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농업기술센터는 부부 단위 이상의 가족과 함께 농촌지역으로 전입한 귀농인을 대상으로 ‘귀농인 영농정착 지원사업’ 대상자를 오는 19일까지 모집한다.사업 분야는 △귀농인 영농정착 지원 △귀농인 소형농기계 지원 △귀농인 영농자재 구입 지원 △귀농귀촌인 유치 우수마을 지원 △귀농인 주택수리비 지원 △창농..
동궁과 월지를 현대적으로 재현한 경주 동궁원이 호텔·박물관 등과 입장권 제휴할인 업무협약을 체결했다고 8일 밝혔다. 협약에 따라 호텔·박물관 등에 제휴협약을 맺은 기관·단체의 신분증, 호텔 등 숙박업소 영수증, 박물관 등 주요시설 입장권 등을 제시하면 이번 달부터 할인 혜택이 주어진다.제휴할인이 가능..
경북문화관광공사는 7일 보문관광단지 내 설치된 느린우체통의 엽서 5795통(국내 5715통, 해외 80통)을 발송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시대 여유를 전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느린우체통은 보문호반광장에 자리하고 있으며, 누구나 자유롭게 손 편지를 쓸 수 있도록 사진엽서와 펜을 비치하고 있다. 우체통에 넣은 엽서는..
경주시가 그동안 논란이 일었던 이·통장 임명 제도를 대폭 손질했다.경주시에 따르면 이·통장 임명절차를 명확하게 명시하는 것을 주요골자로 전부 개정한 ‘경주시 리·통장 및 반장 임명에 관한 규칙’이 10일부터 시행된다. 현재 이·통장 임명은 마을회나 주민회 등 주민자치기구에서 자체적인 선거를 통해 추천한..
불편한 진실 늘 꿈꾸던 자유_ 그 꿈으로부터 난 한 번도 자유로운 적이 없었다. 바람이 불면 그저 바람이 부나 보다 비가 오면 비가 오나 보다 하며 살았지만 정작 자유라는 그 실체도 없는 꿈을 좇아 어둡고 긴 겨울밤 난 잠들지 못하고 있다. 박현수 작가 010-2581-2489/nanna0110@naver.com 개인전 3회 및 단체전 200여회 현) 한국미술협회, 경북도예가협회, 경주도예가협회 회원, 경북창작미술협회 회장, 도예공방 수 운영
2020년 12월 31일 기준 경주시 주민등록 인구가 25만3502명으로 1년 사이에 무려 1900명 감소했다. 성별로는 남자 1017명, 여자는 883명 감소했다. 이제 경주시 인구 감소는 전국적으로 상위에 속할 만큼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행안부에 따르면 2020년 12월 31일 기준 우리나라 전국 주민등록인구는 전년(2019년)대비 2만838명이 감소했는데 수치상으로 보면 1900명이 감소한 경주시가 우리나라 전체 감소인구에 10%를 차지하고 있다. 경주시는 지난 2016년 말 25만9452명에서 2017년 25만7903명으로 1549명이 감소했고, 2018년엔 25만6864명으로 전년보다 1039명이 줄었다. 또 2019년엔 25만5402명으로 전년 대비 1462명이 감소했다. 특히 지난해는 1900명이 줄어 최근 5년 가운데 가장 많이 감소한 것으로 집계됐다. 경주시의 이 같은 인구감소 추세라면 2023년이면 25만명 선도 붕괴될 것으로 보여 진다. 경주시는 인구 감소 문제 이외에도 더 큰 사회적 변화가 급격히 진행되고 있어 경주시 정책수립방향에 중요한 변화가 요구된다. 인구는 줄어들고 있는데 1인 세대 증가로 세대수는 2019년 11만8542세대에서 무려 2963세대가 늘어난 12만1505세대로 급증했다. 이는 최근 5년간 1700~1800여 세대씩 증가해오다 지난해 큰 폭으로 늘어난 것이다. 세대수는 늘고 세대원수는 줄어드는 현상을 가속화되고 있는 것이다. 또 경주시는 지난 2018년 말에 65세 이상 노인인구가 20.4%를 기록해 초고령사회에 진입했다. 그리고 불과 2년 만에 전체 인구의 22.6%(5만7313명)를 차지하는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경주시는 그동안 이 같은 난국을 타개하기 취해 출산장려를 위한 정책 마련과 일자리창출, 복지 및 교육환경개선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인구자연감소와 고령화, 1인 세대 증가, 저출산 문제 등의 총체적 난국을 경주시와 같은 중소도시가 스스로 헤쳐 나가기란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러나 인구감소가 전국적인 문제라고 하더라도 경주시가 전국에서 가장 많이 인구가 빠져나가는 도시가 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 따라서 경주시는 지금이라도 있는 인구라도 잘 유지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를 마련해야 한다. 시민들이 바라는 정책은 적극 확대하고 필요한 것은 파악해 지역별, 연령별, 직업별 맞춤형 행정 서비스를 제공해야 할 시점이다.
전국에서도 높은 교통사망사고 다발지역으로 불렸던 경주가 오명에서 벗어나고 있다. 최근 경주경찰서에 따르면 지난해 경주지역 교통사고 사망자 수는 28명으로 지난 20년간 집계 이래 처음으로 20명대에 진입했다. 경주는 국내외 관광객이 많이 찾는 관광도시라는 지역특성 뿐만 아니라 사통팔달 뚫린 도로망에 통과차량 또한 많아 타 도시에 비해 교통사고에 많이 노출된 지역이다. 지난날 경주의 교통사망사고 기록을 보면 참담하다. 20년 전인 2001년에는 무려 117명이 교통사고로 사망했으며 10년 전인 2011년에도 71명에 달할 만큼 심각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교통사망사고가 줄어 들고 있다. 자료에 따르면 2015년 65명, 2016년 56명, 2017년 41명, 2018년 45명, 2019년 34명으로 매년 감소하다가 지난해 20명대로 첫 진입을 한 것이다. 그동안 경주시와 경주경찰서는 교통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지역에서 일어난 교통사고분석을 바탕으로 매년 ‘교통사고예방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맞춤형 단속, 홍보·교육, 교통안전시설 개선을 추진해 왔다. 특히 교통사망사고 발생 시 경주시, 경주경찰서, 도로교통공단 등 기관들이 합동점검을 통해 사고현장을 개선하는 등 교통사망사고 줄이기 위한 다양한 대책을 수립·시행해 왔다. 경주경찰서는 올해 처음 시행하고 있는 안전속도 5030을 더욱 확대하고 범시민 교통사고 줄이기 운동 전개하는 등 경주에 특화된 교통안전대책을 계속 추진해 빠른 시일 내에 교통사고 사망자를 10명대로 줄이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교통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해선 관계기관의 노력과 시민들의 선진 교통안전의식이 함께 해야 성과를 거둘 수 있다. 경주시와 경주경찰서는 교통사고 위험이 있는 시설을 더 철저히 조사해 개선하고 교통안전문화 확산을 위한 정기적인 교육과 홍보 등을 계속해야 한다. 특히 시민들은 안전운행을 준수하고 안전보행을 생활화해야 한다. 경주시는 지난해 도로교통공단이 발표한 전국 지자체 교통안전지수에서 최하위를 기록한 바 있다. 도로환경에 문제가 있었고 운전습관이나 보행자들의 안전의식 부족이 원인이었다는 분석도 나왔다. 이번을 계기로 관계기관과 시민들이 합심해 교통안전도시 경주라는 명성을 얻기를 기대한다.
