이 다 봉지에 들어갈 이유(“허탈할 때/뭔가 가득 찰 때도 들어갑니다”)가 된다. 전자가 피신과 치유의 공간이라면 후자는 몽상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따뜻하기도 하고 서늘하기도” 한 거기에는 고즈넉한 닫힘이 끝나면 언제든 열림(“다시/풀 수 있어서 늘 희망적입니다”. “우리 나중에 봐요,라는 공간”)을 예비하는 넉넉함이 있다. 그만큼 봉지는 내밀함의 공간이며 누구에게는 열리지 않는 거소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굳이 자물쇠와 열쇠로 닫고 열 필요는 없다. 자괴의 순간(“얼굴이 없으면 싶을 때”)에도 우리는 그 속에 들어가 은신하며 숨을 돌린다. 그러나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비밀이 들어갈 때 봉지는 신비롭다. 거기에는 셀 수도 없는 많은 꿈들이 저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때로 봉지는 가늠할 수 없는 값어치(“귀함”)를 넣어 좋은 이에게로 배달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비밀이 들어간 봉지의 신비는 “처마에 매달아둘 때 세상”을 눈부시게 한다. 봉지의 기능과 몽상이 최대치로 발휘되는 순간은 “세상이 사라져버렸음 싶은 이유들이 한꺼번에 울 때” 천지에서 가장 격렬한 슬픔에서 터져나오는 그 울음을 감아주는 것에 있다. 놀라워라. 그 때 “울음소리에 놀란 산과 하늘과 바다도/도리없이 들어”가 슬픔의 격류에 휩쓸린 자아를 위무한다는 것. 봉지는 우주를 껴안아 응축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 작은 봉지에 대자연이 따라 들어와 치유에 동참한다. 어느 경우이든 닫힌 봉지에는 열린 봉지보다 더 많은 것들이 들어 있다. 하여 시인은 넌지시 우리에게 건넨다. “당신도 상처 몇됫박쯤 잘 싸서 넣어보”라고. 그 숨결에 쌓여 있으면 상처도 “봄의 입구 쪽으로 귀를 놓”고, 우리를 세상의 질서 속으로 흐르게 한다고. 봉지의 기능과 비밀의 심리학이 상동관계가 있다는 한 편의 시를 읽는 기쁨이 크다.
경북문화관광공사 지난 5일 보문관광단지 내 수상공연장에서 개최한 ‘화랑 무예 아트 페스타 2022’ 행사가 성황리에 마무리됐다. <사진> 이번 행사는 문화관광 콘텐츠 발굴 및 육성을 통해 지역 관광 활성화와 코로나로 지친 시·도민 및 관광객들에게 활력을 불어넣고자 마련한 특별 기획 프로그램이다. 불교무예인 선무도의 오체유법 시연과 천명과 충이라는 주제의 택견공연, 무의단공의 반태술 시연, 산중무예 기천문의 유려한 검술시연이 이어졌다. 특히 마지막으로 특별 출연한 대경대 태권도 시범단 30여명의 절묘하고 화려한 액션과 펴포먼스에 관람객들의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이날 행사는 대구 캠프헨리 주한미군 등을 포함해 약 1500여명의 관광객이 공연 관람과 어린이날 페이스페인팅, 무예체험 등 부대행사에 참여했다. 공사는 홍보기념품으로 마스크 스트랩과 마스크를 등을 준비해 코로나로부터 안전한 행사 진행을 유도했다.또 공사는 한국전통무예총연맹으로부터 스포츠 관광마케팅과 문화관광 콘텐츠 활성화의 공을 인정하는 감사패를 받았으며, 앞으로의 지속적인 협력방안도 논의했다. 공사 김성조 사장은 “약 2년만에 보문관광단지에서 행사가 개최돼 관광객과 함께하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며 “경주에서 화랑 무예라는 문화관광 콘텐츠가 더욱 활발하게 활성화 될 수 있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밝혔다. 한편 보문관광단지에서는 현재 매월 1일부터 15일까지 ‘다같이 돌자 보문한바퀴’ 힐링걷기 이벤트가 진행 중이다.
경주시는 가정의 달을 맞아 ‘청소년오케스트라 가족사랑버스킹 공연’을 15일 오후 5시 청소년수련관 야외에서 진행한다. 이번 공연은 ‘Bravo, My Family’라는 주제로 위풍당당행진곡·Yesterday·어버이 은혜·스승의 은혜 등 우리 귀에 익숙한 음악을 통해 가족 사랑을 표현해 감동을 선사할 예정이다. 공연은 누구나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다. 야외 공연으로 진행돼 돗자리 등을 지참하면 더욱 편한 관람이 가능하다. 경주시 관계자는 “청소년오케스트라 단원들이 갈고 닦은 연주 실력으로 관람객들에게 힐링의 시간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편 경주시 청소년오케스트라는 음악에 대한 열정을 가진 지역 청소년들의 예술적 재능 계발과 건강한 청소년 문화 확산을 위해 지난 2010년 4월 창단됐다. 코로나19로 인해 활동에 제약이 많았지만 이번 공연을 계기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할 예정이다.
