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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 방송 현장 품고 고향으로… 정지영 경주문화재단 신임대표이사

오선아 기자 suna7024@hanmail.net 1741호 입력 2026/07/30 15:06 수정 2026/07/30 15:12
“시민의 일상에 스며드는
따뜻한 문화 조력자 되겠습니다”

정지영 경주문화재단 신임대표이사. 오선아 기자확대
정지영 경주문화재단 신임대표이사. 오선아 기자
1986년 2월 경주고속버스터미널, 서울행 버스에 오르는 열아홉 살 아들을 환하게 배웅하던 어머니의 모습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정지영 대표의 가슴에 뭉클한 잔상으로 남아 있다.

KBS 콘텐츠사업국장과 KBS아트비전 경영이사로 한류 콘텐츠의 최전선을 치열하게 누볐던 그가, 가장 단단한 현장의 경험을 품고 마침내 고향 경주로 돌아왔다. 지난 7월 경주문화재단의 신임 수장으로 부임한 정지영 대표의 이야기다.

권위적인 리더의 모습은 그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 실패와 위기가 번갈아 찾아오던 거친 비즈니스 현장에서 체득한 유연함, 그리고 사람을 향한 진솔한 태도로 경주 문화예술계에 따뜻한 소통을 예고하고 있는 정지영 대표를 만났다.


숱한 실패 딛고 개척한 33년 방송 현장


대학 졸업을 앞두고 신문사, 금융권, 공기업 등 수많은 입사 시험에서 연거푸 고배를 마시며 막막해하던 청년은 그해 마지막으로 치러진 KBS 공채에 합격하며 극적으로 방송계에 발을 들였다.

이후 그의 직장 생활은 끊임없는 개척의 연속이었다. 드라마 ‘겨울연가’를 기점으로 한류가 태동하던 시기, 아시아 최초로 신설된 콘텐츠 비즈니스 조직의 원년 멤버로 합류해 눈부신 성과를 일궈냈다. 중국의 엄격한 규제를 뚫고 현지 호텔들에 한류채널인 ‘KBS 월드’ 채널을 안착시켰으며, 드라마 제작사 ‘몬스터유니언’ 설립과 대형 OTT 플랫폼 ‘웨이브’ 출범에도 힘을 보탰다. 국장 시절에는 방탄소년단 등이 무대에 올랐던 30억원 규모의 대형 글로벌 행사 ‘창원 K-POP 월드 페스티벌’을 이끌며 한류 확산의 주춧돌 역할을 했다.

하지만 화려한 성과 이면에는 남모를 속앓이도 많았다. 중국 방송사에 수출했던 인기 예능 포맷을 무단으로 도용당해 억울함을 삼켜야 했고, 사드 사태로 인해 하루아침에 한류 콘텐츠 수출길이 모조리 막혀버리는 뼈아픈 시련도 겪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는 대신 넷플릭스 등 글로벌 신규 플랫폼으로 눈을 돌려 활로를 개척하며 거친 현장을 치열하게 버텨냈다.

수십 년의 비즈니스 현장 속에서 그가 벼려낸 가장 강력한 무기는 사람을 향한 존중이었다. 상향 평가도 이뤄지는 엄격한 사내 간부 평가에서 늘 상위권에 들 만큼, 그는 직원들을 다독이고 품어내는 부드러운 리더십을 인정받았다. 독단적인 결정보다는 동료들과 공감하고 함께 위기를 극복하는 방식을 택해왔던 그다.


정년 앞두고 걸려 온 전화 한 통, 고향을 향한 결심


평생을 바쳐온 직장이었지만, 정년퇴직을 1년 4개월 남짓 앞둔 시점 걸려 온 전화 한 통이 그의 발걸음을 돌려세웠다. “경주문화재단 대표 공모가 있다는데 이번 기회에 응모를 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지인의 전화였다. 평소 퇴직즈음에 고향경주에서 일해 보고 싶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지인이었다.

 

젊은 시절 그에게 경주는 그저 훌쩍 떠나고 싶은 좁은 동네에 불과했다. 하지만 훗날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읽고 나서야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이 미학적으로 얼마나 벅차고 위대한 도시인지 깊이 깨달았다고 한다. 오랜 시간 마음 한편에 묵직하게 자리하고 있던 애향심이 요동치는 순간이었다. 남은 직장 생활을 명예롭게 갈무리한 그는 자신이 평생 쌓아온 커뮤니케이션과 기획의 노하우를 고향의 문화예술 발전에 오롯이 쏟겠다는 결심으로 망설임 없이 경주행을 택했다.



거창함보다 가슴을 울리는 진정성 있는 축제를 상상하다


정 대표가 바라보는 경주의 문화예술은 수많은 행사를 기계적으로 나열하는 보여주기식 사업이 아니다. 경주를 대표하는 ‘신라문화제’에 대해서도 그는 당장 실현할 수는 없더라도 조심스레 자신만의 소박한 아이디어를 그려보곤 한다.

그가 개인적으로 상상해 보는 장면 중 하나는 동궁과 월지나 월정교를 배경으로 한 전통 ‘낙화놀이(숯가루를 불태워 떨어뜨리는 놀이)’다. 타 지역에서 막대한 예산 없이도 은은하게 떨어지는 불꽃과 애절한 음악만으로 수많은 사람의 눈시울을 붉히게 만든 이 행사를 보며 큰 영감을 받았다. 화려한 외형과 규모에 집착하기보다, 밤하늘에 비 내리듯 떨어지는 불꽃 아래서 시민과 관광객이 한데 모여 진한 감동과 카타르시스를 나눌 수 있는 가칭 ‘신라의 불꽃’ 콘텐츠를 언젠가 꼭 시도해보고 싶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경주예술의전당을 시민의 쉼터로


무대 뒤에는 늘 시민의 일상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존재한다. 정 대표는 경주예술의전당을 굳이 대단한 공연을 보지 않더라도 시민 누구나 오가며 책을 읽고 커피 한잔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편안한 휴식 공간으로 탈바꿈시킬 구상을 하고 있다. 더불어 채용이나 대관, 지원 사업 등에 있어서는 외부의 부당한 청탁을 단호히 배제하는 경주문화재단의 전통도 이어가겠다는 단단한 약속도 잊지 않았다.

나아가 지역 예술인 및 시민들과의 허물없는 소통을 위해 최근 난생처음 인스타그램 계정도 개설했다. 서류 뒤에 숨어 결재만 하는 차가운 관리자가 아니라, 직접 현장 사진을 올리고 먼저 다가가 응원을 남기며 지역민들과 소통하겠다는 진심이다. 실제로 부임 직후 열린 한 지역 작가의 전시장을 찾아 한 시간 넘게 머무르며 묵묵히 깊은 교감을 나눈 바 있다.

40년 전, 더 넓은 세상을 향해 고향을 떠났던 열아홉 소년은 이제 가장 폭넓은 경험과 세상을 읽는 깊은 안목을 품고 다시 고향 곁으로 돌아왔다.

오랜 시간 치열하게 현장을 누볐던 그의 경험이 경주 시민들의 일상에 어떤 다정한 위로와 문화적 활력을 불어넣을지 기대가 모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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