1597년 2월 이순신 장군은 용렬한 선조에게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 영어의 몸으로 죽기 직전 우의정 약포 정탁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한 신구차(伸救箚) 상소로 출옥 1597년 4월 1일 백의종군 한다. 1597년 7월 15일 삼도수군통제사 원균 장군이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수군 1만 명과 주전함 판옥선 백여 척을 잃고 대패하자, 조선수군은 궤멸돼 조선의 운명은 백척간두에 섰다. 이에 선조는 겁을 먹고 조정은 자중지란에 빠지자 백사 이항복은 선조에게 건의하여 사죄를 담은 교지를 내려 이순신을 달래고 삼도수군통제사에 복귀, 사직을 보존토록 했다. 이순신은 백의종군의 와중에 칠천량 전투에서 경상우수사 배설이 빼돌린 판옥선 12척과 조탐선 31척 그리고 어선에 장대를 길게 늘여 전투선으로 가장시킨 30여 척의 선단을 꾸려, 상시 전투태세를 갖췄다. 1597년 9월 16일 세계 해전사에서 가장 경이롭고 불가사의한 명랑해전의 서막을 이렇게 열었다. 일본군 연합함대는 333척의 병참선, 척후선을 합하면 500여척, 수륙양군 10만이었다. 선봉의 1함대 133척은 구루시마 미치후사, 그 뒤를 이어 2함대 70척은 도도 다카토라, 가토 요시하키의 기함 지휘하에 합세했다. 울돌목(바닷물이 ‘울’면서 ‘돌’아가는 ‘목’)은 좁은 해협(폭 200~500m)에 유속은 약 10~11노트(시속 18.5-20.4km)로 매우 빨랐다. 왜의 집결된 함대가 비좁은 수로를 종대로 겨우 빠져 나오자마자 이순신은 먼저 현자총통, 지자총통(사거리 300~400미터)으로 원거리에서 쏴 적선을 관통 박살내고, 이어서 조란환(현대의 클레이모어 산탄격인 새알 크기의 쇠구슬을 한번에 100~200개씩 발사, 판옥선 1척당 일 회 발사량은 2천 개다.)으로 합력사살(合力射殺) 했다. 영민한 이순신 장군은 사전답사 후 가장 좁은 폭 280m의 명량해협(울돌목) 양안에 ‘막게’를 박아 놓고, 수중 쇠사슬 ‘철쇄(鐵鎖)’를 연결해 몰래 숨겨 놓고 기다리다 왜군 대선단의 일진이 울돌목에 들어서자마자 체인에 걸려 좌충우돌 하게 한 후 일제히 함포사격을 가해 단 한 시간 만에 130여 척을 섬멸, 수장시켰다. 이순신 장군이 동아시아 총7년 대전쟁 임진왜란, 정유재란까지 31전 31승의 전설적인 불패신화를 이룬 것은 그 당시로는 전 세계에서 가장 앞선 화약무기로 현대전의 크루즈미사일 격인 대장군전, 장군전, 오늘날의 ‘K9 자주포’ 격인 천자총통, 지자총통, ‘강철비’의 MLRS의 자탄 클레이모어 격인 조란환(鳥卵丸)을 운용했다. 주력선인 <철갑 거북선> 및 <평저 판옥선>에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황자총통 대포, 대장군 대포, 블랑기 대포, 벽력 대포, 대완구, 별대완구, 총통대완구를 장착 원거리 타격법을 썼으며 현대 크루즈미사일의 원조격인 대장군전, 장군전, 중전, 자대전, 자중전을 300(~400)m 밖에서 발사 정확히 적선을 타켓팅해 Hit to Run 방식으로 관통했다. 현대전의 다연장로켓시스템(MLRS)인 승자총통, 팔전총통에다 장편전, 총탄을 동시다발 런칭한 ‘진일시집중타격법’은 세계해전사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임진왜란시 명나라의 진린 장군은 충무공 이순신의 절이도 해전을 산 최고봉에서 자신의 최측근 부장 등자룡과 관전했는데, 일사불란하게 일본군선 170척을 일거에 궤멸시키자 충무공에게 “통제사 그대의 탁월한 능력은 너무나 한도 끝도 없이 거대하오”라고 극찬하였다. 한산대첩에서 원사이드로 처참히 패한 적장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너무나 신출귀몰한 그의 전법에 전율하면서도 한편 흠모했다. 와가자카 야스하루는 이렇게 회고했다. “내가 제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모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 역시 이순신이며, 가장 차를 함께 하고 싶은 이도 바로 이순신 이다” 한편, 러일전쟁의 백미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완파한 일본의 전쟁영웅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 겸 해군원수는 승전 축사에 답하기를 “이순신 장군이 만약 나의 함대를 갖고 있었다면 그는 세계해상을 지배 했을 것이다. 나를 영국 해군 제독인 넬슨에 비하는 것은 가하나 이순신에 비하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극찬하며 경외(敬畏)를 표했다. 장황하게 이 글을 쓴 이유가 있다. 이순신 장군은 전쟁이 터지기 전부터 만에 하나라도 발발할지 모를, 전쟁에 필요한 많은 준비를 해 놓았기에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코로나 19라는 대란은 현재의 일일 뿐, 앞으로 또 일어날 전염성 질환은 또 언제 어떤 형태로 찾아올지 모른다. 이에 대한 대비는 철저한 기초과학과 이를 기반으로 한 의약산업의 육성에 달렸다. 전염병에 관한 한 우리의 명랑해전은 지금부터 준비해야 할 숙제다.
살기 좋은 도시란 도시 생활의 기본조건을 충족시키면서 다양한 문화와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제공하는 여유롭고 안전한 도시로 의미된다. 그리고 주민들의 생활수준이 향상되면서 삶의 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직접 행복도 추구하고 있다. 새해 벽두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각 기초지자체 주민들의 ‘사회안전체감도’를 측정한 ‘2021사회안전지수’가 발표돼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지수는 여론조사기관을 비롯한 복수의 기관이 기존 지자체의 안전수준을 평가하는 정부의 통계자료와 같은 객관적인 지수에 주민 설문조사와 같은 주관적인 지표를 활용해 도출한 내용이어서 의미 있다고 한다. 이 지수는 우리 사회의 안전에 영향을 주는 ‘생활안전’ ‘경제활동’ ‘건강보건’ ‘주거환경’ 등 4개 분야를 지표로 했다. 이 지수가 주목을 받는 것은 그동안 관례적으로 해온 통계를 통한 객관적인 지표보다는 지역 주민들이 생활하면서 직접 느끼는 만족도나 기대감 등을 반영했기 때문이다. 삶의 질이란 생활 전반에 대한 개인의 만족감이나 행복의 정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번에 발표된 ‘사회안전지수’ 순위를 보면 일반적인 지역의 경제적, 물리적 환경보다는 미래에 대한 안정과 행복, 심리적 안정 등에 따라 다르게 나왔다는 점이다. 이는 삶의 질이 단순히 경제적 기반이나 도시환경의 정량적 수치만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의 주관적 만족도에 따라 ‘살기 좋은 도시’의 기준이 달라 질 수 있다는 것을 방증하고 있다. 과거 살고 싶은 도시의 기준은 경제와 일자리, 주거여건, 쾌적한 도시환경, 교육여건, 생활안전 등이 잘 갖춰져 있느냐가 중요했다. 그러나 주민들이 삶의 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살고 싶은 도시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통계에 의한 객관적인 주민 만족도가 아닌 주민들이 스스로 느끼는 주관적 주민 만족도가 ‘살기 좋은 도시’의 기준이 된 것이다.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 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에 대한 욕구가 높아지면서 민선 단체장들은 ‘가장 살고 싶은 도시’ ‘행복도시’ ‘잘사는 도시’ ‘미래도시’ 등의 각종 슬로건을 공약으로 내걸고 정책을 추진해 왔다. 