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위한 도시’를 향한 경주시 약속, 법과 제도로 길 열다
2024년 7월 12일, 경주시는 장애인, 노인, 임산부 등 모든 시민과 방문객이 차별 없이 도시 공간을 누릴 수 있도록 법적 기반을 마련한 ‘경주시 무장애 도시 조성에 관한 조례’가 제정됐다.
이 조례는 제1조에서 ‘모든 사람이 일상에서 이동하거나 시설을 이용하는 데에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조성된 도시’를 목표로 명시하며, 제3조에서는 무장애 도시 조성에 필요한 시책 수립과 재원 확충을 시장의 책무로 규정했다.
조례 제정 이후, 시는 각 부서에 흩어져 있던 개별 사업을 종합적으로 연계하기 위해 장애인여성복지과, 도시공원과, 관광컨벤션과 등 15개 핵심 부서가 참여하는 ‘무장애도시조성 추진 TF팀’을 구성하고, 총 30개에 달하는 세부 사업을 체계적으로 추진할 계획을 수립했다. 조례 제6조를 근거로 2025년부터 2029년까지 5개년간의 구체적인 청사진을 담을 ‘무장애도시 조성 기본계획’ 수립을 위한 연구용역에 착수했다. 특히 APEC 정상회의 유치를 준비하는 국제도시로서의 위상에 걸맞은 수준의 접근성을 확보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경주시의 의지는 구체적인 사업으로도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2000만원의 사업비를 투입해 황성동 행정복지센터 등 8개 공공건물 15곳의 장애인 주차장을 재도색하고 안내판 10개를 개선했다.
또 무장애도시 조성을 위한 실태조사를 통해 개선이 필요한 구체적인 대상을 파악했다. 시내권에서는 이동식 경사로 84개소, 점자블록 65개소, 장애인 주차장 106개소 등 총 325개소의 정비가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외곽권의 경우, 장애인 인구가 가장 많은 안강읍을 중심으로 점자블록 18개소와 장애인 주차장 5개소를 포함해 총 44개소를 정비하는 등 시민 생활과 밀접한 공간부터 변화를 계획하고 있다. 이처럼 경주시는 2024년 제정한 조례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기본계획을 수립하며 ‘모두를 위한 도시’라는 시대적 과제에 응답하는 의미 있는 첫걸음을 내디뎠다.
시민 10명 중 4명, 왜 ‘무장애도시’는 지금 당장 필요한가
경주시의 이러한 노력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2024년 기준, 경주시 전체 인구 24만7124명 중 무려 37.4%에 달하는 9만2344명이 교통약자로 분류된다.
세부적으로는 65세 이상 고령자가 6만4521명(26.1%)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등록 장애인이 1만6402명(6.6%), 아동이 4.2%에 이른다. 이는 통계상으로 시민 10명 중 4명 가까이가 일상적인 이동에 크고 작은 제약을 겪을 수 있음을 의미하며, 무장애 환경이 소수만을 위한 배려가 아닌 우리 모두를 위한 보편적 권리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특히 등록 장애인 1만6273명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보행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지체장애로 7154명에 달하며, 청각장애(2967명), 시각장애(1548명), 뇌병변장애(1357명)가 뒤를 잇는다. 이들의 거주지를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안강읍(2046명), 용강동(1238명), 황성동(1002명) 순으로 많아, 지역별 편차를 고려한 맞춤형 인프라 개선이 시급함을 알 수 있다.
휠체어 바퀴를 멈추게 하는 ‘보이지 않는 벽’
경주시의 확고한 의지와 구체적인 계획에도 불구하고, 이동약자가 일상에서 체감하는 현실은 여전히 냉혹하다.
장애인단체 관계자는 “경주 시가지 상당수가 기본적인 이동조차 보장하지 못하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직접 현장을 확인한 결과 법과 현실의 괴리는 분명했다.
불과 2~3cm의 단차지만 보도와 차도 사이의 아주 작은 턱은 휠체어 이용자에게는 넘을 수 없는 벽이다. 이로 인해 위험을 무릅쓰고 차도로 내려서야 하는 아찔한 상황이 반복된다.
기준 미달의 보도 폭도 문제다. 법적 최소 보도 폭은 1.2m지만 황금대교 인근처럼 경관을 위해 심은 가로수가 오히려 통행을 막아 휠체어는 물론 유모차조차 지나가기 어렵다. 인도 중간에 박힌 전신주와 통신 맨홀 등은 이동을 더욱 위협한다.
특히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블록은 설치 표준 지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규격 미준수, 설치 방향 오류, 볼라드와의 충돌 등 오히려 사고를 유발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특히 두 줄 이상 넓게 깔린 선형블록은 휠체어 바퀴를 빠지게 해 혼자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만든다.
한 장애인 단체장은 “차라리 설치를 안 하는 게 낫다. 어설프게 설치해 더 헷갈리게 만든다”고 토로했다.
무용지물 편의시설도 문제다. 횡단보도 음성유도기의 15%는 고장 난 상태이며, 작동 버튼 앞은 자전거 거치대 등 각종 장애물로 막혀 있어 접근조차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또한, 뇌병변 장애인의 경우 녹색 신호가 끝나기 전 횡단보도의 절반도 건너지 못하는 등 기초적인 인프라조차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외형상 정비가 잘 된 도로라도, 장애인 당사자 입장에선 매 순간 위험 요소를 회피해야 하는 구조다.
사용자 관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할 때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동약자의 곁에는 늘 동행하는 보호자가 있기 마련이다. 유모차를 끄는 부모, 노부모를 모시는 자녀, 장애인 활동지원사 등 동행자들은 물리적 장벽 앞에서 당사자 못지않은 피로감과 심리적 위축을 경험한다.
한 시민은 “아이와 함께 외출할 때마다 턱 하나에 유모차를 들었다 놨다 하는 과정에서 진이 빠진다. 외출 자체가 부담이 된다”고 토로했다. 무장애 환경의 부재는 결국 이동약자와 그 가족 전체를 사회로부터 고립시키는 또 다른 장벽이 되고 있는 것이다.
경주시의 ‘무장애도시 조성’ 선언은 분명 의미 있는 첫걸음이다. 하지만 조례 제정과 TF팀 구성이라는 행정적 노력이 시민의 삶에 실질적인 변화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시설 설치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실제 사용자의 경험을 반영하는 정책으로의 전환이 시급하다.
앞서 경주시 무장애도시 조성위원회에서도 “제도와 시설 정비도 중요하지만 실제 현장에서 작동하는 무장애 환경이 핵심”이며, “책상 위 통계보다 현장 중심의 조사와 장애인 당사자의 목소리가 필요하다”는 날 선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다행히 경주시는 이러한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하기 위한 소통 창구 마련에도 나서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실태조사 결과는 구글 기반 지도로 시각화해 누구나 열람할 수 있도록 구축 중이며, 조례 제7조에 근거한 ‘시민제안 및 시민모니터링’ 사업을 통해 시민들이 직접 정책 과정에 참여할 길을 열어두었다.
본 기획취재는 경주시와 상생의 관점에서 실질적인 대안을 함께 모색하고자 한다. 2편에서는 연간 5000만 관광객 시대를 꿈꾸는 관광도시 경주의 또 다른 얼굴, 이동약자에게는 여전히 굳게 닫혀있는 주요 관광지의 현실을 심층 진단하고 모두를 위한 환대의 의미를 되짚어본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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