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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2년간의 조선 엘리트 문과 74명, 소과 254명 기록 밝힌

오선아 기자 suna7024@hanmail.net 1741호 입력 2026/07/30 15:19 수정 2026/07/30 15:58
경주사마소보존회, ‘경주사마소의 역사’ 출간
역사적 가치와 스토리텔링의 무한한 가능성

경주 사마소 전경. <사진=경주사마소보존회>확대
경주 사마소 전경. <사진=경주사마소보존회>
경주 교촌마을 인근, 화려한 신라의 유적들 사이에 조선시대 지방 지식인들의 치열한 삶과 학문적 열정이 고스란히 서려 있는 공간이 있다. 바로 조선시대 사마시 시험인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한 경주 유생들이 모여 유학의 올바른 길을 실천하고 사회 기강을 바로 세운 ‘경주 사마소’다.

최근 경주사마소보존회는 조철제 전 경주문화원장이 30여 년의 깊은 관심과 자료 수집, 그리고 8개월간의 집중적인 집필을 통해 엮어낸 역사서 ‘경주사마소의 역사’를 출간했다. 이를 통해 이 공간이 지닌 역사적 가치와 스토리텔링의 무한한 가능성이 세상에 드러났다.


사마소, 조선시대 경주 엘리트들의 지적 교류와 자치 공간


조선시대 소과(小科)인 생원시(경전 지식 평가)와 진사시(문예 창작 평가)에 합격한 이들은 성균관에 입학해 대과를 준비할 자격을 얻었으나, 고향에 머물며 수학하는 이들을 위해 각 고을에서는 사마소를 건립했다.

사마소는 지역의 생원과 진사들이 학문을 수학하고 향론을 주도하기 위해 설립한 일종의 지방자치기관이자 교육 기구였다. 연산군 시절에 설립되기 시작한 지역 사마소는 향촌 사회의 든든한 구심점 역할을 해 왔다.

경주 사마소는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당시 불타 없어진 것을 영조 17년(1741) 양동마을에 살았던 두 진사인 이덕록과 손경걸이 중건해 ‘풍영정(風詠亭)’이라 명명했으며, 노소의 사마시에 합격한 문사들이 주로 이곳에 머물렀다.

현재 사마소 건물에는 영조 38년(1762) 당시 부윤 홍양호가 쓴 현판이 걸려 있으며, 그 서쪽으로는 순조 32년(1832) 생원 최기영 등이 원로 선비들을 위해 지은 ‘병촉헌(炳燭軒)’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이 건물들은 원래 신라시대 월정교 터 북쪽 교대 위에 세워져 있었으나, 1984년 경주 월성 사적지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현재의 위치로 이전 보존됐다.


조철제 전 경주문화원 원장. 오선아 기자확대
조철제 전 경주문화원 원장. 오선아 기자


502년의 기록, 이들 급제자가 들려주는 성취와 애환


이번에 출간된 ‘경주사마소의 역사’의 가장 눈부신 성과는 조선이 개국한 뒤 1393년부터 1894년까지 502년 동안 경주 지역에서 배출된 문과 급제자 74명과 생원 및 진사 합격자 254명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집대성했다는 점이다. 조철제 전 원장은 지역 문집과 문중의 고문서 등을 샅샅이 뒤져, 파편화돼 있던 과거 합격자들의 활동 역량과 지역사회 내 역할을 발굴해내는 국내에서도 보기 드문 지역사 연구의 쾌거를 이뤘다.

특히 이 책은 당시 경주 지역 선비들이 처했던 척박한 정치적 상황을 생생히 보여준다. 조선 후기 영남 지역은 남인 세력의 근거지로 중앙 정계를 장악한 노론에 밀려 철저히 야당 취급을 받으며 관직 진출에 뼈아픈 제약을 받았다.