단체장들도 도시의 성장과 함께 살기 좋은 도시를 만들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내놓고 수행하는 것을 중요한 과제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 발표된 ‘사회안전지수’를 보면 기존에 알려졌던 ‘살기 좋은 도시’의 순위와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지수에 따르면 전국에서 ‘사회안전지수’ 1위를 차지한 용산구의 경우 객관적 지표에서는 10위였지만 주민들의 체감도가 반영된 주관적 지표에서 압도적 1위로 나왔다. 남원시의 경우 특별시와 광역시를 제외한 중소도시 중에서 가장 안전지수가 높게 나왔다. 특히 세부 지표 중 생활안전(4위), 건강보건(3위) 분야의 순위가 높아 주민 체감형 정책이 주효했기 때문이란 분석이 나오고 있다. 풍부한 역사문화유산과 쾌적한 자연환경을 갖춘 경주시. 살기 좋은 도시로 꼽자면 항상 최상위에 있다고 여겨왔던 경주시는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이번 ‘사회안전지수’ 분석에서 경주시는 조사대상인 155개 시·군·구 중 하위 그룹인 103위를 기록했다. 경북에서는 1위인 영주시(74위), 2위인 안동시(79위)에 이어 3위다. 경주시의 이 같은 결과는 주민들이 직접 생활하는데 불편하거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높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해 국회미래연구원이 개통한 ‘대한민국 행복지도’ 분석결과 경주시민들의 국민행복지수가 전국 228개 시·군·구 중 하위권에 머문 것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경주시의 낮은 ‘사회안전지수’는 주민들이 지역 내에서의 경제활동에 대한 소득 만족도가 떨어지고, 직업 만족도와 일자리의 안정성이 낮을 뿐만 아니라 생활안전도 기대에 미치지 못하다는 판단에서 나온 결과로 보여 진다. 또 도시 정비에 대한 각종 규제로 인해 주민들의 주거환경에 제약을 받고 있는 것도 요인일 것이다. 주낙영 경주시장은 해가 바뀔 때마다 지역 발전을 위한 전반적인 로드맵을 제시하고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주민들과 약속했다. 올해도 주 시장은 신년사를 통해 “시민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소통하며 시정에 담아내기 위해 최선을 다 하겠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주 시장이 ‘소통과 공감행정’을 강조한 것도 주민들의 지지가 소중하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2021년부터는 통계의 의존한 객관적인 지표를 올리기보다는 주민들이 경주에 살면서 행복을 체감할 수 있는 ‘살기 좋은 도시’를 지향하는 경주시를 기대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오페라의 발상지는 이탈리아의 피렌체이다. 17세기 초반에 로마에서 반짝 흥행을 주도했지만 교황이 있는 곳이라 규제가 심했다. 여성들이 무대에 설 수 없었고, 당대의 아이돌스타였던 카스트라토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인식이 강했다. 그 결과 전도유망한 작곡자들이 로마를 떠났고, 반사적으로 베네치아가 오페라의 중심지로 떠오르게 된다. 베네치아가 어디던가? 해상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상인들이 도시의 중심세력이었던 곳이다. 우리는 셰익스피어의 소설 <베니스의 상인>에서 귀족 못지않은 그들의 권세를 이미 목격했다. 탄생기의 오페라는 궁정에서 펼쳐지는 연희로 왕과 귀족들이 소비하는 그들만의 오락이었다. 하지만 자본과 더불어 교양까지 겸비한 상인들은 마침내 오페라를 볼 권리를 쟁취해 낸다. 1637년 베네치아에 오픈한 산 카시아노(San Cassiano) 극장은 평민이 티켓을 사서 입장한 최초의 상업극장이다. 평민들도 돈을 내면 얼마든지 오페라를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재미있는 건 평민들이 1층 공간을 차지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귀족들은 2층 이상에 위치한 박스석에서 오페라를 관람했다. 1층 좌석이 2층 이상의 자리보다 훨씬 비싼 오늘날과는 판이하다. 그 시절에 베네치아에만 22개의 극장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렇듯 베네치아는 오페라의 대중화를 실현한 도시이자 명실상부 세계 오페라의 수도였다. 하지만 공(功)이 있으면 과(過)도 있기 마련이다. 오페라의 초기 작품은 그리스 비극을 재현한 예술성 높은 작품들이 주류였지만, 오페라의 주도권이 상인으로 넘어가면서 점점 초심을 잃게 된다. 오페라 극장이 상인 주판알 튕기듯 수익성을 고려하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18세기에는 나폴리로 주도권이 넘어가려는 경향도 있었다. 하지만 정통 오페라의 본향으로서 베네치아의 지위는 쉽게 상실되지 않는다. 오늘날 베네치아(영어로 베니스)는 국제영화제나 비엔날레로 더 유명한 예술도시이다. 그런데 그 화려한 명성은 밀라노에게 주도권을 내주기까지 무려 300년 동안 세계 오페라의 중심에 우뚝 서있었던 베네치아의 내재적 예술역량에서 비롯된 것임을 이젠 쉽게 알 수 있다.
“건천서 정미소가 반 이상 줄었는데 우리 동네엔 아직 남아있지요” 경주에서 국도 4호선을 따라 건천방면 모량리를 지나면 유명한 고분군이 있는 마을이 나타납니다. 바로 금척리(金尺里)인데, 신라시조 박혁거세가 신인으로부터 받았다는 신비의 금자(金尺)가 묻혀있는 곳이라고 전해져 ‘금척(金尺)’으로 불린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했다고 하는 마을입니다. 멀리 금척리 고분군 바깥 외부 대로에서 이 마을을 바라보면 마을이 자그마하고 아기자기하게만 보입니다. 하지만 금척리의 위상은 골목안으로 잦아들어야 보이지요. 고분군의 명성만으로 이 마을을 평하기에는 문화 자산과 유산이 널려있는 ‘큰’ 동네입니다. 마을길도 여느 시골길과는 다르다는 인상을 풍깁니다. 넓고 번듯한 골목길이 시원스레 연결되고 마을 어디서든 이야깃거리가 넘쳐나는 알짜배기 명품 동네입니다. 금척리 주민들은 주로 논농사 외 포도농사를 짓고 찹쌀보리단지로도 유명하고 버섯을 생산하는 농가들도 다소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골목 한 켠 금척고분길 골목길에선 ‘금척정미소’ 라는 간판글씨가 수 십 년의 세월 탓인지 거의 지워지고 바래저서 어렴풋하게 보이는 정미소를 만납니다. 이곳 금척리 들판에서 수확한 벼와 보리 등 농산물을 찧어왔던 이 정미소는 여느 시골의 정미소보다는 그 규모가 제법 큰 편입니다. 보존 상태도 좋아서 아직 그 기능을 수행하는데 문제없어 보입니다. 정미소는 이 마을의 어느 개인에 양도됐지만 지금도 운영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마을에 이 정미소를 운영하는 분이 계십니다. 건천서 정미소가 반 이상 줄었는데 우리 동네엔 아직 남아있지요. 요즘은 벼 수확시 공동수매로 넘어가 실제로 가공할 것이 별로 없어요. 수매하기 15년 전까지는 일거리가 많았어요. 올해도 보리도 찧고 했지요. 옛날에는 이 정미소에서 국수면도 뽑았어요. 뻐얼건 면발의 국수가 맛있었지요” 길을 지나던 주민들의 전언입니다. 정미소 바로 맞은편에는 양곡 창고도 있었는데요. 아직 이 마을 주민들이 창고로 활용하고 있었습니다. 정미소 외부로 드러나 설치돼 있는 등겨(벗겨 놓은 벼의 껍질) 뽑아내는 기구가 참 정겹습니다. 함석으로 만들어 붉은 페인트칠을 한 이 기구는 칠이 벗겨져 얼룩덜룩 했지만 제 기능을 톡톡히 하는 듯 건장해보였습니다. 이곳은 한 때 이 마을의 핫 플레이스 였겠죠? 쌀을 빻으며 이전 저런 마을 사람들의 내밀한 이야기들도 오갔을 테니까요. 아직 남아있는 시골마을의 정미소들은 전국 많은 곳에서 문화공간으로, 상업 공간으로 환골탈태 하곤 합니다. 오래된 것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활용’으로 귀결되는 듯합니다만 금척정미소는 이 마을에서 아직도 유용하게 사용되는 작고 귀한 유산입니다. 글=선애경 문화전문기자 그림=김호연 화백