1965년의 대한민국은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 6.25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채 산하는 헐벗었고 도시와 농촌을 막론하고 실업자와 걸인이 넘쳐나는 시기였다. 국민의 절대다수가 가난에 시달렸던 반면 ‘베이비 붐’이라는 말이 증명하듯 책임 없이 싸지르는 아이들이 좁은 학교에 가득가득 넘쳐나는 시기이기도 했다. 키덜트 뮤지엄 김동일 관장이 ‘인생영화’로 꼽는 영화 ‘저 하늘에도 슬픔이’는 김수용 감독이 1965년에 만든 영화다. 내용은 그 시대를 반영한 전형적인 눈물샘 자극 영화다. 노름꾼인 아버지(장민호 분)는 넷이나 되는 아이들에 대한 책임감이 전혀 없다. 엄마는 그런 아버지를 견디지 못해 싸우고 집을 나갔다. 초등학교 4학년생 주인공 윤복(아역 김천만 분)은 그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여동생 둘과 남동생 하나를 지키기 위해 껌팔이, 구두닦이, 밥 구걸 등 하루하루 전쟁 치듯 살아나간다. 약할수록 그들을 못살게 구는 양아치 어른들과 비겁한 세상, 사회적 냉대는 더 큰 벽으로 묘사된다. 이런 윤복보다 더 불행한 아이들은 없지 싶을 만큼 어렵고 힘든 매일이 진행된다. 이 처연한 영화는 놀랍게도 이윤복(1953~1999)의 실제 수기 ‘저 하늘에도 슬픔이’를 영화화한 것이다. 그런데 김동일 관장이 의외의 말을 한다. “그 아이들은 그래도 나보다는 나은 편이예요. 비록 무능하고 무책임한 아버지이지만 그래도 기댈 언덕이 있었고 어머니가 돌아올 희망이라도 품고 있었잖아요!” 김동일 관장은 태어나고 100일 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초등학교 3학년 때는 어머니마저 돌아가셨다. “그때부터 삼촌과 이모네 집들을 전전했어요. 군식구를 돌봐 준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아무래도 자기 자식만 했을까요? 늘 야단맞기 일쑤였고 그로 인해 기죽어 사는 날이 대부분이었지요” 어릴 때부터 스스로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한 김동일 관장은 주인공 윤복이 그랬던 것처럼 친구들과 함께 껌팔이와 구두닦이 등 안 해 본 일이 없었다고 회상한다. 지금과 달리 어린이나 불우한 형편의 약자들에 대한 복지나 생활 지원이 전혀 없던 시기, 김동일 관장의 어린시절은 냉대와 불안, 슬픔과 자괴감이 중첩되는 나날이었다. 그러나 ‘저 하늘에도 슬픔이’는 끝내 아픔과 슬픔만 주는 영화는 아니었다. 윤복은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하게 학교를 다녔고 배가 고파 죽을 고생을 하면서도 매일 일기를 썼다. 마침 그 일기를 이웃 반 김동식 선생님(신영균 분)이 읽고 서울의 출판사를 섭외해 책을 내도록 주선한다. 이 일화와 책이 신문지상에 소개되면서 윤복은 극적으로 가난에서 벗어나며 영화가 끝난다. 김동일 관장이 스스로 자립하고 자신의 인생을 성공적으로 이끈 것은 윤복보다는 훨씬 성인이 된 뒤다. 김동일 관장은 1979년, 25살 무렵 전격 서울로 상경해 이때부터 인테리어 방면의 사업을 시작해 성공가도를 달렸다. 특히 사업을 하면서 근현대 생활물품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수십만 점의 골동품과 생활용품, 세계 각국을 대표하는 시대적 기념품 등을 사모아 지금의 키덜트 뮤지엄을 만드는 초석을 쌓기도 했다. 어쩌면 김동일 관장이 그토록 많은 소장품을 가지게 된 것은 어린 시절 누리지 못한 물질에 대한 궁핍 때문은 아니었을까? “제가 이 영화를 본 것은 처음 영화가 나왔을 때가 아닙니다. 그때는 당연히 어릴 때고 영화 볼 여력이 있을 턱이 없었지요. 이 영화는 제가 완전히 독립한 1979년쯤에 처음 보게 되었지요. 울지 않으려 무척 애쓰면서 보았는데 어느 사이엔가 눈물·콧물이 범벅되어 있더군요” 이 영화는 특별한 기록으로도 우리나라 영화사에 길이 남을 영화다. 1965년은 우리나라 영화가 마지막 흑백영화를 찍던 해다. 1966년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컬러영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 이 영화는 1965년 당시 29만 명이라는 국내 영화사상 최고의 흥행을 기록했고 흑백영화 역대 최고 흥행을 기록하기도 했다. 1984년에는 김수용 감독이 동명의 아역배우 김수용과 서인석을 주연으로 다시 리메이크작을 만들었고 2007년 한명구 감독이 다시 한번 영화로 만들었다. 그렇게 자주 리메이크될 만큼 우리 심성의 저변을 깊이 매료시킨 영화인 것이다. “세월이 흘러 더 이상 제가 가난하지도, 우리 대한민국이 가난하지도 않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오히려 세계 최상위로 부강해졌지요. 어쩌면 영화 속 윤복이가 자신을 엄습하는 어려움을 매일 이겨냈듯 우리 국민들도 그런 강한 의지를 굳건히 가지고 있었기 때문 아닐까요?” 그래서라도 더욱 이 영화를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할 영화로 추천하고 싶다는 것이 김동일 관장의 설명이다. 소감을 듣는 동안 문득 영화 속 김동식 선생님처럼 어린 시절 김동일 관장을 안아주고 깊은 심정이 들었다.
왜국의 수뇌부가 나니와(難波, 지금의 오사카)에서 배를 타고 후쿠오카(福岡)로 향하던 중 661년 1월 14일 숙전진(熟田津)이라는 곳에 일시 정박하였다. 정월 대보름날 밤이었다. 그때 제명(齊明)천황이 지었다는 작품 하나가 전해온다. 많은 사람들은 이 작품이 출정 중에 만들어졌기에 한반도의 전쟁과 관련된 중요한 노래일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만엽집 연구자들과 한일 고대사 연구자들은 더욱 그러하다. 고대 한일 관계를 연구하는 사람치고 이 작품을 연구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 万葉集 8番歌 熟田津 尒 船乘 世武登 / 月待 者 / 潮 毛可奈 比沼 / 今 者許藝 乞 菜 “그대가 숙전진(熟田津) 나루에서 저승배에 오른다. / 달이 떠오르기를 기다리는데 / 밀물이 나란히 소(沼)로 밀려 들어온다. / 이제 그대가 편안히 저승에 가기를 빌리라”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천황가의 슬픈 가족사 하나를 소환해야 한다. 이 때로부터 3년 전인 서기 658년, 중대형 황자의 아들이자 제명천황의 큰 손자인 건왕(建王)이 7살의 어린 나이로 죽고 말았던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는 벙어리였다. 할머니 제명천황은 죽은 손자의 온순한 성품을 매우 사랑했었다. 그녀의 슬픔은 너무도 깊어 매일 매일 눈물에 젖어 살았다. ‘내가 죽으면 반드시 나의 무덤에 합장해 달라’고 신하들에게 명하기도 했다. 만엽집 8번가인 이 작품을 새로이 해독한 결과 뜻밖에도 제명천황의 손자 건왕(建王)의 죽음과 관련된 ‘눈물가’였다. 눈물가란 망자의 영혼을 편안히 저승에 보내기 위해 만드는 향가의 한 종류이다. 샤마니즘 시대 사람들은 인간이 죽으면 그의 영혼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저승으로 간다고 믿었다. 영혼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널 때 만일 달이나 별이 없으면 배는 어둠 속에 길을 잃고 헤매다 저승에 갈 수가 없게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날씨가 맑기를 기원했다. 그것은 향가의 힘에 의지해야 가능했기에 눈물가를 만들어 불러 주었던 것이다. 그 날 숙전진의 밤바다에는 밀물이 들어오고 어둠을 물리치는 정월 대보름 달이 둥실 떠오르고 있었다. 제명천황에게 환영이 보였다. 저승에서 온 배가 숙전진 나루에 와 닿았고, 손자 건왕이 저승배에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제명천황은 향가를 만들어 날씨를 맑도록 해 손자 건왕이 무사히 저승바다를 건너갈 수 있기를 빌었다. 손자는 할머니 천황의 배웅을 받으며 편안히 저승 그 머나먼 길을 떠나갔을 것이다. 백제로 가던 파병 전야, 고요한 바닷가 숙전진의 밤은 제명천황의 흐느낌 속에 깊어가고 있었다. 이 노래를 일본인들은 다음과 같이 해독해 오고 있었다. “니키타츠(熟田津)서 배를 출발시키려 달 기다리니 조수도 밀려왔네. 지금 저어 나갑시다” 일본인들은 이처럼 노래의 핵심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풀지 못하니 그들은 그들의 고대사를 일그러지게 알고 있다. 몰라서 잘못 알고 있는 이들에게 우리가 바르게 알라고 꾸짖어야 소용없다. 이제 우리는 만엽집 해독법을 가지고 있다. 대한민국인이 일본의 고대사를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 그것은 만엽집 해독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날이 멀지 않았다.
