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발굴했던 금관총을 오는 2월 말경 다시 발굴하기로 해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일제에 의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지만, 부실발굴과 유물 수집이라는 그릇된 인식에 의해 기록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던 신라왕릉급 무덤의 재발굴이 94년 만에 이뤄지는 것.
국립중앙박물관에 따르면 지난달 19일 문화재위원회 매장문화재분과위원회 심의 결과 경주시 노서동 104번지 일원 내 금관총 발굴 허가 신청 건이 원안 가결됐다.
이에 앞서 지난 11월 사적분과위원회는 이 일대에 대해 국가지정문화재 현상변경 허가 결정을 내린 바 있다. 이에 따라 중앙박물관은 동절기 추운 날씨를 감안해 2월말 또는 3월초쯤 금관총 일대 면적 3600㎡에 대해 발굴을 시작해 90일간 전면적인 조사를 실시한다고 밝혔다.
박물관 측은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금관총 발굴조사에 대한 재검토와 경주 도심고분공원조성 계획 수립을 위한 기초자료 수집, 금관총 봉분 축조 방식 및 규모 등의 확인을 통해 신라고분 연구기반을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특히 지난 2013년 금관총에서 출토된 ‘환두대도’의 보존처리 중 이사지왕(尒斯智王) 명문이 확인된 만큼 발굴을 통해 금관총의 주인이 밝혀질 수 있을지 여부가 주목되고 있다.
또한 기존 출토된 유물 외에 어떤 새로운 유물이 나올지, 또 신라 무덤에 대한 양식과 계통 등에 관한 새로운 사실이 밝혀질 수 있을 지에도 관심을 끈다.
박물관 측은 올해 금관총을 시작으로 2017년까지 일제강점기 이미 발굴됐던 서봉총과 금령총 등도 연차적으로 발굴한다는 계획이다.
중앙박물관 관계자는 “지중 레이더탐사 등을 통해 금관총에 대한 사전 조사는 이미 끝냈다”면서 “일제강점기 미흡했던 발굴과 기록으로 인해 알 수 없었던 부분에 대해 보다 세밀한 조사가 진행될 것”이라고 밝혔다.
◆일제강점기 신라왕릉급 무덤 수난사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일제는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찾기 위해 한반도의 유적을 비롯해 경주지역 고분을 여러 차례 발굴했다.
고분에 대해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된 것은 1921년 금관총을 우연히 발견한 뒤부터다. 조선총독부는 금관총 발굴이후 신라고분에 대한 인식을 전환했고, 경주지역 고분에 대해 집중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노서동 고분군 내 식리총(발굴연도 1924년), 서봉총(1926년), 금령총(1926년) 등 신라왕릉급 무덤들에 대해 지속적인 발굴을 진행했다.
하지만 발굴이라는 명목아래 문화재 약탈이나 다름없는 식의 발굴로 고분들은 처참하게도 유물 수집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신라고분에 대한 조사·연구 기록은 미흡했고, 특히 서봉총의 경우는 조사와 관련한 기록조차 없을 뿐만 아니라 유물 또한 400여점 안팎이 전부다.
금관총, 서봉총, 금령총 등 무덤에서는 금관 3개와 수많은 금장신구 등 중요 유물들이 출토됐지만 부분적으로만 조사했고, 정리된 기록물도 크게 미흡해 무덤의 전모를 알 수없는 그저 형식에 불과한 발굴조사에 그친 것이다.
당시 금관총 발견 이후 금관과 같은 유물에 관심이 집중돼 체계적인 발굴보다는 유물 수집식의 조사가 빈번해졌고, 도굴이 증가하는 등 부작용을 낳았다는 것이 학계의 설명이다.
◆신라시대 무덤 양식 등 조사 계획
국립중앙박물관은 지금까지 정리한 조선총독부박물관 자료로는 일제가 발굴한 금관총, 서봉총, 금령총 등의 유물과 발굴기록이 매우 미흡하다고 판단해 이번에 재발굴을 추진한다. 박물관은 매년 1개 무덤씩 연차적으로 발굴을 진행해 나가기로 했다.
황남대총이나 천마총 발굴에서 목곽 외부에 유물이 다수 수습된 점을 미뤄 이번 발굴 과정에서 추가적으로 유물이 수습될 지 관심이 높다.
무덤들은 비슷한 시기에 조성됐는데도 구조가 다르다는 점이 확인되지만, 이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 박물관 측은 황남대총에는 사후 세계에서 쓸 그릇을 보관하는 부각이 발견됐지만, 천마총에서는 없었던 것처럼 이들 무덤들도 차이가 날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따라 무덤권 전역에 대한 발굴로 신라시대 무덤의 양식 및 계통에 대해서도 면밀히 조사할 계획이라는 것.
박물관은 향후 무덤 발굴과 관련한 모든 연구 성과를 집대성해 보고서를 발간하고, 특별전을 열어 국민들에게 공개할 방침이다.