경주 남산을 따라 남쪽으로 가다보면 내남 이조리가 나오고, 이조교를 건너 전포(前浦)마을을 지나 경부고속도로를 우측에 끼고 농로를 달리다보면 월산마을이 나타난다. 월산은 달같이 둥근 산 아래 있는 마을로 ‘달미’라 불리며, 못골·너죽골·재량·미역골 등 자연부락이 산재해 있다. 월산리는 예전 고속도로를 내면서 마을이 동서로 나뉘는 수난을 당하였고, 월산 아래 재량못 가까운 곳에 여강이씨 재실인 월산정사(月山精舍:내남면 재량길 44-53)가 자리한다. 재실 주변에는 이정원(李正源,1914~1958)·이필원(李駜源,1921~?)·이완상(李完祥,1769~1805)·통덕랑 이혜중(李惠中,1704~1797) 등 수많은 무덤이 가지런하고, 마을에서 전하는 말에 ‘이필원이 선대의 산소를 외동쪽에서 이곳 월산으로 옮겨왔고, 재력을 들여 월산정사를 지었다’고 한다. 열린 대문 사이로 처마에 걸린 월산정사 현판이 선명하고, 내부에는 새롭게 판각한 월산정사 현판과 1976년 풍산 류석우(柳奭佑)의 기문과 영양 남귀락(南龜洛)이 지은 상량문과 시판 등이 걸려있다. 하지만 글에 등장하는 앙지정(仰止亭)의 흔적은 찾지 못해 아쉬웠다. 앙지(仰止)는 『시경(詩經)』「소아(小雅)」「거할(車舝)」의 “높은 산을 우러르고, 훌륭한 행실을 따라간다(高山仰止 景行行止)”에서 뜻을 취하였고, 위대한 선조에 대해 경배(敬拜)하고 흠모(欽慕)의 마음을 담았다. 정확히 언제쯤 월산정사가 건립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계(伊溪) 이기희(李紀曦,1863~1953)의 『이계집』권3, 「월산정사기(月山精舍記)」를 통해 1900년대 중후반으로 추정된다. 이계선생은 옥산문중 잠계 이전인(1516~1568)의 후손으로, 이희구(李僖久)의 거듭된 요청으로 기문을 지었고, 월산정사의 주인이 회재선생의 10세손 용수(慵叟)선생임을 밝혔다. 하지만 1976년에 지어진 류석우의 기문을 보면 후손 이필원이 선대의 무덤 아래에 10대조 계은공(溪隱公) 이기(李垍,1636~1706)와 9대조 우와공(寓窩公) 이덕표(李德標,1664~1745) 부자를 기린 곳이라 하였으니, 용수선생과 계은공의 관계확인이 필요한 상황이다. 그리고 앞서 계은공이 내남이조에 세거한 경주최씨 최진립의 후손과 혼인한 인연으로 울산과 가까운 이곳에도 여강이씨의 자취를 찾을 수 있다는 점이 단서가 된다. 또 우와공은 1699년 진사에 올랐고, 기개가 호탕하고 덕망과 행실을 고루 갖춘 문인으로, 1722년 신임옥사(辛壬獄事) 때 장희빈의 신원(伸冤)을 주장하는 소를 올렸고, 관서 용천으로 귀양가는 등 굴곡진 삶을 살다가 비로소 노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자연에서 묻혀 살았다. 우연히 지나다 바라본 산자락 사이로 옛 선비의 자취가 보였고, 그 흔적을 더듬어보니 지난 경주의 역사가 손에 잡혔다. 아직도 후대의 손길을 바라는 경주의 조선 선비 이야기는 2021년에도 계속될 예정이다. 월산정사기(月山精舍記) - 이계 이기희 동도의 남쪽 20리쯤에 월산(月山)이 있는데 그 산의 모습이 상현달과 같아서 이름지어졌으며, 용수(慵叟) 이(李) 공이 강학하던 곳이다. 공은 문원공 회재선생의 10세손으로 가학을 스스로 이어 학문연원의 바른길을 걸었고, 이미 훌륭한 자질과 뜻이 있었다. 절제된 행실은 고결하였고, 스스로 세상과 더불어 살아가지 못함을 알았다. 가난과 곤궁함을 이겨내고 오로지 경전을 정밀히 연구하였으며, 자신의 재능을 감추고 숨어 살면서 그곳에서 즐거워하며 평생을 살았다. 공은 일찍이 주역의 무궁함과 편절(編絶)의 남은 것을 갖고 도상(圖像)으로 상(象)을 드러내고, 주해(註解)를 더하였으며, 비록 고전(古傳)의 뜻을 말미암았으나, 고전의 뜻을 흐리지는 않았다. … 공께서 돌아가신 후에도 따라 배우는 여러 생원들과 멀고 가까운 사우(士友)들이 그를 위해 수계(修稧)하였는데, 지극한 정성 덕분에 월산 아래에 3칸 집을 짓고, 월산정사라 이름하고, 또 당의 북쪽에 앙지정(仰止亭) 3글자를 편액하였다. 북쪽을 뒤로하고, 남쪽을 바라보는 집의 창문과 방은 진실로 법도에 맞았다. 약간의 전토(田土)로 오랫동안 유지할 계획을 삼았고, 해마다 이곳에서 한 번 모여 공을 사모하였다. …주변에 스승과 벗이 없고 무리를 떠나서 거처를 찾는다면 잘못이 없기가 드무니, 이는 옛적 군자께서 글로 벗을 모으고, 인(仁)을 하도록 서로 도운 이유가 있는 것이다. 진실로 능히 때때로 마당에 물 뿌리고 쓸고, 당에는 책을 쌓아두고, 그 안에 고요히 앉아 서로 바라보며 각각 보고 들은 것으로 마주하여 질문하고, 의심나고 어려운 것을 구한다면, 지극히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저버림이 없을 것이다. 공께서 평소 여러 사람들에게 바라던 것은 아마도 이 정자가 세상의 가르침에 도움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 공사가 이미 마쳤으나, 기문이 없었고, 이희구(李僖久)의 간절한 거듭된 요청에 나는 공의 일에 대해 말솜씨가 없어 사양하였으나, 이에 감히 기문을 쓴다.
서울시가 2021년 1월부터 18세 이상의 서울 시민과 외국인 주민도 서울시와 산하기관에 대한 ‘시민감사’를 서울시 시민감사옴부즈만위원회에 청구할 수 있다. 서울시는 또 서울시에 등록된 외국인 주민에게도 감사권을 대폭 늘였으며 감사청구시 지금까지 오프라인 상에서 직접 서명 받아 제출하던 청구인 모집을 인터넷으로 할 수 있는 전자서명 청구 시스템도 운영된다. 서울시의 시민감사 제도는 서울시민이 서울시 및 서울시 소속행정기관이 행한 사무의 처리가 위법·부당하다고 판단될 경우 50명 이상의 연서를 받은 대표자 및 상시 구성원 수 100명 이상인 시민사회단체의 대표자를 통해 감사 청구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이것을 지금까지 만 19세 이상부터 할 수 있던 것을 2020년 초 공직선거법이 개정되어 각종 선거연령이 19세에서 18세로 하향되는 사회적 변화에 맞추어 18세 이상으로 낮춘 것이다. 서울시는 또한, 출입국관리법에 따라 서울특별시 관할구역의 외국인등록대장에 등재되어 서울시에 거주하는 외국인 주민도 같은 권한을 부여한다고 공지했다. 이로 인해 기존 영주권을 취득한 지 3년이 경과하고 각 지방자치단체의 외국인등록대장에 등재된 사람에게만 주어지던 감사청구권이 보다 넓어졌다. 뿐만 아니라 서울시는 온라인을 통한 청구인 모집과 청구가 가능해진다. 이에 대비해 서울시는 지난 4일부터 서울시 시민감사옴부즈만위원회 누리집(ombudsman.seoul.go.kr)에 온라인청구시스템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시간선택제 임기 제공무원으로서 3년간 시민의 권익옹호와 시정감시를 수행하는 시민감사옴부즈만 채용 자격요건도 넓어졌다고 밝혔다. 기존에는 변호사나 기술사 등 전문자격을 갖춘 사람과 함께 비영리민간단체에서 근무한 경력자를 시민감사옴부즈 채용자격을 주었는데 이번 개정으로 비영리민간단체가 아니더라도 공익법인과 같은 비영리법인에서 일정기간 근무한 경력자도 옴부즈만이 될 수 있도록 문호가 넓어진 것이다. 이러한 감사권에 대한 확대 및 감사옴부즈만 채용 자격 확장은 청렴하고 공정한 서울시정 운영을 가속화하려는 선제적 조치다. 서울은 지난 해 말에 발표된 국민권익위 청렴도 조사에서 종합청렴도와 외부청렴도에서 각각 2등급을 받았다. 종합첨렴도는 지난 해 3등급에서 한 등급 오른 것. 경주는 종합청렴도와 외부청렴도에서 다행히 각각 3등급을 받아 지난 해 각각 5등급에서 2단계 올랐다. 좀 더 청렴한 경주가 되기 위해서는, 그리고 1만명 가까운 외국인을 위해서도 시민감사단 제도가 활성화 되고 감사단의 자격도 서울처럼 넓어져야 하지 않을까?