우리나라 대학 교양 교육 차원에서 지속가능발전교육(Education for Sustainable Development 이하 ESD)와 SDGs(지속가능발전목표) 교육 확산의 가장 기본적인 실천은 지속가능발전교육 관련 과목을 개설하고 점점 확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장기적으로 BUP처럼 교양학부나 교육대학, 대학원 과정에 ‘지속가능발전교육’을 하나의 모듈로서 구성하는 것으로 ‘지속가능발전교육’ 전공을 개설, 운영하는 방식도 고민할 수 있다. 기초과정에서는 ‘지속가능발전교육의 토대’, ‘지속가능발전의 문제와 지구적 학습’ 모듈을 포함해야 하며, 심화 과정과 전문화 과정에서는 ‘지속가능발전교육 직업실습’, ‘지속가능발전교육 견학’, ‘지속가능발전교육의 이론적 윤리적 토대’를 모듈로서 포함할 수 있다. 한국의 특수한 상황과 여건, 문화 역량 정도를 고려해야 하지만 전제는 대학 내 책임 있는 수행 주체의 확보와 함께 ESD와 SDGs 추진계획과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일본은 SDGs 대학센터가 이러한 역할 수행을 하고 있다. 대학센터는 해당 대학의 건학 정신, 가치와 지향을 지속가능발전과 연계시켜 확산하고 대학 성원(학생, 교수-교직원)과 타 섹터의 성장을 돕는 역할 수행을 한다. 센터는 지역의 지속가능발전 전략을 둘러싼 연구와 다양한 그룹의 의사결정 컨설팅, 정부(지방)와 주요 기관의 사회서비스 능력·실행을 지원한다. 지속가능발전 또는 SDGs 센터는 분과 학문 간 연계, 국내외 네크워크 간 연계(국내외 지속가능발전네트워크, UN대학, ESD 기관, ICLEI, 해외 대학, 대학 센터, 지속가능발전 학과, 연구소 등)를 통해 지속가능발전 커리큘럼의 혁신과 개발, 장기적으로는 전문적인 학위 프로그램(체계적인 커리큘럼, 교육과정, 복수 석사학위 프로그램)을 수립하고 제공해야 한다. ESD와 ESDGs에 대한 총체적 시스템 접근을 모색해야 한다. 따라서 대학 교육 리더 세미나(Education Leader Seminar)의 실행이 필요하다. 이 세미나는 교육 리더들에게 ESD와 ESDGs 정보를 전달하고, 동기를 부여하고 지속 가능한 지역사회와 학교시스템을 변화시키는 데 필요한 지식과 전략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리고 학교시스템의 일차적 기능이 교수와 학습에 있는 만큼 ESDGs를 위한 교수와 학습을 지원하기 위한 역량 구축이 세미나의 주된 초점이다. 이 세미나는 △대학의 수준에서 SDGs 이행과 실천에 대한 센터(대학)의 필요성을 이해하고 △대학 시스템의 모든 측면에 ESD를 통합하기 위한 변화관리전략을 개발하며 △SDGs를 실행하는 데 있어 리더로서 역할을 명확하게 하고 △동료 교수, 직원, 학생, 지역사회에 SDGs에 대한 이해 및 소통하며, SDGs와 관련된 자문과 지원, 그리고 아이디어를 위한 자원을 인지하게끔 해야 한다. 요크대학 지속가능아카데미(York University: The Sustainability and Education Academy: TSEA)의 ‘총체적 학교 접근(whole-school approach)’에서 제시된 ‘총체적 시스템 접근(whole-system approach)’은 대학 교육시스템 재정립에 기여할 수 있다. 이 영역 프레임워크는 ESD, ESDGs와 관련한 기관 내부의 기획과 실행 상황을 측정하고 실행하기 위한 틀을 제공한다. 진척 상황에 대한 점검을 통해 기관의 시스템 차원에서 추가적인 지원이 필요한 부문을 파악하고 성공적인 실천을 공유하는 쪽으로 활용될 수 있다. 대학 ESD, ESDGs 교육과정 설계와 이해당사자 그룹의 SDGs 이행실천을 위한 거버넌스의 구축과 세밀한 교육과정(교수/학습(학교 서비스)), 인적 역량 형성(인적 자원/직원 서비스), 시설(운영 서비스)과 파트너십(지역사회 지원 서비스)을 통합적으로 점검해야 한다. ESD, SDGs에 효과적으로 부합하는 교육시스템의 임무와 목표선언, 고위직 교육 리더들을 대상으로 한 ESD, SDGs 교육 프로그램 이수, 각자의 관할 영역에 있는 부서가 지속가능성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각 부서들의 교육 재정립 계획 수립, 다양한 교육연수 및 교육 프로그램에 ESD 정착지원, ESD, SDGs 교육 예산의 우선 순위화 등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할 것이다. 유엔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SDSN)는 대학이 SDGs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새로운 대학연구와 교육에 대한 수요확보, 대학 내부의 거버넌스 운영 및 혁신, 그리고 외부 협력체계 구축, 글로벌 대학 이미지·인지도·영향력 제고, 새로운 자금 조달 접근성 확보를 통한 대학 자립력 강화로 규정한다(SDSN, 2017). SDGs는 대학의 △교육 △연구 △대학 내부의 거버넌스 문화와 윤리 확산과 운영의 혁신 △사회적 공헌이라는 네 가지 측면에서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이를 나열하면 ‘대학 SDGs’는 첫째, 학제 간 및 학제 전반에 걸친 연구를 통해 대학과 사회의 혁신을 위한 솔루션을 제공할 수 있고, 둘째, 국제-국가-지역 차원의 정책 제언과 실행력을 확보함으로써 연구기관으로서 고유한 지위를 유지할 수 있고, 셋째, 기업, 지자체, 대학, 연구기관, 시민사회단체 등 다 부문적 협력을 통해 연구역량을 구축할 수 있고, 넷째, 지속가능발전을 위한 교육을 통해 대학 교양, 전공 교육의 다양화, 대학 교양교육의 목적 실현, 책임감과 능력을 갖춘 인재 양성, 역동적인 학생들이 주축이 된 SDGs 실천과 대학역량 강화에 도움이 되고, 다섯째, 고질적인 낡고 관료적인 대학 운영을 혁신하고 SDGs와 연계된 거버넌스 및 운영을 모색할 수 있고, 여섯째, 모든 대학의 혁신활동은 대학 보고서에 통합하여 평가를 받을 수 있고, 마지막으로 사회적인 공헌을 위한 다 부문적 참여와 대화, 그리고 행동을 통한 사회문제 해결의 중요한 기관으로서의 위상을 제고할 수 있다는 것이다. SDGs는 대학을 포함해 공식 교육 기관에서의 지속가능발전을 위한 교육을 방해하는 장애물(자금 부족, 동기부여의 결여)을 극복할 기회이다. 특히 자금 문제와 관련이 있다. 정부 기관, 국제 은행, 자선사업 기업가 같은 자금 조달자들은 SDGs의 성취와 관련된 사업을 지원한다.