한편 3개 무덤은 발굴 뒤 봉토를 쌓지 않아 현재 편평한 상태여서 발굴비용이 적고, 새로운 왕릉급 무덤 발굴과는 달리 이에 따른 민원은 크게 없을 것으로 보인다.
◆금관 최초 발견 ‘금관총’
금관총은 노서동 고분군에 위치한 것으로 신라의 금관이 출토돼 이름 지어졌다. 하단부 지름 45m, 높이 12m 정도의 규모로 추정된다.
1921년 9월 집터를 넓히던 중 우연히 유물이 발견돼 발굴한 고분으로 발견 당시부터 유구의 상당부분이 이미 파괴돼 있었다.
정식으로 발굴된 것이 아니었고 유물이 수습된 뒤 조사가 진행됐기 때문에, 고분의 구조나 유물 출토상황 등에 관한 기록은 매우 빈약하다. 현재 ‘금관총’이라는 표지석을 세우고, 일대를 사적 제39호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노서동 제128호분으로 고유번호가 매겨져 있는 이 고분이 ‘금관총’으로 불리게 된 것은 신라유물의 대명사처럼 인식돼있는 화려한 금관이 한국에서 처음으로 출토됐기 때문이다.
금관 이외에도 순금제귀고리, 금제와 은제의 팔찌, 반지, 허리띠 등 각종 장신구를 비롯해 도검, 갑옷 등 무기류 등 많은 유물들이 출토됐다.
곡옥(曲玉)을 포함한 각종 구슬류만도 무려 3만 점이 넘으며 금의 총량만도 7.5㎏에 달하는 엄청난 분량이었다. 그 중에서도 순금으로 제작된 금관은 국보 제87호, 허리띠장식은 국보 제88호로 각각 지정 보존돼 있다.
◆왕비 등 여성 묘 추정 ‘서봉총’
고분 발굴에 스웨덴 구스타프 황태자가 참가한 것을 기념해 스웨덴의 한자명인 서전(瑞典)의 ‘서(瑞)’자와 출토 금관의 봉황장식에서 ‘봉(鳳)’자를 따서 서봉총(瑞鳳塚)이라 이름 붙였다.
동서 지름 약 36m에 높이 약 9.6m 규모로 1926년 발굴됐다. 발굴 전에 고분 주위에 들어선 민가들에 의해 봉분은 크게 훼손돼 있었으며, 발굴 결과 이 고분의 남쪽 부분 일부는 이 고분보다 뒤에 축조된 다른 고분과 중복돼 있어 두 고분이 표형(瓢形) 쌍분(雙墳)이며, 서봉총은 그 표형분의 북분으로 추정된다.
남분은 1929년 영국인 데이비드(Devid)가 경비를 부담하고 발굴조사해 데이비드총이라 이름 붙여졌다.
서봉총에서는 금관을 비롯해 금·은·유리구슬을 꿴 목걸이, 금팔찌, 금허리띠, 쇠솥, 토기, 칠기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됐다.
특히 고분에서 출토된 은제대합(銀製大盒) 뒤에 뚜껑 안쪽 면과 그릇 바닥에서 바늘 같은 것으로 새긴 명문이 발견됐는데, 연수 원년인 신묘년 3월에 대왕(大王)이 이 은합을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이 명문은 경주 호우총(壺杅塚) 출토 청동호우에 새겨진 을묘년명(乙卯年銘)과 함께 지금까지 신라 돌무지덧널무덤에서 발견된 단 2개의 기년명 가운데 하나로 신라고분의 편년 연구 등에 극히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서봉총은 5세기 중엽경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고분의 규모와 출토유물로 보아 당시 신라의 왕비나 또는 왕비에 버금가는 최고 지배층의 여성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서봉총은 일제강점기에 발굴 뒤 조사보고서가 발간되지 않아 다시 묻혀버리고 말았다.
◆왕자 무덤으로 추정 ‘금령총’
금령총은 금방울이 장식된 금관이 출토됐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1924년 발굴을 통해 적석목곽분의 구조를 처음으로 밝혀내 그 의의가 큰 고분이다. 바닥 지름 18m, 높이 4.5m로 그다지 크지 않은 고분이다. 그림이 그려 넣어 자작나무로 만든 관모, 금팔찌, 배 모양 토기, 로마유리 등이 함께 출토됐다.
특히 토기류 중 한국을 대표하는 기마인물형토기(국보 제91호)가 출토됐다. 장식토기와 특수형 토기는 신라고분 중 단일고분으로는 가장 많고 다양하게 출토된 것이다. 이외에 청동제 거울도 1점 출토됐다.
이 무덤에서 출토된 금관과 장신구가 성인용으로 보기에는 크기가 작아 무덤의 주인이 어린 나이에 죽은 왕자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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