통일전은 경주시 남산동 920-1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총 면적 6만6000㎡ 건평에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주역 위인을 모셨다. 신라 29대 태종무열왕, 30대 문무왕, 태대각간 김유신장군 세분의 영정이 봉안돼있다. 세분의 위업을 선양하며 분단된 조국통일의 실현을 기원함이 설립 목적이다. 고 박정희 대통령 시절, 1976년 4월 22일 착공하여 1977년 9월 7일 개관하였다. 건물본전 통일전(統一殿) 현판(懸板) 휘호는 박정희대통령 친필이다. 건물양식은 신라시대 양식을 재현했다. 동궁과 월지, 황룡사지, 발굴 출토유물 등을 고증하여 축조했다. 정문을 들어서면, 소나무 등나무 산비탈 울창한 숲을 병풍삼아 고풍스런 정자를 낀 연못이 발길을 끈다. 넓은 마당 태극기 펄럭이는 정원주위로 태종무열왕, 문무대왕, 김유신장군 사적비가 위풍당당하다. 삼국통일의 주역 세분 위인의 업적을 기록한 비다. 무열왕 사적비 전면은 태종무열왕릉비의 글씨체다. 문무대왕 사적비 전면은 중국 오나라 명필 천발신참비 글씨체다. 후면은 용비어천가 글씨체다. 김유신장군 사적비 전면은 진흥왕순수비 황초령비, 후면은 월인석보 한글체다. 비문은 이선근 박사가 짓고, 글씨는 서예가 김응현이 썼다. 돌계단을 밟고 오르면 통일전의 외삼문인 흥국문(興國門)이다. 현판휘호는 서예가 조수호 글씨다.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을 통일한 황금기국가의 기상과 융성함을 이룩하였다는 뜻에서 흥국문이라 명했다. 통일신라의 위상을 상징한 연화문 숫막새, 당초문 암막새 기와로 지붕을 얹었다. 운공첨차(雲空檐遮) 소슬대공을 한 최고의 건물양식이다. 추녀마루 문손잡이는 용면(龍面)을 설치하였다. 통일전 내삼문인 서원문(誓願門)을 올라 앞을 내다보면, 속이 확 트이는 상쾌감이 밀려온다. 멀찌감치 건너다보이는 쭉 뻗은 가로수 길로 양옆 은행나무가 나이테를 자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봄이면 은행잎 푸른 기운이, 가을이면 샛노랑 잎이 한 폭의 풍경으로 장관을 이룬다. 여름날 울창하게 젖어드는 경치를 안겨주고, 겨울시린 바람에도 곧은 키 멋있는 나목들로 계절을 휘감고 간다. 서원문의 휘호는 서예가 최정균 글씨다. 통일신라시대 불국사의 청운교 백운교 양식을 따와 돌계단 형식을 축조했다. 소슬대공과 운공첨자 건축에 기와를 이은 내삼문 안으로 발을 들인다. 경건함에 발자국 소리 낮추는 자세가 저절로 목례를 치르게 한다. 삼국통일의 성업과 호국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조국통일을 염원하고, 그 실현을 맹세하자는 뜻에서 서원문이라 명했다. 향을 사르는 향료높이로 희미한 연기가 번진다. 위인을 기리는 숨결이 흐르는듯하다. 고 박정희 대통령 친필 휘호 현판 ‘통일전’ 본전건물 가득 향내음 은은하다. 무열왕⦁문무왕⦁김유신장군 영정이 모셔진 벽면이 위엄으로 차오른다. 백제 660년, 고구려 668년, 당나라 군대를 물리친 676년, 꿈꾸던 통일은 새로운 역사를 낳았다. 참으로 위대한 민족인 것을 후손들이 놓쳐버려 애닮은 통일이다. 그리하여 후손들로 하여금 역사를 빛낸 위인들을 추모하고, 통일의 꿈을 살피라 이른 통일전이다. 천 년 전 조상님들이 민족지간에 싸우지 말고 오순도순 살고파 피땀 흘려 화합한 통일의 정체성을, 후손들이 잘 보존하지 못하고 총을 겨누는 민족으로 갈라섰으니 참으로 선조님께 죄스럽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기록은 말한다. 신라 30대 문무왕이 일통삼한(一統三韓)대업을 완성하기까지, 부왕(父王)인 29대 무열왕이 통일의 초석을 잘 다져놓았다고. 그리고 외삼촌인 김유신장군의 공덕도 한량없음을 서술한다. 봉안된 영정은 문무왕을 중심으로 오른편엔 태종무열왕, 왼편엔 김유신장군 영정이 모셔져 있다. 왕은 금관을 쓰고, 요대(腰帶) 요패(腰佩)도 금제품이다. 의복은 비단으로 지은 자색 빛깔의 신라의상이다. 태종무열왕 영정은 60세 때, 문무왕 영정은 40세 때의 모습을 추정해서 그린 김기창 화백 작품이다. 김유신장군 영정은 은관(銀冠)을 쓰고 요대 요패도 은제품이다. 사후인 흥덕왕때 흥무대왕으로 추존되었지만, 삼국사기 기록엔 왕으로 승격된 구체적 서술이 없다. 본전 ‘통일전’ 건물 양옆으로 늘어선 회랑은 호국불교의 원당 양식으로 조성하였다. 바닥에는 보상화문 전돌을 깔았다. 회랑벽면 설치된 그림들은 삼국통일 전후의 기록들을 전시하고 있다. 김유신장군 단석산 수련도, 김유신장군과 천관녀도, 김유신장군 출전도, 무열왕 남천정 출전도, 강수 외교문서 작성도, 원광법사 세속오계 교화도, 삼국통일 영광도, 평양성 함락도, 매초성 당군 격멸도, 기벌포 대첩도, 문무왕 호국해룡도, 사천왕사호국불사도, 원효군사 자문도, 화랑 관창 용전도, 황산벌 혈전도, 남산성 축성도, 황룡사 9층탑 조영도 등 삼국통일의 과정을 그린 17점의 기록화다.