-아이슬란드 캠핑장에 처음 천막을 치다 이곳엔 물가가 비싸고, 숙소가 적어 대부분 캠핑 생활을 합니다. 우리도 시내 가까운 「그린랜드 캠핑장」에서 수십 개의 텐트가 운집해 있는 한편에 처음으로 텐트를 쳤습니다. 젊은 학생들이 많고, 한국에서 온 대학생들도 보였어요. 다소 쌀쌀한 날씨 탓에 침낭, 공기부양 벨트, 그리고 내의에 덧옷까지 껴입는 등 잠자리에 신경을 써야 했습니다. 내일부터 시내 구경을 위해 잠을 자야 하는데, 쉽게 어두워지지 않는 백야의 나라라 자정을 넘었는데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요. 신기하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했습니다. -레이캬비크 시내중심에 있는 「할그림스키르캬」 교회 추운 지방이라 도시 분위기가 어둡고, 무거우리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사람들이 밝고, 평온합니다. 그리고 몸짓들이 가볍고 활기차게 보였어요. 도시 공간도 넓고, 녹지가 많아 평화롭고, 도로 상가에는 털옷, 인형, 기념품들이 많이 눈에 띄입니다. 도시 중심을 걷다 보니 맞은편 언덕에 높고 큰, 독특하게 생긴 교회가 있는데, 「할그림스키르캬」교회라고 합니다. 높이가 75미터 정도 흰색 건물인데, 형상이 분출되는 용암처럼 생겼어요. 가운데가 높이 치솟고, 좌우로 같은 높이로 점점 작아지며 오르간 건반을 세워 놓은 모습입니다. 1945년 짓기 시작하여 40여년 만에 준공했다고 해요. 교회 안에는 한쪽 벽 천정에 닿을 마한 큰 오르간이 자리하고 있는데, 높이 15미터, 무게가 25톤 정도 되는 대형 파이브 오르간 시스템입니다. 1992년 독일에서 제작 설치한 것이라고 합니다. 교회 이름이 부르기 복잡한데, 이 나라 최고의 시인이자, 성직자였던 ‘할그리뮈르 페테르손’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해요. 이 도시 최상의 트레이드 마크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교회 건물 앞에는 콜럼버스보다 500년이나 먼저 아메리카대륙에 갔다고 전하는 「에릭손」이라는 사람의 동상이 서 있는데, 이는 아이슬란드 의회 1000주년을 기념하여 미국이 선물한 조각물이라고 합니다. -레이캬비크 항구의 유명한 「핫도그」 맛을 보다 아이슬란드에 소문난 먹거리로 잘 알려진 핫도그 가게가 있습니다. 이 도시 부둣가 으슥한 공터에 2평 남짓한 핫도그 가판대인데, 좁은 공간 안에서 두 남자가 핫도그를 만들고 있어요. 손바닥만한 긴 빵 속에 양고기 소세지를 넣어 덮고, 크림을 쭉 발라 네프킨에 싸서 주는 데, 개당 우리 돈 8000원쯤 됩니다. 콜라와 함께 궁합이 잘 맞아 맛이 기가 차요. 1937년부터 이곳에서 만들어 판다고 하는 데, 예부터 항구에서 가난한 어부나 일꾼들이 허기를 달래던 간편한 음식으로 전해와, 인기도 대단하거니와 맛이 그만입니다.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도 직접 여기 와서 먹었다고 해, 더욱 그 이름이 나 있어요. 주변 환경은 구질하고, 좌석도 변변치 못해 서서 빵을 먹어야 하는데, 그래도 이를 먹기 위해 사람들은 줄을 서서 마냥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naver.com 이 기사는 지역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시대가 변화하여 동물복지를 위한 동물보호법이 강화되고, 동물보호단체의 활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동물의 사육이 과거의 개념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가 도래하였다. 천연기념물 진도개, 삽살개, 경주개 동경이가 겪고 있는 어려움도 시대적 소명의 예외가 아니다 라는 것이다. 삽살개는 1992년 3월에 우리나라 축양동물 토종개 중에서 두 번째로 천연기념물 제386호 경산의 삽살개로 지정 등록되었다. 삽살개의 천연기념물 지정은 경북대학교 하지홍 교수가 1989년 7월에 경북대학교 탁연빈, 김화식 교수 연구팀이 1969년부터 1972년까지 전국에서 수집한 원종 30여 두에 대한 연구 결과인 외형특징, 모질, 두상, 견체 외관, 성품, 체질적 특징, 특이 유전자계열 등을 근거로 신청 하였으나 유전인자 및 혈통이 정립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문화재청에 의해 1990년 3월에 보류되었다. 하 교수는 1990년 4월과 7월, 1991년 6월 등 세 차례 재심 신청을 하였으나 모두 부결되었다. 대통령과 체육청소년부 장관 청원 등으로 재심이 접수되어 1991년 11월의 현지조사와 1992년 1월의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의 심의에 의해 1992년 3월에 되어서 축양동물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4년이란 긴 세월 동안 유전형질, 혈통, 역사성 등이 미비하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심사가 보류되는 우여곡절(迂餘曲折)을 겪었고, 하 교수에 대한 수많은 학문적인 시기와 질투의 어려움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삽살개의 유전형질에 대한 연구적인 결과는 우리나라 토종개를 세계적인 반열로 올리는 업적이 되었다. ‘삽살’이란 어원은 『훈몽자회 존경각본(1527년), 규장각본(1613년)』에 개를 나타내는 한자 犬의 훈독(한글 표기)으로 사용한 삽살가히 犬(견)이라는 기록이 최초이다. ‘삽살’은 16∼17세기의 일반적인 개를 지칭하는 통상적인 표현으로 알려져 있다. 삽살개라는 단어는 19세기의『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한자로 尨이라 쓰고 한글 표기어로 ‘삽살개 방’이라 기록한 것이 최초이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尨(방)과 개견부의 狵(방)의 훈독을 삽살개를 표기하고 같은 뜻의 한자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현대에서 클 방(厖)도 삽살개를 지칭하는 한자로 사용하는 것은 잘못된 표기이다. 1900년 초기에 출판된 국어사전에는 삽살리(이), 삽사리로 기록되어 있다. 또 천연기념물 지정 신청서의 품종명은 ‘삽사리’이었으나, 문화재 조사위원들에 의해 경북 삽사리, 경산의 삽사리개로 변경되었고, 1992년 문화재위원들에 의해 경산의 삽살개로 명명되어 오늘날의 삽살개의 견명이 된 것이다. 삽살개의 원형에 대한 기록은 털이 풍성한 품종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외형에 대한 기록이 명확하지 않아 기록으로 원형을 구분하기는 어렵다. 『훈몽자회』등의 문헌에서 사용한 尨, 狵, 厖은 털이 많은 개를 지칭하는 한자이다. 털이 풍성한 개의 품종은 털이 많은 개를 더펄개, 털이 긴 개를 사자구(獅子狗)라 했고, 『훈몽자회』『물명고』에서는 털이 부드럽고 많은 개를 絡絲狗(락사구)라 기록되어 있지만, 삽살개의 원형을 구분하는 기록으로 사용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또, 일본 에도시대인 1720년에 발간된 그림책인 『繪本寫寳袋』에 털이 많은 한반도의 개를 노견(㺜犬), 물을 좋아 한다고 수견(水犬)이라 불렀고, 오늘날의 삽살개와 유사한 그림을 함께 기록하고 있다. 