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0일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또 하나 처연한 획을 그은 날이다. ‘6.10 항쟁’으로 일컬어지는 이날은 우리의 기억 속에 두 명의 청년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열사라는 이름으로 숨져간 박종철 군(1965~1987)과 이한열 군(1966~1987)!
“그때 제가 연세대학교 간호대학 2학년 학생이었어요. 이한열 군의 비보가 있던 날, 온 캠퍼스는 물론 학과 내에서도 알 수 없는 비통함과 보이지 않는 분노로 일렁이는 것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지요!” 최정윤 씨(연세대학교 강남세브란스병원 VIP병동 간호차장)에게 그 며칠은 마치 시간이 박제되어 남아 있듯 또렷이 기억된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거부한 전두환 군사독재의 ‘4.13 호헌조치’에 반대하고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이 정권에 의해 은폐된 것에 항의하기 위한 6.10 국민대회를 하루 앞둔 6월 9일,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서 이한열 군이 전투경찰들이 쏜 직격 최루탄에 맞아 병원으로 후송됐다. 두개골 골절과 뇌손상으로 살아날 가망이 없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연세대학교는 초비상 상태에 돌입했다.
“병원 실습 중이었는데 의과대학과 간호대 내에 그 소식이 가장 먼저 퍼졌어요. 무언가 크게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확연히 느끼는 순간이었죠”
이튿날부터 연세대학교는 침통한 기운이 가득 퍼졌고 또 한편에서는 전쟁터와 다름없는 투석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비분강개한 학생들은 수업을 전면 거부하고 누구랄 것도 없이 중앙도서관 앞으로 벌떼처럼 모여들었다. 그러나 최정윤 씨는 그곳에 함께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기에는 연세 간호고등학교라 불릴 만큼 빡센 학업과 두어 개의 아르바이트를 함께 하며 스스로 책임져야 할 현실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1980년대 중반이 대부분 그랬지만, 살면서 그때처럼 빚진 기분을 느낀 순간도 없을 겁니다. 간호대 내에서도 자발적으로 순번을 정해 의대생들과 같이 이한열 군이 죽음을 헤매고 있던 중환자실 앞을 지키기 시작했고 더 많은 학생들이 독재에 맞서 온몸으로 저항하고 있었는데 저는 그럴 수 없었거든요”
영화 ‘1987(2017년 개봉)’을 보면서 최정윤 씨는 동기생인 이한열 군에게 있었던 평화로운 일상과 그것을 파괴한 어이없는 죽음으로 인해 다시 한번 뼈저린 아픔을 느꼈다며 울먹였다. 나아가 그 당시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학생운동에 가담했던 학생들에게 또다시 어떤 부채의식을 느껴야 했다고 고백했다. 한편으로 그런 마음들이 당시 학생운동에 참여하지 못했던 의대생들이나 간호대생들에게 막연하게나마 퍼져 있었다는 정황도 알려주었다.
그런 최정윤 씨에게 그 부채의식을 홀연히 떨쳐버리는 절체절명의 계기가 생겼다. 그것은 상상하기 힘들 만큼 컸던 의료인들의 자기희생에서 비롯됐다.
“코로나19는 아마도 20세기와 21세기 가장 위협적인 질병이었을 겁니다. 이에 맞서 혼신을 다해 환자들을 지킨 의료인들은 국민의 건강을 지킨 진정한 ‘시민’들이었습니다!”
최정윤 씨는 코로나19로 인해 의료진들과 병원 관계자들, 방역 관계자들이 겪은 고충은 일반 국민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험난했다며 ‘1980년대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학생들에게 부끄럽지 않을 만큼, 의료인들이 국민들에게 끼친 영향이 클 것’이라고 자평했다. 병원에는 코로나 전담팀이 따로 꾸려져 있었지만 그쪽으로 빠져나간 만큼의 결원을 남은 의료진들이 메꾸어야 했기에 의료인들은 누구나 똑같은 상황이었음도 설명했다.
“이제, 1987을 다시 봐도 덜 미안할 것 같아요! 그 시절 함께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에게는 우리 나름의 봉사와 의무가 있다는 것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되었거든요!”
올해로 간호사 생활 33년차, 최정윤 씨는 명예퇴직을 신청해놓은 상태다. 이제 코로나도 안정국면에 들어선 만큼 홀가분하게 오랜 기간 힘든 일에 지친 몸과 마음을 다독이고 싶다고!
“글쎄요, 그렇다고 의료인들에게 부채의식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겁니다. 누구나 자신의 위치에서 다른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고 봉사할 수 있습니다. 그걸 믿으면 고생한 의료인들의 보람도 조금 더 커질 것 같아요!”
환하게 웃는 최정윤 씨를 보면서 2022년 대한민국 모든 의료진들을 영화 ‘1987’의 또 다른 주인공으로 헌정하고 싶어졌다. 1987년의 민주화 현장의 학생들과 2022년의 의료인들 모두 역사가 기억해야 할 참다운 시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