지난 1월 1일자 푸르른지역아동센터를 운영하는 송경호 목사 페이스북에 흥겨운 춤영상이 올라왔다. 송경호 목사와 센터의 어린이 세 명이 함께 추는 춤이었다. 글의 제목에는 ‘삼천칠백팔십육만원’이라는 금액이 적혀있었다. 이 포스팅에 5일 현재 무려 310개의 ‘좋아요’와 161개의 댓글이 달렸다. 본지가 셔블&서울·경주사람들 98회로 보도했던 ‘푸르른지역아동센터’ 어린이들과 송경호 목사(좋은씨앗교회)의 도전이 결실의 첫 단추를 꿰었다. 지난 9월부터 푸르른지역아동센터 아이들은 송경호 목사와 함께 ‘아동학대’로 괴로워하는 또 다른 아이들을 구하자는 의미에서 출발한 ‘지켜줄게 너를 – 마음을 담은 노래2’ 앨범제작과 전국 콘서트 투어를 기획하겠다는 꿈을 세웠다. 모금 방법은 인터넷 펀딩인 ‘텀블벅’과 직접 송금, 12월 31일 자정까지 진행된 이 모금의 결과가 마침내 드러난 것이다. 전체 모금액수는 텀블벅과 송금을 더해 3786만원이다. 송경호 목사가 페이스북에 쓴 말대로 ‘우리가 함께 만든 출발선’이 마침내 그 출발선에 선 것이다. 송경호 목사가 아이들과 함께 춘 춤은 목표한 금액대로 모금액이 모아지면 그 답례로 춤을 추겠다고 한 모금 전의 약속을 지킨 것. 이 모금으로 인해 앞으로 푸르른 지역 아동센터의 어린이들은 ‘마음을 담은 노래2’를 만들게 됐고 ‘음원챠트돌격대’를 만들어 전국을 순회하며 아동학대 예방을 위해 간절한 노래를 부르게 될 것이다. 한편 이에 앞서 12월 비용이 마련된 이외에 또 다른 놀라운 소식도 함께 전해졌다. 유명가수인 김현철 씨, 홍경민 씨, 박기영 씨, 김훈희 씨 등이 이 노래 녹음에 참여하기로 한 것. 송경호 목사는 이들의 참여에 대해 ‘함께 하는 힘이 만들어 낸 기적’이라며 “이들의 참여로 보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이 음반 녹음과 앞으로 전개될 콘서트에 참여하게 됐다”며 의미를 전했다. 한해의 시작과 함께 전해진 이 따듯한 소식과 ‘아주 어설퍼 보이는’ 아이들과 송목사의 춤에 페이스북 친구들은 환한 웃음으로 이 도전의 성공을 축하했다. 우리 세상은 분명히 살 만한 곳이고 이들을 통해 더 많은 학대아동들이 다시 웃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선다.
(주)경농중앙연구소(소장 김태준)가 지난달 23일 앞두고 지역 아동시설인 성애원에 쌀 30포(20kg들이)를 후원했다. (주)경농중앙연구소는 지난해부터 성애원 아이들을 위한 후원을 이어오고 있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성애원을 방문하지는 못하고 쌀만 시설에 후원했다. 성애원 관계자는 “코로나19로 대부분의 후원이 끊어진 상태였는데 (주)경농중앙연구소에서 지속적인 후원을 약속해주셔서 너무 감사하다”며 “시설의 특성상 많은 아이들이 거주하고 있다. 다른 것도 아닌 쌀을 후원해주셔서 한편으로 마음이 든든하다. (주)경농중앙연구소에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고 말했다. 김태준 소장은 “코로나 상황에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만큼 아이들이 추운 겨울을 지내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후원하게 됐다. 성애원 아이들이 밥이라도 모자라지 않게 먹을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후원하겠다”고 전했다. 한편 1987년 설립된 (주)경농중앙연구소는 연구동, 제제공정동, 독성연구동, 유리온실 등 1300여평의 건물을 가지고 있으며 전작, 소독, 과수포장 등 4000여평의 포장을 현재 운영하고 있다.
설경미(54) 씨의 삶은 오늘도 특별한 기도로 시작한다. “매일 글을 쓰면서 살 수 있게 해주세요. 제 삶의 행복은 글을 계속 쓰는 것입니다”고 전한 그녀는 고등학교 졸업을 하면서 글은 20여년 헤어져 있었다. 2013년 남편을 영원히 볼 수 없는 곳으로 보내고 목욕, 식사, 빨래 등 고단한 삶을 잊을 수 있기를 바라며 힘든 봉사활동을 나섰던 그녀. 어느 순간 스멀스멀 올라오는 멈췄던 글은 새로운 삶을 이끌었고 2014년 경주문예대학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언제부턴가 빨간불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횡단보도에서 허공에도 중얼거렸습니다. 글을 쓰며 살 수 있게 해달라고! 힘이 돼달라고! 그것은 내 가슴에 영원한 신앙 같은 어머니께 매달리는 소리였습니다. 간절함 끝에 볼을 타고 내리던 눈물이 고비마다 나를 일으켰고, 그렇게 견딘 시간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심사평에서 이정환, 이달균 시조시인은 “두 가지 관점에 중점을 두면서 심사에 임했다. 첫째는 신인다운 패기와 참신함, 둘째는 시조적 정체성을 얼마나 잘 지켜냈는가로 초점이 맞춰졌다"면서 “거문고 타는 섬의 그리움, 수미쌍관 형식으로 잘 갈무리됐다. <다시 슬도에 와서>는 갯바람과 파도 소리가 거문고 소리로 들린다는 섬 이름에 기인한 사연들을 기승전결 4수로 잘 갈무리한 수작이다”고 극찬을 했다 이어 “구와 구의 마디도 안정감이 있고, 장과 장의 알맞은 매듭 처리로 인해 여운도 깊다. 또한 거문고 소리를 애절한 그리움으로 보고 수미쌍관 형식으로 처리한 것도 탄탄한 습작의 시간이 엿보여 당당히 당선의 영예를 차지했다”고 덧붙였다. 설경미 당선자는 “문학의 뿌리 역할을 해준 분이자 은사이신 정민호 선생님, 경주문예대학 교수님들 고맙습니다. 함께 수학했던 문우들, 내 인생의 영원한 지지자인 딸에게도 정말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아마도 이분들과 함께여서 오늘의 영광이 내게 찾아왔나 봅니다. 연말이면 늘 풀 죽어 절인 배추처럼 다녔던 때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5년은 가히 짧지 않았고, 그동안 시조라는 산은 벼랑도 꼭대기도 골고루 보여주며 내가 얼마나 버티고 견디는지를 시험하기에 충분했습니다”고 말했다. 설경미 작가는 경주문예대학 연구반 회원으로서 2018년 5월 중앙시조백일장 입상, 2018년 제21회 대구시조 공모전 장원, 2019년 10월 중앙시조백일장 장원 등을 수상한 바 있다.