이 털 많은 한반도의 개가 삽살개의 또 하나의 원형으로 추정된다. 삽살개는 천연기념물 지정에 어려움을 겪는 동안에 삽살개의 기원과 역사성은 피상적인 의견이 주류가 되었다. 삽살개의 기원과 역사성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탁연빈 교수의 삽사리 조사 연구 보고서(1972년)와 하지홍 교수가『샘이 깊은 물(1989년 5월호)』에 기고한 글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삽살개는 신라 폐망으로 민가로 흘러 들어간 신라 왕실의 개이며, 경주 건천지방의 구전인 김유신 장군의 군견이며, 신라 왕족인 교각(喬覺)이 24세 때에 불교에 뜻을 두고 머리를 깎고 구화산으로 함께 들어간 선청(善聽)이라는 흰 개라고 하고 있다. 또, 조선시대 민속화인 문배도(門排圖)의 개와 조선시대 김두량의 개 그림이 있는 화첩의 묵서(墨書)에 여구묵방(余遘墨庬)이라는 기록에 의해 명명된 방구도(庬狗圖)의 개를 삽살개라 여기고 있다. 이와 같은 구전이나 속설에 의한 것이 오늘날 삽살개의 기원과 역사성의 정설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원전(原典)을 근거로 한 학문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천연기념물 삽살개는 경북 경산시 와촌면 박사리 73에 위치한 한국 삽살개 재단 소속 삽살개 연구소에서 사양관리 되고 있고, 체고가 52∼63cm이며, 몸무게는 20∼30kg으로 중대형견이며 장모종이다. 전국에는 6500마리가 분포되어 있으며, 연구소에는 현재 약 370두가 있다. 연구소는 전체면적 5545.74㎡의 부지에 12동의 견사시설을 포함하여 사무실, 기숙사 등의 교육 연구시설 및 야외운동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경산시의 위탁운영비(시비, 844,689천원, 2022년)로 17명의 직원이 관리하고 있다. 또 삽살개 보호 관리비, 연구소 시설 정비, 사료비 등 6억원의 국비를 삽살개 관리운영비로 지원받고 있다. 시대가 변화하여 동물복지를 위한 동물보호법이 강화되고, 동물보호단체의 활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동물의 사육이 과거의 개념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가 도래하였다. 천연기념물 진도개, 삽살개, 경주개 동경이가 겪고 있는 어려움도 시대적 소명에서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최석규 경주개 동경이 혈통보존연구원장 경주신문 독자위원 이 기사는 지역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위기일발의 외로운 성 적병을 맞아 一髮孤城受敵兵 막을 좋은 계책 없이 무너질 형국이었는데 禦無良策勢將傾 갑자기 신인이 나타나 전쟁을 도왔다니 忽有神人來助戰 지하에서 암암리 거든 줄 바야흐로 알겠네 始知陰騭自冥冥 조선 중기 학자 성여신(成汝信, 1546~1632)의 시문집인 ‘부사집’(浮査集) 권1에 실린 ‘미추왕릉’(味鄒王陵)이란 시다. 성여신은 남명 조식의 제자로, 임진왜란 이후 문란하고 투박해진 풍속을 바로잡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글씨와 문장에 뛰어났고 산수유람을 즐겼다고 한다. 역사서를 즐겨 읽어 역사에도 남다른 안목을 지녔던 그는 중년에 경주를 유람한 뒤 이곳의 유적을 소재로 27수의 절구를 남겼는데, 이 시는 그 중 하나다. ◆미추왕릉에서 비롯된 ‘대릉원’이란 이름 경주의 독특한 풍경 중 하나는 도심 한 가운데 거대한 수많은 고분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1000여년 전을 살았던 옛 사람들의 흔적과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기에, 시공간을 초월한 묘한 신비감마저 든다. 이들 고분은 노동동과 노서동, 황남동, 황오동, 인왕동에 이르는 평지에 150여 기가 집중적으로 모여 있다. 이곳은 그동안 노서리 고분군(사적 39호), 황남리 고분군(사적 제40호), 황오리 고분군(사적 41호), 인왕리 고분군(사적 42호) 등으로 각각 따로 관리돼왔으나, 2011년 문화재청이 역사성과 특성을 고려해 사적 제512호 ‘경주 대릉원 일원’이란 이름으로 통합해 관리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대릉원’은 각 고분군 중에서도 가장 큰 무덤 규모를 자랑하는 황남동 고분군이다. 담장을 둘러 공원처럼 관리되고 있는 이곳엔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천마총(天馬塚)·황남대총(皇南大塚)을 비롯해 신라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20여기의 고분이 모여 있다. 400여년 전 성여신이 마주했을 미추왕릉도 이곳에 있다. 무덤은 반구형의 봉토분으로 경주 시내에 소재한 고분 중에서는 비교적 큰 편에 속한다. 구조는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으로 추정된다. 대릉원 남쪽 담장 너머엔 미추왕과 문무왕(文武王), 경순왕(敬順王)의 위패를 모신 숭혜전(崇惠殿)이 있다. 원래 경순왕을 모신 곳으로 임진왜란 때 불탔다가 1794년(정조 18) 지금의 자리에 다시 지었는데, 미추왕의 위패를 모신 것은 1887년(고종 24)의 일이다. 그리고 그 이듬해 문무왕의 위패를 봉안했다고 한다. 대릉원 일원의 수많은 고분 가운데 미추왕릉을 제외하고는 관련 기록이 부족해 대부분 왕릉으로 비정받지 못했다. 우리 역사상 가장 큰 규모 무덤으로 1970년대 발굴조사를 통해 5만점이 넘는 유물이 나온 황남대총조차 무덤 주인공이 누구인지 밝힐 수 있는 근거가 아직까지 나오고 있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신라가 멸망한 뒤 아무런 기록도 없이 세월이 한참 지난 시점에서, 어느 고분이 누구의 무덤인지를 아는 것은 불가능한 일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는 경주에 있는 고분 대다수가 인공으로 만든 언덕으로 치부됐다. 반면, 미추왕릉 만큼은 왕의 무덤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듯하다. 다음은 관련 기록이다. 미추왕릉, 경주부(府)의 남쪽 황남리에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1530년 간행) 권21- 미추왕릉은 인공으로 만든 산의 사이에 있고, 그 크기는 인공으로 만든 산과 다름이 없다. 읍의 사람들이 지금까지 나무 베는 것을 금하고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김수흥(金壽興, 1626∼1690) ‘남정록’(南征錄)- 미추왕릉에 이르렀다. 이 능은 죽엽릉(竹葉陵)이라고 하는데, 높이와 넓이를 시조의 왕릉과 비교해보면 또 배가 된다. -김상정(金相定, 1722~1788) ‘동경방고기’(東京訪古記)- 이런 이유로 ‘대릉원’이란 이름도 미추왕릉에서 비롯됐다. ‘삼국사기’에 ‘미추왕을 대릉(大陵)에 장사지냈다’는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현대에 와서 붙여진 이름이다. ◆죽엽군(竹葉軍)과 김유신의 혼백 이야기 무덤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은 신라 제13대 왕이다.