조 원장은 “이러한 혹독한 역경과 소외 속에서도 끊임없이 노력해 과거에 합격했다는 것은 경주 선비들의 눈부신 성과”라며 그 불굴의 의지를 높이 평가했다. 이러한 고난 속에서도 정조 때 내남에 살았던 최벽(崔璧) 같은 인물은 문과 장원으로 급제하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사마소에는 과거 합격자 명단인 ‘연계안(蓮桂案)’이라는 명부가 존재했다. ‘연계(蓮桂)’란 소과와 대과 합격자를 의미한다. 소과에 합격한 사람은 연방(蓮榜)이라 하는데 연(蓮)은 연꽃이 아닌 연이어 문과에 급제하라는 연(連) 자의 뜻이고, 대과의 합격은 계방(桂榜)이라 했다. 계(桂) 자의 중국어 발음이 귀할 귀(貴) 자의 발음과 같다는 점에 주목했다. 즉, 사마소의 과거 합격자 명부를 ‘연계안’이라고 부른 것은 “소과 합격에만 머물지 말고, 연이어 대과까지 합격해 높은 벼슬에 올라 귀한(貴) 사람이 되라”는 선인들의 상징적인 언어였던 셈이다. 이로써 사마소라는 공간에 얽힌 선인들의 간절한 염원을 제대로 읽어낼 수 있게 됐다.

경주사마소 역사 표지. <사진=책표지 스캔>확대
경주사마소 역사 표지. <사진=책표지 스캔>


향촌 여론 주도하던 사마소의 위기 그리고 최부자댁의 지혜


초기의 경주 사마소는 사교 클럽이나 교육 장소에 그치지 않았다. 유림들이 여론을 형성하고 향촌 사회의 ‘조선판 시민단체’이자 자체협의기구로 기능했다.

이들은 새로 부임한 수령이 올바른 정치를 펴도록 협력하고, 백성을 돕는 구휼 활동에 앞장섰으며, 유명한 외부 유학자가 방문하면 사마소로 모셔와 학문을 논하며 지역의 위상을 높였다. 조 원장은 사마소가 오늘날의 언론이나 시민사회 단체처럼 사회적 고비를 실질적으로 바로잡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오피니언 리더의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반면 사마소와 바로 이웃하고 있던 경주 최부자댁은 조선조 말 민란 세력이 들이닥쳤을 때 저들과 맞서지 않고 오히려 술상을 융숭하게 차려주며 마음을 다스려 화를 면하게 한 일화도 있다. 또한 1894년 과거제도가 폐지된 이후 사마소의 건물 관리는 9대 진사를 배출한 최부자 가문에서 실질적으로 맡았다. 이와 관련된 사실을 아울러 밝혀 놓았다.


지혜와 갈등 해결의 공간, 미래 스토리텔링의 보고(寶庫)


조철제 원장은 향후 조선시대 경주 지역사회에서 벌어졌던 다양한 시비(是非)와 갈등 구조, 그리고 그것이 전개되는 양상을 정리해 새로운 책으로 펴낼 계획이다. 신분과 명분에 얽매였던 당시의 갈등을 어떻게 지혜롭게 풀어내려 했는지 그 치열한 과정을 조명하겠다는 취지다.

경주 사마소는 이제 현대인들에게 깊은 통찰을 제공하는 스토리텔링의 무대로 거듭나고 있다. 과거에 수차례 낙방해 60세가 넘어서까지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던 유생들의 인간적인 애환, 문중의 명예를 둘러싼 치열한 명분 싸움, 정치적 소외 속에서도 꼿꼿하게 자존심을 지켰던 선비들의 투쟁은 그 자체로 한 편의 드라마다.

젊은 유생들의 패기가 넘치던 ‘풍영정’, 원로 선비들의 관록이 묻어나는 ‘병촉헌’, 그리고 무너진 월정교의 석재를 옮겨 대(臺)를 쌓으며 성현의 가르침을 되새기고자 했던 ‘영광대(影光臺)’ 등 사마소 공간 곳곳에는 깊은 철학적 의미가 깃들어 있다.

조 원장은 “오래 전부터 사마소에 묵묵히 관심을 가져온 제게 이 방대한 기록을 집대성할 기회를 준 경주시와 편찬위원, 그리고 끝까지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준 경주사마소보존회 정연곤 회장과 이원걸 간사의 헌신이 있었기에 이 귀중한 지역 역사서가 탄생할 수 있었다”며 감사를 전했다.

이어 “각고의 노력으로 발굴된 경주사마소의 이야기가 풍부한 스토리텔링 콘텐츠로 가공된다면, 사마소는 교촌마을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자기 수양과 진정한 리더십의 의미를 묻는 최고의 역사 교육장이자 필수 탐방 명소로 굳건히 자리매김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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