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계절은 저마다 색깔이 다르다. 그 다른 색깔만큼이나 그 다른 계절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다른 추억이나 기억들을 머릿속의 저장공간에 아름답게 혹은 고통스럽게 혹은 잔인하게 남겨 두었을 것이다. 그게 세월이라는 이 고마운, 더러는 무정한 시간의 편린들이 우리의 의지와 상관이 없이 각자의 삶에 동승하고 있는 이유인지 모른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만들어 놓은 그 많은 추억과 기억들 중에서 나는 음식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그래서 오늘은 봄 이야기를 하고자 하고 봄이 만들어준 음식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그 이유는 봄은 항상 즐겁고, 활기차고,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들로 내 기억의 공간 속에 저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는 고향 땅 경주와 한없이 사랑스러운 ‘엄마’가 계시기 때문이다.
봄에 생각나는 음식과 ‘엄마’ 그리고 나의 기억들은 특별히 더 많이 있는데 그중 ‘앵두주’와 ‘진달래주’는 너무도 선명한 봄날의 추억들을 그림처럼 남겨 놓으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더욱더 놀라운 것은 봄이라는 그 계절에 가장 풍성하게 얻을 수 있는 자연의 혜택들을 ‘엄마’는 정말로 지혜롭게 잘 활용하여 ‘음식’에 적용하신 분이셨다. 그도 그럴 것이 앵두는 우리 집 마당에서 때만 되면 풍성하게 소출의 기쁨을 주었고 진달래는 잠깐 걸어 나가면 뒷산에서 잠시만에 바구니 가득 따 담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향 집 마당의 앵두나무는 우리 가족 모두에게 정말 축복의 봄 선물이었다. 개화기가 되면 꽃을 활짝 피웠는데, 마당 정중앙에 턱하니 자리 잡았던 까닭에 집 어느 방향에서 봐도 화사하기 그지없는 풍경을 선사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가족 중 누군가가 그 앵두나무에 있었고, 어느새 온 가족이 그 앵두나무 주변에 몰려들었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집에 들갈 때도 가장 먼저 우리 가족을 반겼던 존재는 바로 그 화사한 앵두나무였다. 그렇게 활짝 핀 꽃이 지고 나면 이제는 조그만 앵두 열매가 송송 나기 시작해서 날씨가 더워지면 점점 더 탐스럽게 열매를 맺어가기 시작하는데, 이 경이로운 과정을 매일 매일 관찰하는 것 또한 온 가족들에게는 즐거움이었다. 때가 되어 앵두가 탐스럽기 그지없게 열매를 맺게 되고 앵두나무 가지가 조금씩 조금씩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아래로 처지게 될 즈음에, 어머니는 이웃집 애들을 불러서 따먹게 했다. 그렇게 해서 한 바구니 정도의 앵두는 애들의 입속으로 사라지고 나머지 한 바구니 정도의 앵두는 우리 가족들이 수시로 맛나게 따먹고, 나머지 남게 되는 한 바구니 정도의 앵두로 어머니는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앵두주를 담으셨다. 이러한 일들은 유년의 어린 시절 고향 땅 마당에서 늘상 벌어지는 우리 가족들만의 축제 같았다. 그렇지만 고향을 떠나 객지 생활하면서 고향 땅 앵두나무는 겨우 몇 년에 한 벌 볼까 말까 하다가 그나마도 부모님들께서 경주를 떠나 대구로 이사하면서 다시는 보지 못했다.
국어 시간에 배운 소월 선생님의 약산 진달래만큼이나 내 기억 속에 잘 남아 있는 것이 바로 유년의 진달래꽃이다. 시골에서 자란 모든 사람들에게 봄날의 진달래는 화사하기 그지없는 뒷동산의 추억으로 남아 있을 것이 분명하다. 진달래꽃은 화단에서 곱게 가꾸어진 꽃과는 또 다른 것이 온 산 전체를 덮고 있는 그 엄청난 장관은 정말 경이롭다. 사실 우리가 ‘꽃에 파묻혀 본다’라는 기회를 어디서 얻을 수 있기란 참으로 어렵다. 그런데 한국의 산들은 봄에 이러한 축복의 감사함을 사람들에게 선물처럼 나누어 준다. 산이 많아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자연의 감사함이 많이 있는데 봄날의 진달래꽃도 바로 그중 하나다. 고향 땅의 ‘엄마’는 봄에 이 진달래꽃을 여러 개의 나무 바구니에 가득 따서 진달래주를 담으셨다. 항상 그러했듯이, 진달래 꽃잎을 따러 산으로 가실 때도 어김없이 ‘엄마’를 따라가야 할 사람은 막내인 나의 몫이었다. 엄마는 들판에 그리고 산에 봄나물을 캐러 가실 때도 항상 막내인 나를 불러서 같이 가셨다. 어쩌면 딸이 없었던 엄마가 여러 형제들 중에서 막내인 내가 딸이 되기를 바랐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진달래꽃을 따고 뒷마당에 아버지가 땅속에 묻어 놓은 항아리 단지에 담고 술을 완성하는 일들을 엄마와 나는 봄날 연례행사처럼 치르곤 했는데, 그 과정들이 엄마와 나는 항상 즐거웠다.
‘엄마’는 아직도 대구에서 잘 지내신다. 아쉬운 것이 하나 있다면 나를 포함하여 형님들 모두가 경주를 떠나서 타지에서 살고 계셔서 고향땅 경주를 갈 수 있는 기회들이 꼭히 많지 않다는 것이다. ‘엄마’가 계실 때 고향 땅 경주에서 잠시라도 같이 살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소망하고 기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