대중음악은 우리 삶에서 지금도 현재 진행형으로 생성되고 작용하며 줄곧 이어져간다. 거기엔 시대와 역사와 민중 생활사의 숨결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소중하고 고귀한 문화사적 성과를 이룩하고 축적해왔다. 우리 가요는 유행가, 신가요, 대중가요, 트로트 등으로 불려온 노래 양식이 그동안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왔던 온갖 외래적 요소와 갖가지 혼합, 혼종, 혼혈의 과정을 겪으며 현재의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우리가 힘들었던 시련의 세월을 잘 이겨내고 100여년이 넘는 한국 대중음악사의 오늘에 다다르게 된 것처럼 노래 또한 고난의 역사를 너끈히 견디어 오늘에 당도한 것이다. 시대가 흐르면 한 지역을 대표하는 가요작품들이 종종 발표되곤 한다. 우리 지역에 시그니처가 될 만한 노래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 지역민에게 큰 자부심을 가져다준다. 그렇다면, 경주를 테마로 노래한 유행가는 언제부터 발표되었으며 대표곡은 무엇이며 어떤 곡들이 있을까. 1931년 발표된 ‘마의태자’부터 최근의 ‘경주아가씨’까지 경주를 소재로 다룬 곡들은 상상 이상으로 많았다. 이번호에서는 먼저 1931년~1970년대까지의 경주 노래를 다루었다. 본 기사는 시인이자 국문학자(영남대 명예교수, 계명문화대 특임교수)인 이동순 선생의 신간 ‘노래 따라 동해 기행(2020, 걷는사람, 이동순 지음)’과 대구은행 지역지 ‘향토와 문화’ 제96호(유행가)에 선생이 게재한 글에서 인용하고 발췌해 재구성했음을 밝혀둔다. ‘노래 따라 동해 기행’은 경상북도 동해안 지역의 울진, 영덕, 포항, 울릉, 경주 등 5개 지역을 다룬 노래를 선별해 작품의 미학적 측면을 음미하며 특성을 정리해 집필한 책이다. -환동해권 지역 가운데 대중가요가 가장 많이 탄생한 곳은 경주가 단연 으뜸, 경주를 테마로 가장 먼저 발표된 작품은 ‘마의태자(1931년)’ 예로부터 자연환경이 아름다운 고장에는 반드시 아름다운 노래가 태어난다고 일렀다. 경상북도의 주요지역 중 바다에 연접해 있는 5개 지역(울진·영덕·포항·울릉도와 독도·경주)을 통틀어 환동해권이라 부른다. 환동해권 지역가운데 대중가요가 가장 많이 탄생한 곳은 단연 경주가 으뜸이다. 1931년 2월, ‘마의태자(이은상 작사, 안기영 작곡·노래)’는 우리 지역 경주를 테마로 가장 먼저 발표된 곡이다. ‘그 나라 망하니 베옷을 감으시고/그 영화 버리니 풀뿌리 맛보셨네/애닯다 우리 태자 그 마음 뉘 알고/풍악산 험한 골에 한 품은 그 자최/지나는 길손마다 눈물을 지우네/태자성 옛터엔 새들이 지저귀고/거하신 궁들은 터조차 모를도다/설워라 우리 태자 어데로 가신고/황천강 깊은 물에 뿌리신 눈물만/곱곱이 여울 되어 만고에 흐르네//’ 이 노래가 발표된 당시는 나라의 주권이 일본에 강탈당한 시절이라 신라 마지막 왕위를 계승했을 ‘마의태자’ 테마가 대중들의 정서에 은근한 호소력을 지녔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 곡의 작사자 이은상은 시조 시인이다. 이 노래를 작곡하고 직접 노래한 안기영은 1900년 충남 청양 출생. 이어, 또 한 곡의 마의태자가 발표된다. 1934년, ‘마의태자(유도순 작사, 김준영 작곡, 미스코리아 노래)’가 그것이다. ‘풀 옷을 몸에 감고 금강에 해 지우니/망군대 바윗돌에 새긴 뜻 한숨짓네/명경대 맑은 물에 손 씻고 일어나니/천 리 밖 경주성이 눈물에 어리운다//’ 이 노래는 1931년 안기영의 <마의태자>가 발표되고 3년 만에 나온 또다른 마의태자 테마곡이다. 이처럼 한국 가요사에는 같은 제목으로 마의태자를 노래한 곡들이 다수 있다. 이 곡을 노래한 미스코리아의 본명은 김추월이다. 평양 기성 권번 출신으로 알려졌으며 왕수복, 선우일선처럼 기생 활동을 하다가 가수로 발탁되었다. 마의태자 설화는 대중의 심금을 울리고 연민을 자아내는 매우 유용한 소재였다. 미스코리아가 애절한 목소리로 노래한 이 곡은 JODK, 즉 경성방송국 전파를 타고 일본 전역으로 방송되기도 했다. 나라 잃은 시기, 마의태자 설화를 바탕으로 엮은 마의태자는 은근히 망국의 슬픔과 서러움을 불러일으키는 효과로 작용하기도 했다. -‘경주 나그네’, 본격적으로 경주 다룬 노래...경주의 유적유물이 다양하고 광범위하게 노랫말에 표현 1942년, ‘경주 나그네(이가실 작사, 이운정 작곡, 이규남 노래)’ ‘초금에 마음 싣고 꽃을 꺾으며/반월성 넘어가는 경주 나그네/가는 봄 오는 봄아 말 물어보자 첨성대 추녀 끝에 별이 몇 개냐/서형산 바라보며 회파람 불고/안압지 돌고 도는 경주 나그네 풀 캐는 아가씨야 말 물어보자/화랑이 풍류하던 곳이 어데냐/개왓장 하나 집어 품에 안고서 풀피리 불고 가는 경주 나그네/에밀레종 소리야 말 물어보자/포석정 띄운 잔이 몇 잔이더냐//’ 이 곡은 본격적으로 경주를 다룬 노래라 할 수 있다. 1942년 8월 콜럼비아레코드에서 발매된 이규남의 노래로 반월성, 첨성대, 서형산, 안압지, 에밀레종, 포석정 등 경주의 유적·유물들이 다양하고 광범위하게 노랫말에 수용되어 있다. 어느 봄날, 화자가 경주의 여러 유적지를 답사하며 역사의 의미와 본질에 대해 궁금증을 제시하는 화법으로 노래를 엮어가고 있다. 이 노래 이후 해방을 맞고는 보다 다양한 양상의 노래들이 선보인다. 신라의 달밤을 필두로 해서 8·15해방 이후 경주 테마, 신라 테마 노래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신라 천년(백일평), 신라의 북소리(도미), 신라의 칼(신세영), 신라제길손(백년설), 님 그리운 망부석(이미자)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신라의 달밤’, 모든 경주테마곡 가운데 최고의 상징적인 노래로 당시 청년 세대의 대단한 호응을 얻으며 단숨에 최고의 인기곡으로 부상 1947년, ‘신라의 달밤(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현인 노래)’은 모든 경주테마곡 가운데 최고의 상징적인 노래로 자리를 잡았다. ‘아 신라의 밤이여/불국사의 종소리 들리어온다/지나가는 나그네야 걸음을 멈추어라/고요한 달빛 어린 금오산 기슭에서/노래를 불러보자 신라의 밤 노래를/아 신라의 밤이여/화랑도의 추억이 새롭구나/푸른 강물 흐르건만 종소리는 끝이 없네/화려한 천 년 사직 간 곳을 더듬으며/노래를 불러보자 신라의 밤 노래를/아 신라의 밤이여/아름다운 궁녀들 그리웁구나/대궐 뒤에 숲속에서 사랑을 맺었던가/님들의 치마 소리 귓속에 들으면서/노래를 불러보자 신라의 밤 노래를//’ 8·15해방 직후인 1947년에 발표된 이 노래는 새로운 감각과 발랄한 생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 노래는 단조 위주의 식민지시대 트로트가 해방 정국에 부적절하다는 인식이 크게 작용하던 시절이다 보니 작곡자 박시춘이 새로운 감각과 창법을 가진 가수를 적극 물색하던 중 한 나이트클럽 공연에서 현인을 발탁해 이 노래를 부르게 한 것이다. 원곡을 가만히 들어보면 그야말로 경주의 밤하늘에 뜬 보름달과 그 아래 묵묵히 잠들어 있는 불국사, 석굴암, 다보탑, 첨성대, 반월성, 안압지 등의 유적지와 역사적 명소들이 잔잔히 응답하는 듯한 생동감을 갖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이런 귀한 민족사의 전통을 지니고 있는 전체 한국인들의 긍지와 자부심을 일깨우는 효과로도 작용한다. 작곡가 박시춘은 해방 정국 격동의 분위기에 제대로 부응하는 너무도 적절한 가수를 뽑았다며 자신감을 얻었다. 과연 이 노래는 당시 청년 세대의 대단한 호응을 얻으며 단숨에 최고의 인기곡이 되었다. 성악을 전공한 음악도였던 현인의 성악에 바탕을 둔 창법은 신민요나 트로트 등과 달리 시원한 맛을 내며 해방 이후 가요계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신라와 관련된 시적 장치와 소도구들 다양하게 구사하고 문무왕의 다짐과 결의 다루기도 1952년, ‘신라제 길손(손로원 작사, 이병주 작곡, 백년설 노래)’은 6·25전쟁 당시 북에서 남으로 피난 내려온 실향민의 애달픈 향수를 달래주는 작품이다. 실향민의 심정을 실감 나게 그려낸 작사가 손로원의 노랫말이 돋보이는 곡이다. 이어, 1953년엔 ‘신라의 칼(손로원 작사, 한복남 작곡, 한정무 노래)’이, 1959년에는 ‘신라의 북소리(야인초 작사, 박시춘 작곡, 도미 노래)’가 발매된다. ‘서라벌 옛 노래냐 북소리가 들려온다/말고삐 매달리며 이별하던 반월성/사랑도 두 목숨도 이 나라에 바치자/맹세에 잠든 대궐 풍경 홀로 우는 밤/궁녀들의 눈물이냐 궁녀들의 눈물이냐/첨성대 별은/화랑도 춤이더냐 북소리가 들려온다/’ -하략. 이 노래는 신라와 관련된 시적 장치와 소도구들을 다양하게 구사한다. 서라벌의 북소리, 반월성의 말 달리는 함성, 화랑과 원화의 훈련 소리, 첨성대의 별, 북소리, 금오산, 해마다 열리는 신라문화제 행사 등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작사가 야인초(본명 김봉철)는 경주 신라문화 축제 현장을 두루 답사한 경험이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가사를 썼을 것이다. 1966년에는 ‘님 그리운 망부석(반야월 작사, 서영은 작곡, 이미자 노래)’가 발표되었고 1979년에는 ‘대왕암(김주영 작사·작곡, 김주영 노래)’이 선을 보였다. ‘모래성을 뭉개듯 남북 삼천리/황금 투구 북소리 울리던 그날/그 큰 뜻에 하늘은 다시 맑았고/한 나라의 성업은 이룩됐어라/뭍으로 적을 막아 베이던 기개/죽는다고 내 나라를 모른다 하랴/마음속엔 또 하나 바다를 지켜/죽어서도 그 몸이 용이 됐어라//’ -이하 하략. 이 노래는 1979년 당시 안성농업전문대 학생이던 김주영이 제3회 MBC 대학가요제에 출전해 금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김주영은 대왕암을 테마로 삼국 통일의 업적과 성과, 죽어서까지 국가를 보위하겠다는 문무왕의 다짐과 결의 등을 감격적 화법으로 엮어냈다. 다음호에서 경주를 테마로 다룬 대중가요 하(下)편이 이어진다.