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金閼智)의 7대손으로, 김씨 가운데 최초로 왕위에 올랐다. 262년 왕위에 올라 284년 승하할 때까지 23년간 재위했다. 여러 차례 백제의 공격을 물리쳤으며, 농업을 장려하는 등 내치에 힘썼다고 한다. ‘삼국유사’는 미추왕의 무덤과 관련된 두 가지 이야기를 전한다. 제14대 유례이사금(儒禮尼師今) 때 이서국(伊西國) 사람들이 수도 금성을 공격해 왔는데,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귀에 대나무 잎을 꽂은 군사들(죽엽군)이 나타나 함께 싸워 적을 물리쳤다. 싸움이 끝난 뒤 미추왕릉 앞에 대나무 잎이 잔뜩 쌓여 있는 것을 보고 선왕(미추왕)이 몰래 도왔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때문에 미추왕의 무덤을 죽현릉(竹現陵)으로 불렀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는 세월이 한참 지난 뒤인 제36대 혜공왕(惠恭王, 재위 765∼780) 때가 배경이다. 779년 4월 김유신의 무덤에서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어났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준마를 타고 있었는데 그 모양이 장군(김유신)과 같았다. 그가 죽현릉으로 들어간 뒤 능 속에서 무엇인가 하소연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내용은 “신(김유신)이 평생 난국을 구제하고 삼국을 통일하였으며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려는 마음이 변함없음에도, 경술년(770) 신의 자손이 죄 없이 죽임을 당하였으니, 신은 이제 먼 곳으로 옮겨 가서 다시는 나라를 위해 힘쓰지 않을까 한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미추왕은 “나와 공이 이 나라를 지키지 않는다면 저 백성들은 어찌할 것인가. 전과 같이 힘써 달라”며 세 번을 설득했으나 김유신은 끝내 듣지 않고 회오리바람이 되어 무덤으로 돌아갔다.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진 혜공왕은 대신을 보내 김유신의 무덤에 가서 사과하고 공의 명복을 빌게 했다. 또한 나라 사람들이 김유신의 노여움을 풀어준 미추왕의 덕을 기려 삼산(三山, 신라에서 크게 제사를 지내는 세 산)과 함께 제사를 지내고, 미추왕릉의 서열을 오릉의 위에 두고 대묘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미추왕의 영혼이 신라를 돕고, 삼국을 통일한 김유신의 영혼을 달래 나라를 수호했다는 이들 두 이야기를 두고, 김알지의 후손인 미추왕을 호국신(護國神)으로 높여 김씨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부각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으로 보기도 한다. 박씨‧석씨와 달리 김씨의 시조인 알지가 왕위에 오르지 못했기에, 김알지 대신 죽엽군과 김유신의 혼백을 등장시켜 미추왕을 신격화한 것이라는 견해다. 김운 역사여행가
경북도는 중소벤처기업부에서 선정한 2022년 글로벌강소기업에 도내 9개사가 최종 선정돼 세계적인 수출 선도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이번에 선정된 기업은 제이와이오토텍(경주), 한호산업(경주), 삼원(경주), 영창케미칼(성주), 경림테크(경산), 제이앤코슈(경산), 튤립인터내셔널(예천), 재영(김천), 테스크(김천) 등이다. 이번 ‘글로벌강소기업’은 혁신성과 성장잠재력을 갖춘 중소기업을 수출 선도기업이자 지역 대표기업으로 육성하기 위해 중기부, 지자체, 지역유관기관이 함께 추진하는 수출 중소기업 지정제도다. 경북은 지금까지 중기부에서 2011년부터 시작된 이래 올해 신규지정 9개사를 포함해 총 105개사가 선정됐다. 이번 선정에 앞서 경북도와 경북테크노파크는 올해 1월부터 참여기업 모집공고를 통해 지역 유망 중소기업의 신청을 받아 글로벌 역량 및 사업계획에 대한 현장 및 발표평가를 거쳐 중기부에 10개사를 추천했다. 선정된 9개 기업은 지정일로부터 향후 4년간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의 수출바우처 등 해외마케팅 지원사업과 연구개발(R&D) 사업 신청 시 가점 부여 등 우대 지원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또 도의 지역자율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시제품 제작, 교육·상담(컨설팅), 생산공정 및 품질개선 등을 지원받을 수 있고, 민간 금융기관의 정책자금 지원, 대출금리 우대 등의 금융지원도 활용할 수 있다. 한편 이들 기업들은 코로나19로 인해 어려운 상황에서도 매출액이 꾸준히 증가하고, 현지화에 대응하는 제품개발 등 구체적 수출 다원화 전략을 제시해 세계시장으로의 성장성이 기대되고 있다. 이영석 경북도 일자리경제실장은 “도는 기업 맞춤형 지원을 통해 글로벌 강소기업들의 해외시장 개척을 적극 돕고, 수출을 선도하는 글로벌 히든 챔피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중기부, 유관기관들과 협력해 지원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경북장애인자립생활센터는 새 학기를 맞아 경북도내 초·중·고등학교에서 청소년장애인식개선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장애에 대한 편견을 해소하고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교육으로 경북도와 경주시, 경주교육지원청의 지원으로 지난 2010년부터 진행하고 있다. <사진> 지난해는 3500여명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실시한 바 있다. 2022년 청소년장애인식개선교육은 다양한 콘텐츠로 몸소 익히는 체험활동을 통해 장애 유형에 따른 어려움을 느끼고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계획이다. 또 연 1회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하는 통합캠프를 통해 장애인들과 일상생활을 함께 해 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박귀룡 센터장은 “사회인으로 당당히 살아가고 있는 장애인 당사자 강의를 통해 청소년들에게 어려운 환경에서도 이를 잘 극복하고 삶을 긍정적으로 개척해 나가는 멘토로서의 역할을 할 것”이라며 “장애 발생 원인을 알고 안전에 대한 지각을 일깨워 장애를 예방하는데도 큰 몫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청소년장애인식개선교육을 희망하는 초·중·고등학교는 11월말까지 경북장애인자립생활센터로 접수 가능하다.
