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강읍 피일안길 112-2에 이르면 청안이씨 구암(懼庵) 이수인(李樹仁,1739~1822) 선생의 자취가 서린 소담한 상모정(尙慕亭)이 눈에 들어오는데, 건물 내에는 직산서사(稷山書社) 편액이 걸려있다. 문득 정자 뒤편에서 들려오는 맑은 계곡물과 자그마한 폭포의 경쾌한 물소리는 유람객의 발길을 끌어당긴다. 구암은 안강현 산대리에서 부친 학반재(學半齋) 이위현(李渭賢,1699~1752)과 모친 영월신씨 신명상(辛命相)의 따님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평범한 유년기를 보냈고, 여동생이 있었으나 단명하였다. 어려서 조부 이전초(李全初)와 부친의 가학을 계승하였고,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1679~1759)의 문인 작은 할아버지 이약초(李若初)에게 퇴계학을 배웠다. 벼슬에 대한 관심보다는 당시 세태의 혼란함을 떠나 고향인 경주 안강에서 산림처사로 살면서 후학양성에 매진하였고, 경주와 인근 지역의 유수한 인물과 부윤 등을 만나 교유하면서 학문의 폭을 넓혔다. 그가 남긴 『구암집(懼庵集)』에는 신라 경순왕의 황남전비각(皇南殿碑閣), ​이화택의 삼괴정(三槐亭), 안강리 이공량(李公亮)의 사이헌(四而軒), 근암 최옥의 용담서당(龍潭書堂), 최주범의 취옹정(醒翁亭), 최의겸의 동호서사(東湖書社) 그리고 효자효부의 정려각 기록 등 지역문화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많다. 문집은 이수인의 아들 이효영(李孝永,1778~1833)과 족질 이관영(李觀永)이 수습 정리하였고, 종제 이수문(李樹文)과 손자 이종림(李宗彬) 등이 사림의 협조를 받아 ​1860년에 목판으로 간행하였고, 이후 1901년 추가 개판하였다. 9권 5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휘녕(李彙寧)의 서문과 권주욱(權周郁,1825~1901)의 발문 그리고 이종상(李鍾祥)의 후서(後敍)가 있다. 권1~3은 시가 336제(題)이고, 권4는 소(疏)․서(書), 권5는 서(書)․잡저(雜著)․서(序), 권6은 기(記)․발(跋), 권7은 잠(箴)․명(銘)․송(頌)․상량문(上梁文)․축문(祝文)․제문(祭文), 권8은 애사(哀辭)․비명(碑銘)․묘갈명(墓碣銘)․묘지명(墓誌銘)․행장(行狀)․행록(行錄), 권9는 부록(附錄) 등이 수록되어 있다. 건물 내부에는 경인년(1890) 여강이씨 내헌(耐軒) 이재영(李在永,1804~1892)이 지은 「상모정기」 그리고 무술년(1958) 완산(完山) 류동시(柳東蓍,1886~1961)가 지은 「상모정중건기」가 걸려있고, 1827년 창려(蒼廬) 이정기(李鼎基,1759∼1836)가 지은 유사, 남려(南慮) 이정엄(李鼎儼,1755~1831)이 지은 묘지명과 풍산인 유태좌(​柳台佐,1763~1837)가 지은 묘갈명 등을 보면 그의 행적을 알 수 있다.상모정기(尙慕亭記) - 내헌 이재영 자계(紫溪)의 동쪽 그리고 화개(華蓋)의 남쪽에 넓은 골짝이 있는데 멀리 가리키면 황망한 한 구역에 불과하지만, 좁은 길을 찾아 그 안으로 들어가면 산은 높지 않게 휘두르고, 시냇물이 빠르지 않게 졸졸 흐른다. 곁에 작은 폭포가 졸졸 소리 내며 흐르는데, 그윽하고 평온하다. 깊숙이 하나의 한가한 구역이 되는데, 바라보면 단정한 선비가 초가집에 앉아 옛 사람의 책을 읽는 듯 매우 즐거울 만하다. 그 가운데 구암 이수인 공이 책을 읽고 학문에 힘쓴 곳인데, 넓게 물을 끌어 대고 위치의 경영은 거의 두서가 잡혔으니, 이 구역이 비록 은거하는 장소가 아니더라도 사물의 굳게 감춰짐은 진실로 주인의 소유일 것이다. 다만 외진 곳에 설치하여 훗날을 기다리지만 흥망의 조짐이 서린 서림사(西林寺)의 감회가 이곳에 머물러 있다. 동쪽의 깎아지른 듯 폭포 위에 3칸의 정자를 짓고 상모정(尙慕亭)이라 편액을 하였으니 또한 높은 산과 큰 길의 마음이로다. 아! 우리 구암공은 미천한 시골에서 정조년간에 소명(召命)이 집안에 이르렀고, 평민신분으로 급제하였으며, 선조의 훌륭한 덕으로 대접하여 주고받는 것이 메아리와 같았다. 절용애민(節用愛民:씀씀이를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하라) 4글자를 집 안에 걸어두고 하나의 명으로 삼았고, 자신을 불러준 예에 조금이나마 보답하였다. 공이 비록 뜻을 펼치기에 부족하였더라도 또한 가히 배운 것을 져버리지 못하였다고는 말할만하다. 가령 오늘날 이 정자에 머무는 자가 이 솥에 죽을 쑤고, 이 솥에 미음을 쑤어먹으며, 남겨진 책을 읽고 당일의 힘든 공부에 노력한다면 남은 여운이 다스려지고, 일생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지조를 생각할 것이다. … 이용직(李容直) 군이 나에게 그 사적을 청하였고, 마침내 이름난 정자의 뜻을 부연하여 기록한다. 경인년(1890) 윤달 하순에 가선대부 동지돈녕부사 여강 이재영 삼가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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