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을 따라 남쪽으로 가다보면 내남 이조리가 나오고, 이조교를 건너 전포(前浦)마을을 지나 경부고속도로를 우측에 끼고 농로를 달리다보면 월산마을이 나타난다. 월산은 달같이 둥근 산 아래 있는 마을로 ‘달미’라 불리며, 못골·너죽골·재량·미역골 등 자연부락이 산재해 있다. 월산리는 예전 고속도로를 내면서 마을이 동서로 나뉘는 수난을 당하였고, 월산 아래 재량못 가까운 곳에 여강이씨 재실인 월산정사(月山精舍:내남면 재량길 44-53)가 자리한다. 재실 주변에는 이정원(李正源,1914~1958)·이필원(李駜源,1921~?)·이완상(李完祥,1769~1805)·통덕랑 이혜중(李惠中,1704~1797) 등 수많은 무덤이 가지런하고, 마을에서 전하는 말에 ‘이필원이 선대의 산소를 외동쪽에서 이곳 월산으로 옮겨왔고, 재력을 들여 월산정사를 지었다’고 한다. 열린 대문 사이로 처마에 걸린 월산정사 현판이 선명하고, 내부에는 새롭게 판각한 월산정사 현판과 1976년 풍산 류석우(柳奭佑)의 기문과 영양 남귀락(南龜洛)이 지은 상량문과 시판 등이 걸려있다. 하지만 글에 등장하는 앙지정(仰止亭)의 흔적은 찾지 못해 아쉬웠다. 앙지(仰止)는 『시경(詩經)』「소아(小雅)」「거할(車舝)」의 “높은 산을 우러르고, 훌륭한 행실을 따라간다(高山仰止 景行行止)”에서 뜻을 취하였고, 위대한 선조에 대해 경배(敬拜)하고 흠모(欽慕)의 마음을 담았다. 정확히 언제쯤 월산정사가 건립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계(伊溪) 이기희(李紀曦,1863~1953)의 『이계집』권3, 「월산정사기(月山精舍記)」를 통해 1900년대 중후반으로 추정된다. 이계선생은 옥산문중 잠계 이전인(1516~1568)의 후손으로, 이희구(李僖久)의 거듭된 요청으로 기문을 지었고, 월산정사의 주인이 회재선생의 10세손 용수(慵叟)선생임을 밝혔다. 하지만 1976년에 지어진 류석우의 기문을 보면 후손 이필원이 선대의 무덤 아래에 10대조 계은공(溪隱公) 이기(李垍,1636~1706)와 9대조 우와공(寓窩公) 이덕표(李德標,1664~1745) 부자를 기린 곳이라 하였으니, 용수선생과 계은공의 관계확인이 필요한 상황이다. 그리고 앞서 계은공이 내남이조에 세거한 경주최씨 최진립의 후손과 혼인한 인연으로 울산과 가까운 이곳에도 여강이씨의 자취를 찾을 수 있다는 점이 단서가 된다. 또 우와공은 1699년 진사에 올랐고, 기개가 호탕하고 덕망과 행실을 고루 갖춘 문인으로, 1722년 신임옥사(辛壬獄事) 때 장희빈의 신원(伸冤)을 주장하는 소를 올렸고, 관서 용천으로 귀양가는 등 굴곡진 삶을 살다가 비로소 노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자연에서 묻혀 살았다. 우연히 지나다 바라본 산자락 사이로 옛 선비의 자취가 보였고, 그 흔적을 더듬어보니 지난 경주의 역사가 손에 잡혔다. 아직도 후대의 손길을 바라는 경주의 조선 선비 이야기는 2021년에도 계속될 예정이다.월산정사기(月山精舍記) - 이계 이기희 동도의 남쪽 20리쯤에 월산(月山)이 있는데 그 산의 모습이 상현달과 같아서 이름지어졌으며, 용수(慵叟) 이(李) 공이 강학하던 곳이다. 공은 문원공 회재선생의 10세손으로 가학을 스스로 이어 학문연원의 바른길을 걸었고, 이미 훌륭한 자질과 뜻이 있었다. 절제된 행실은 고결하였고, 스스로 세상과 더불어 살아가지 못함을 알았다. 가난과 곤궁함을 이겨내고 오로지 경전을 정밀히 연구하였으며, 자신의 재능을 감추고 숨어 살면서 그곳에서 즐거워하며 평생을 살았다. 공은 일찍이 주역의 무궁함과 편절(編絶)의 남은 것을 갖고 도상(圖像)으로 상(象)을 드러내고, 주해(註解)를 더하였으며, 비록 고전(古傳)의 뜻을 말미암았으나, 고전의 뜻을 흐리지는 않았다. … 공께서 돌아가신 후에도 따라 배우는 여러 생원들과 멀고 가까운 사우(士友)들이 그를 위해 수계(修稧)하였는데, 지극한 정성 덕분에 월산 아래에 3칸 집을 짓고, 월산정사라 이름하고, 또 당의 북쪽에 앙지정(仰止亭) 3글자를 편액하였다. 북쪽을 뒤로하고, 남쪽을 바라보는 집의 창문과 방은 진실로 법도에 맞았다. 약간의 전토(田土)로 오랫동안 유지할 계획을 삼았고, 해마다 이곳에서 한 번 모여 공을 사모하였다. …주변에 스승과 벗이 없고 무리를 떠나서 거처를 찾는다면 잘못이 없기가 드무니, 이는 옛적 군자께서 글로 벗을 모으고, 인(仁)을 하도록 서로 도운 이유가 있는 것이다. 진실로 능히 때때로 마당에 물 뿌리고 쓸고, 당에는 책을 쌓아두고, 그 안에 고요히 앉아 서로 바라보며 각각 보고 들은 것으로 마주하여 질문하고, 의심나고 어려운 것을 구한다면, 지극히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저버림이 없을 것이다. 공께서 평소 여러 사람들에게 바라던 것은 아마도 이 정자가 세상의 가르침에 도움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 공사가 이미 마쳤으나, 기문이 없었고, 이희구(李僖久)의 간절한 거듭된 요청에 나는 공의 일에 대해 말솜씨가 없어 사양하였으나, 이에 감히 기문을 쓴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