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립극단 배우 이인호가 연극을 만난 것도 그렇게 시작됐다.
스물일곱 무렵 개인 사업을 하던 그는 어느 날 벼룩시장 구인란을 들여다보다 배우 모집이라는 글을 발견했다. 연극을 해본 적은 없었지만 왠지 눈길이 갔다. 호기심에 찾아간 극단에서 바로 연습을 시작했다.
첫 역할은 병사였다. 무대에 나와 있는 정도의 작은 역할이었지만 첫 공연부터 관객이 많은 큰 극장 무대에 섰다. 공연을 마치고 난 뒤의 기분은 그동안 해봤던 일들과 달랐다.
“처음에는 뭔지도 모르고 무대에 섰어요. 첫 역할이 병사였는데 그냥 나와서 서 있는 정도였죠. 그런데 공연이 끝나고 나니까 기분이 정말 좋더라고요. 너무 재미있었어요. 대본도 이상하게 다 외워졌어요. 제 대사뿐 아니라 다른 사람 대사까지요. 그때 ‘드디어 내가 좋아하는 걸 찾았구나. 이런 거였구나’ 싶었어요. 그전까지는 제가 뭘 좋아하는지도 잘 몰랐거든요.”
여러 일을 거쳐 스물일곱에 만난 연극은 그렇게 직업이 됐다.
대구에서 연극을 하다 결혼하고 아이가 생겼을 무렵 경주시립극단 오디션을 봤다. 안정적인 직업이 필요했던 시기였다. 경주시립극단에 들어오면서 경주에 정착했고 두 딸도 이곳에서 자랐다.
아내 역시 대구에서 연기를 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부부가 함께 어린이집 공연을 만들기도 했다. 아내가 대본을 쓰고 그는 탈과 소품을 만들어 직접 무대에 올렸다.
두 딸도 자연스럽게 아빠의 공연을 보며 자랐다. 어린이집에 다닐 때부터 공연장을 찾았고, 학교에 들어간 뒤에는 친구와 선생님이 공연을 보러 오기도 했다. 그렇게 가족의 일상 가까이에 연극이 있었고, 그 역시 경주에서 배우로 살아온 시간이 어느덧 20년을 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연기를 바라보는 생각도 달라졌다. 30대에는 무언가를 더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배우가 가진 것을 많이 보여주는 것이 좋은 연기라고 여겼던 때도 있었다. 지금은 오히려 반대다.
“30대 때는 뭔가를 더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아요. 하나라도 더 보여주려고 했고요. 지금은 오히려 필요한 것만 남기려고 해요. 예전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조금씩 보이고 들리는 것 같아요.”
경력이 쌓이면서 연기를 대하는 방식은 달라졌지만, 무대가 쉬워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공연을 마친 뒤에는 자신의 연기를 더 돌아보게 된다.
“저는 매번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면서도 공연이 끝나면 아쉬운 부분이 보여요. 저도 사람이다 보니까 완벽하게 집중하지 못할 때도 있고, 한 번씩 흐트러질 때도 있고요.”
20년 넘게 무대에 선 지금도 그에게 연기는 여전히 고민하고 돌아봐야 하는 일이다.
경주시립극단 제136회 정기공연 ‘히스틴온천; 선택의 기록’
이번에는 경주시립극단 제136회 정기공연 ‘히스틴온천; 선택의 기록’에서 주인공을 맡는다. 헨리크 입센의 ‘민중의 적’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그가 맡은 인물은 이를 발견한 의사다. 오염 사실을 알리고 문제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온천 개발에 투자하고 생계를 꾸려가는 주민들에게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다.
당장의 손실을 감수하고서라도 문제를 바로잡아야 하는가. 아니면 지금의 삶을 위해 어느 정도 눈을 감아야 하는가. 작품은 그 선택을 둘러싼 사람들의 갈등을 따라간다.
연습을 거듭하면서 이인호도 자신이 맡은 인물을 조금씩 이해해가고 있다.
처음에는 고집스럽게 보일 수도 있지만, 인물의 입장에서 들여다볼수록 그가 왜 물러서지 않는지도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만 눈감아주면 모두 편할 수 있는 상황인 거예요. 그런데 지금 당장의 이익 때문에 그냥 넘어가면 나중에는 분명 문제가 생길 거고, 결국 이 마을 전체가 어려워질 수도 있는 거잖아요.
연기를 하다 보니까 이 사람이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 이해가 되더라고요.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도 아니에요. 이 마을이 좋아서 그러는 거예요.”
그가 이번 작품에서 특히 마음에 두고 있는 것도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사람에 관한 대사다. 옳다고 믿는 것을 말하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지만, 동시에 외로운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내용이다.
인물을 알아갈수록 자신과 닮은 부분도 보였다. 나이가 들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무엇이 중요한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도 이전보다 분명해졌다. 그래서 모두가 반대하더라도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쉽게 놓지 않는 인물의 선택이 단순한 고집으로만 보이지 않았다.
당장의 이익보다 앞으로 생길 문제를 먼저 이야기하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향에서 쉽게 물러서지 않는 사람. 이인호가 이번 무대에서 보여주려는 것은 그 선택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일이 아니라, 한 사람이 왜 그런 선택을 하는지를 관객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스물일곱에 우연히 연극을 만난 뒤 20년이 넘었다. 그때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처음 발견했고, 이제는 자신이 살아온 시간만큼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졌다. 이번에 만난 인물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온 것도 어쩌면 그 때문인지 모른다.
‘히스틴온천; 선택의 기록’은 그렇게 서로 다른 입장에 놓인 사람들의 선택을 무대 위에 펼쳐놓는다. 당장의 이익을 지킬 것인지, 앞으로 닥칠 문제를 위해 지금의 손실을 감수할 것인지. 그 선택을 어떻게 바라볼지는 관객의 몫이다.
경주시립극단 제136회 정기공연 ‘히스틴온천; 선택의 기록’은 오는 11월 19일부터 21일까지 경주예술의전당 원화홀에서 관객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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