내 서가에는 부모님이 젊은 시절부터 찍어온 사진들을 모아둔 사진첩이 여러 권 꽂혀 있다. 거기에는 내 어린 시절의 모습은 물론 아버지 어머니의 결혼식 사진부터 우리 가족들의 오랜 역사가 시간별로 다 들어 있다. 이 사진첩을 내가 보관하게 된 계기는 2007년에 내가 쓴 자전적 수필집인 ‘니 꼬치 있나’를 내면서 그 자료사진이 필요해 가져다 두면서부터다. 마침 교촌에 있던 고향집이 교촌 한옥마을 건설로 다른 곳으로 옮겨가게 될 상황이어서 무엇이건 잘 모으고 잘 보관하는 내가 사진첩을 가지고 있는 것이 낫겠다며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니 꼬치 있나?’라는 책은 내 초등학교 시절 이전의 자서전이라 보면 되는데 여기에는 이 사진첩에서 찾아낸 다양한 사진들이 들어 있다. 책의 배경은 주로 60~70년대 한적하던 교촌과 남천, 반월성과 황남초등학교를 중심으로 일어난 사건들로 기술되어 있고 가장 먼 곳이 ‘남흥시장’이라고 불리던 황남시장 언저리와 남산 일원이었다. 마침 우리가족과 아버지의 형제들이 교촌에 들어와 오래도록 모여 살았기에 우리 가족은 물론 우리 집안의 다양한 기록을 사진첩은 거의 완벽하게 보관하고 있다. 이 사진첩을 펼치는 순간 시간은 순식간에 4~50년 전으로 돌아가 잊혀졌던 많은 추억을 불러낸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돌아가신 할머니의 인자하신 모습과 젊은 시절의 아버지 어머니. 어렸던 누나와 형들, 늘 붙어다니며 쌍둥이라고 불리던 동생이 촌스러운 모습으로 살아난다. 불알을 다 내놓고 찍은 내 백일 때 사진과 아버지 자전거에 거치한 유아용 거치대에 올라가 웃고 있는 내 유년기의 사진까지 한눈에 볼 수 있다. 울고 웃고 부대끼며 살아온 가족들의 역사가 사진첩을 펼치는 순간 고스란히 살아나는 것이다. 이 사진첩 이외에도 내 서가에는 초중고등학교와 대학시절 찍은 사진과 독립하고나서부터 우리 가족들이 찍은 사진들, 여행사 생활하며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찍은 사진과 각종 사회활동을 하면서 찍어온 사진들, 초중고대학까지 졸업 앨범 등이 빽빽이 꽂혀 있다. 이 사진첩들이야말로 내 기억의 보물창고다. 사진첩을 펼치는 순간 그 사진을 찍던 당시의 모습이 선연하게 가슴에 스며들고 그때 일어났던 주변의 일들이 흑백이나 컬러 영화처럼 머리를 스친다. 누구인들 그렇지 않을까만 사진첩은 오래도록 잊고 산 추억의 산물이자 그때 그 순간을 살아 있는 채로 박제해 놓은 타임머신이다. 비록 한 컷의 고정된 사진일망정 그 사진을 찍을 때의 기억은 물론 그 사진 속에 함께 사진 찍은 사람들과의 잊혀졌던 관계와 에피소드까지 사진을 보는 순간 바로 살아난다. 그러니 자서전 쓰기에 사진 만큼 중요한 자료가 또 있을까 싶다. 일기가 오래된 기억 그 자체를 묘사해놓은 그림책이라면 사진은 일기가 저장하고 있지 않은 주변의 이야기들마저 포괄적으로 함유하고있는 다큐멘트리인 셈이다. 자서전 쓰기에 이보다 더 좋은 자료가 또 있을까? 이런 사진첩의 즐거움과 기능이 최근 들어서 급격히 줄어들었다. 따지고 보면 사진첩은 1990년대에서 2000년대로 넘어가는 시간을 기점으로 거의 그 수명을 다했다. 필름으로 사진을 현상하던 시절에는 사진값을 무시할 수 없어 사진 찍는 것이 조심스러웠고 사진을 보관하는 것도 지금보다 훨씬 중요하게 여겨졌다. 사진첩도 다양한 형태로 진화하면서 고급화 되었다. 그러다 디지털 카메라가 등장하면서 사진현상이 주춤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초고화질 디지털 카메라와 함께 초고용량의 메모리 카드가 개발되어 거의 무제한대로 사진을 찍고 보관할 수 있게 되었다. 컴퓨터나 노트북, 하다못해 디지털 카메라에도 수 만 장의 사진을 보관할 수 있게 되었으니 가히 사진과 기록의 봇물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흔한 만큼 소홀해지기 쉬워서 90년대 이전, 일일이 사진을 현상해서 사진첩에 보관하던 것과 달리 디지털 카메라로 무한정 찍어내는 사진들은 특별히 잘 분류해서 저장하지 않는 한 어디에서 헤매다 사라지는지 모를 정도로 함부로 다루어지는 천덕꾸러기가 되어 버렸다. 어느 때인가 사진 한 장 찾기 위해 스마트 폰에 저장된 만 장 넘는 사진을 다 뒤진 적 있었는데 이러면서 풍요 속의 빈곤을 실감하기도 했다. 이렇게 찍은 사진들이 과연 자서전 쓰기에 도움이 될지 의문이다. 찍는 것에만 열 올리기보다 찍은 후 체계적으로 사진을 관리하는 것이 훨씬 중요한 시대다. 비단 사진첩이 아니라도 오래 보관해온 다양한 물품들도 자서전 쓰기의 좋은 재료가 될 수 있다. 특히 오래된 취미나 특기, 특별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 경우 그 취미에서 얻은 다양한 부산물이 좋은 자서전 재료가 될 수 있다. 내 경우 어린 시절부터 내 생활 주변의 잡다한 것들을 즐겨 모아놓았는데 이것들이 어느 순간 고스란히 글쓰기의 재료가 되어 주었다. 초등학교 시절 받아 놓은 태권도 승급증이나 도복 띠, 중고등학교 교모와 모표, 교련복 탄띠와 수통, 그 시절 학력고사 수험표, 마라톤에 참가하고 받은 기념 메달, 기타 온갖 추억의 기념물들이 있어 가끔씩 그 시절로 나를 이끌곤 한다. 직업이 여행업이었던 관계로 세계를 여행하면서 하나씩 모아 놓은 기념품들도 좋은 추억의 산물이자 자서전 쓰기의 재료가 되어 주었다. 그 기념품과 함께 여행지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그 속에서 일어나 에피소드들이 나만의 특별한 여행기로 따로 쓰여 있을 정도다. 줄잡아 해외 출장 200여 회를 다녔으니 여행기만으로 족히 몇 권의 책이 나올 법하다. 최근 3년쯤은 수석(壽石)을 취미 삼으면서 국내 온갖 탐석지에서 가져다 놓은 돌들도 집안 한쪽에 쌓이게 되었다. 수석을 하면서 돌에 대해 이해하는 과정이나 느낌, 돌 하나하나에 담긴 탐석의 추억과 돌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이 역시 나만의 이야기가 되어 인터넷 카페에 쌓이고 있다. 수석과 관련한 글들 역시 수석 카페에 500여 편이나 올라가 있어 이 역시 족히 책으로 낼 만큼 분량이 쌓였다. 자서전을 쓰고자 하시는 분들은 지금 바로 사진첩부터 꺼내 보자. 그것을 펼치는 순간 그 속에 박제해두었던 깊은 추억들이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들 것이다. 그것을 고스란히 받아 쓸 수 있다면 무엇보다 특별한 자신만의 자서전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자서전의 재료는 사진첩이나 오래 보관한 물건들과 함께 생활주변 곳곳에 널려 있다. 다만 그것을 잊은 채 살고 있을 뿐이다.
