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史書)에는 첨성대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첨성대의 축조 시기를 밝힌 가장 오래된 기록인 『삼국유사』 ‘선덕여왕지기삼사조’에는 ‘선덕여왕 대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만들었다[鍊石築瞻星臺]’고 하였다. 또, 「왕력(王曆)」에 제17대 내물마립간릉 위치와 관련하여 점성대(占星臺)라는 기록이 있다.
『고려사』 권12 지리지에 있는 동경유수에 관한 기록에도 첨성대가 있으며 ‘신라선덕여주(善德女主)가 쌓은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 권 150 경주부에는 선덕여왕 2년(633년)이라는 축조 시기와 함께 첨성대의 기능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첨성대는 경주부 남쪽 월남리(月南里)에 있다. 633년(선덕왕 2년)에 선덕여주가 쌓은 것이다. 돌을 다듬어서 쌓아 만들었는데 위는 네모지고 아래는 둥글다. 높이는 19척 5촌, 위의 둘레는 21척 6촌, 아래 둘레는 85척 7촌으로 속이 통해 있어서 사람이 그 가운데로 해서 올라가게 되어있다.”
이후의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경잡기』에는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데 그 말미에 “이곳에서 천문을 관측한다.”고 덧붙였다.
『증보문헌비고』에서는 “신라 선덕여왕 16년(647년)에 첨성대를 만들었다. 돌을 다듬어 대를 쌓은 것인데 위는 네모나고 아래는 둥글고 높이는 19척이다. 그 속이 통해 있어 사람이 그곳을 오르내리며 천문을 관측한다. 경주부 동남 3리에 있다.”고 하였는데 이 시기는 647년은 진덕여왕 원년에 해당하며 『세종실록지리지』의 633년과 차이가 있다.
이상에서 축조연대를 633년, 647년으로 달리 기록하고 있으나 선덕여왕 때 축조되었고 천문을 관측한 곳이 분명하다.
『삼국사기』 분석 결과로 천문대가 확실하다.
한국천문연구원 김봉규 박사는 “신라시대 축조된 첨성대가 천문대였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찾았다”고 주장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첨성대가 상징적인 건물이라거나 제사를 지내던 제단일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돼 왔다. 김 박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증보문헌비고』 등에 실린 고대 천문관측기록을 분석한 결과, 첨성대가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640년대 이후 기록된 유성이 떨어진 위치들이 모두 첨성대를 둘러싸고 있다.”며 “이는 첨성대에서 유성을 관측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주장했다.
이어 “첨성대가 완성된 이후 신라의 천문관측 기록의 수가 이전보다 10배 이상 증가했다.”며 “기록된 내용도 매우 정밀해졌다.”고 덧붙였다. 즉, 541년부터 640년까지 신라의 천문관측 기록이 3건에 불과했지만, 첨성대 축조 예상 시점인 641년부터 740년까지의 기록은 38건에 달하고 있다.
또 첨성대 축조 전인 467년 10월 『삼국사기』 기록에는 ‘큰 별이 북쪽에서 동남쪽으로 떨어졌다.’는 식의 막연하고 간단한 내용이 있지만, 첨성대 축조 후의 718년 11월 삼국사기 기록에는 ‘유성이 묘수(황소자리)에서 규수(안드로메타자리)로 들어갔는데…’라는 식으로 정밀하고 체계적으로 기록돼 있다고 김 박사는 설명했다.
김 박사는 특히 “신라가 별에 대한 제사를 본피유촌(本彼遊村)에서, 해와 달에 대한 제사를 문열림(文熱林)에서, 오행성에 대한 제사를 영묘사(靈廟寺) 남쪽에서 지냈다는 사실이 삼국사기에 기록된 것도 확인했다.”며 “이는 신라가 첨성대가 아닌 다른 곳에서 천문과 관련된 제사를 지냈다는 것으로, 첨성대가 하늘에 대해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 아님을 확고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 같은 내용의 논문을 이후 충북 청주 충북대에서 열리는 한국천문학회 봄 학술대회에서 발표하는 한편, 이어 영국에서 개최되는 ‘국제 고천문 학술발표대회’에서도 발표할 예정이라고 했다.
김 박사는 “지금까지는 결정적 증거 없이 그저 막연하게 첨성대가 천문대라고 말해왔지만, 신라가 남긴 『삼국사기』 기록들이 첨성대가 천문대였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었다”며 “영국에서 열리는 학술발표회에서 인정받으면 첨성대가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후 국제 고천문 학술발표대회에서 첨성대에 대한 후속 논의를 했다는 소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