경주시는 이달부터 생계급여를 수급하는 가구에 노인과 한부모가 있으면 부양의무자 기준을 적용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기초생활보장제도상 생계급여를 수급하는 노인·한부모 가구에 1촌의 직계혈족이나 배우자 등 ‘부양할 수 있는 가족’이 있으면 수급자로 선정하지 않았던 기준을 폐지하지만 부양의무자가 연 소득 1억원 이상이거나 9억원 이상의 부동산을 소지하고 있을 시에는 현행 기준을 적용된다. 대상자는 부양가족이 있다는 이유로 급여를 받지 못하거나, 부양의무자의 부양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입증해야 하는 부담에 신청을 주저했던 가구며 기존 수급자 가구에 대해서도 추가 지원이 이뤄질 전망이다. 기초수급 선정기준인 소득 인정액 기준도 완화돼 생계급여의 경우 ▲1인 가구는 월 54만 8349원 ▲2인 가구는 월 92만 6424원 ▲3인 가구는 월 119만 5185원 ▲4인 가구는 월 146만 2887원으로 적용돼 생계급여가 지급된다. 이번 조치로 만 30세 미만 한부모 가구뿐만 아니라 만 30세 이상 한부모 가구에 대한 부양의무자 기준도 함께 폐지되며, 내년부터는 이를 전체 가구로 확대해 모든 부양의무자 기준을 폐지할 예정이다. 그동안 복지사각지대로 지적됐던 생계급여 부양의무자 기준이 단계적으로 폐지는 것이다.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에 따라 신규 지원 대상이 된 가구는 주민등록상 주소지 소재의 주민센터에서 신청할 수 있다. 문의 사항은 시·군·구청, 읍·면·동 주민센터 또는 보건복지부 상담센터(국번없이 129번)에서 안내받을 수 있다. 서정보 경주시 복지정책과장은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로 생계급여를 받지 못했던 대상자를 추가로 지원하게 될 것이며, 기초생활보장제도 자격요건 완화로 복지사각지대의 많은 시민들이 혜택을 받기를 기대한다”며, “더욱 촘촘한 사회안전망을 조성해 어려운 형편의 대상자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장애인들의 건강한 일상생활 유지와 자립지원을 위해 보건복지부는 2021년부터 장애인 복지정책이 달라진다고 밝혔다. 먼저 장애인 활동지원 서비스를 확대, 강화한다. 활동지원 서비스의 내실화를 위해 단가를 현실화하기 위해 단가를 지난해 1만3500원에서 1만4020원으로 올리고, 대상자도 9만1000명에서 9만9000명으로 확대한다. 최중증 장애인을 지원하는 활동지원사에게 지급되는 가산급여 대상자와 급여도 지난해 2000명에서 3000명, 지난해 1000원이었던 단가도 1500원으로 늘었다. 또한 장애인 활동지원 수급자가 65세 이후 노인장기요양 수급자로 전환돼 급여가 감소한 경우 활동지원 서비스를 제공한다. 장애아동에 대한 발달재활서비스도 지원이 확대된다. 장애아동(시각, 청각, 언어, 지적, 자폐성, 뇌병변) 발달재활서비스 지원 대상을 기존 6만1000여명에서 4000명을 확대해 6만5000명을 지원한다. 현재 기준 중위소득 180% 이하 장애아동 가구를 대상으로 지원하며, 본인부담금은 기초생활수급자는 면제, 차상위계층은 2만원, 차상위 초과~기준 중위소득 65%이하는 4만원, 65% 초과 120%이하는 6만원, 120%초과 180%이하는 8만원 등이다. 지급급액은 월 22만원이며 장애아동 2명 이상, 부모 중 1명 이상이 중증장애인인 가정은 시·군·구청장 인정시 소득기준을 초과해도 지원이 가능하다. 단 본인부담금은 8만원이다. 성인 및 청소년 발달장애인의 의미 있는 낮시간, 방과후시간을 보장하고, 보호자의 돌봄 부담 경감을 위해 서비스 지원을 확대했다. 주간활동은 만 18~64세 성인 발달장애인에게 지원하며, 대상자를 4000명에서 9000명으로 늘렸다. 이들에게는 대상자 특성에 따라 1일 2.5시간~6시간, 월 100시간 주간활동서비스 바우처, 문화·예술·스포츠·외부활동 등을 지원한다. 방과후활동은 만 12~17세 청소년 발달장애인에게 지원하며, 지난해 7000명에서 올해 1만명으로 확대했다. 대상자들에게는 취미·여가, 자립준비, 관람·체험, 자조활동 등을 월 44시간의 방과후활동서비스 바우처를 지원한다. 도전적 행동 등으로 그룹활동이 어려운 최중증 발달장애인의 주간 활동서비스 이용지원을 강화하기 위해, 가산급여를 3000원 추가 지급한다. 그룹활동에 참여가능하도록 전담 제공인력도 배치할 방침이다. 장애인 소득 보장도 강화된다. 저소득 중증장애인에 대한 소득보장 강화를 위해 전체 수급자에게 장애인연금 기초급여액을 월 25만원에서 30만원으로 인상했다. 장애인 일자리 급여도 지난해에 비해 1.5%(전일제 기준) 인상함으로써 장애인이 보다 안정된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그동안 장애 인정 필요성이 계속해서 제기됐던 복합 부위 통증 증후군(CRPS) 등 10개 질환 대상으로 장애 인정 기준을 마련하고 인정 질환을 확대 추진한다. 10개 질환은 ▲간신증후군 ▲정맥류출혈 ▲CRPS(복합부위통증증후군) ▲백반증 ▲중증의 복시 ▲배뇨장애(완전요실금) ▲기질성 정신 및 행동장애 ▲강박장애 ▲뚜렛장애 ▲기면증 등이다. 또한 현재 장애 범주 및 판단 기준 때문에 인정이 되지 않는 사례는 올 4월부터 개별 심의 후 예외적으로 심사 및 인정하는 ‘예외적 장애인정 심사 절차’가 새롭게 도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