지난 5월 9일 많은 경주시민들이 함께 주목한 SNS가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페이스북이었다. 지지와 비판의 의견이 비등한 가운데 경주와 영남, 보수라는 이름을 건 진영에서는 지지보다는 비판이 높다. 그러나 역대 대통령 중 마지막 퇴임까지 지지율이 40%가 넘은 대통령이란 측면에서 분명히 이전의 어떤 대통령보다 좋은 평가를 받은 것도 숫자가 보여주는 사실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퇴임사에서 강조한 것 중 가장 눈길을 끄는 문장이 있다. 바로 ‘위대한 국민’이란 표현이다. 물론 정부가 고생했다거나 대통령 자신도 고생했다는 자찬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가장 핵심은 국민이다. 퇴임사를 중간중간 편집해보자. “지난 5년 ~ 대한민국은 위기 속에서 더욱 강해졌고 ~ 대한민국의 국격도 높아졌습니다. 대한민국은 이제 선진국이며 선도국가가 되었습니다. 우리 국민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이 말을 반박할 어떤 국민도 없을 것이다. 그런 한편 시련이 있었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것은 우리의 의지와 노력이 부족한 탓만은 아니었습니다. 한편으로 우리의 의지만으로 넘기 힘든 장벽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넘어야 할 벽입니다” 처절한 국익이 교차하는 외교적 갈등들과 쉽게 통제되지 않는 북한의 한계도 우리는 분명히 지켜보았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온전히 지켜낸 것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새 정부도 반드시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다. “평화는 우리에게 생존의 조건이고 번영의 조건입니다. 남북 간에 대화 재개와 함께 비핵화와 평화의 제도화를 위한 노력이 지속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국민의 위대함에는 매우 구체적인 사례들이 나열됐다. 일본의 부당한 수출규제를 헤쳐나온 기업의 저력. 코로나19를 세게에서 가장 현명하게 대처해온 시스템과 국민의 협조. 이 과정에서 찾아낸 문제해결의 성공방식은 우리 국민의 위대함을 정확히 짚은 찬사다. “막상 위기를 겪어보니 우리가 제일 잘하는 편이었습니다. ~~~ 우리 국민들은 어떤 위기라도 이겨낼 것이며,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낼 것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의 성공여부와 상관없이 국민들에게 자존감을 심어주고 떠났다. “대한민국은 세계적인 위기 속에서 ‘위기에 강한 나라’,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 ‘세계를 선도하는 나라’로 도약했습니다. 그 주역은 단연 우리 국민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말대로 그는 위대한 국민과 함께 성공하는 대한민국 역사에 동행하게 됐다. 5년 후 퇴임할 대통령도 반드시 이런 위대한 국민을 온전히 느끼는 영광을 누릴 수 있기 바란다.
‘깨끗한 경기바다’를 만들기 위해 경기도가 5월부터 항·포구, 공유수면내 불법행위에 대해 특별단속을 실시한다. 단속 대상은 경기도가 관할하는 어항구역 내 연안 5개 시(화성·안산·시흥·김포·평택)에 있는 제부항, 대명항, 오이도항, 시화호 내측 등 32개 어항과 바닷가 공유수면이며 이들 지역의 불법노점행위, 불법매립, 방치선박에 대해 단속을 강화한다. 경기도는 우선 5월에는 해양 플라스틱 오염을 유발하고 바닷가의 효율적 이용과 미관을 해치는 방치 선박에 대해 전수조사를 시작한다. 조사 대상은 육상, 섬 지역에 장기간 전복·침몰·방치된 폐어선이나 뗏목, 장기 계류 중인 선박, 방치된 폐자재 등이 모두 포함된다. 이후 6월 계도기간을 거쳐 7~9월 본격적인 특별단속을 벌인다. 도는 이를 위해 특별사법경찰단, 시군과 공동편성한 합동점검반을 운영, 고질적인 불법행위에 대해 강력한 행정조치를 취할 예정이다. 특히 주요 어항구역 내에 불법 노점상을 집중단속해 시민들이 마음놓고 해변을 거닐 수 있게 할 계획이다. 경기도는 현재 공유수면 불법점용·사용이나 불법매립 시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과 함께 원상회복 명령과 변상금 부과 등 행정처분을 실시하고 있다. 또한 어항구내 어항시설 불법점용·사용은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그러나 어민들의 고질적인 방치와 타성으로 인해 불법매립과 불법점용이 오랜기간 지속되어 시민들을 불편하게 해왔다. 경기도는 앞으로 코로나19 일상 회복으로 바닷가를 찾는 도민이 늘어날 것으로 보고 지속적으로 바닷가 불법행위를 정비하는 등 깨끗한 경기바다 만들기에 최선을 다할 예정이다. 한편 앞으로 본격적으로 재개될 관광회복을 맞아 경주 관내 바다에 대한 정화작업 및 불법행위 단속도 필요해 보인다. 경주 감포, 양북, 양남 해안에는 아직도 방치된 쓰레기가 많으며 동네주민들이 상습적으로 투기하는 쓰레기들이 해안을 오염시키고 있어 시의 적극적인 대처와 단속과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행정지도가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