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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부윤 민주면과 『동경지』 이야기

경주신문 기자 gjnews21@hanmail.net 1749호 입력 2026/10/08 10:22 수정 2026/10/08 10:38
경주의 조선 스토리(221)

오상욱 시민전문기자경북고전번역연구원원장확대
오상욱 시민전문기자
경북고전번역연구원원장
여흥민씨 수월당(水月堂) 민주면(閔周冕,1629~1670)은 증조부 민유부(閔有孚), 조부 민성휘(閔聖徽) 그리고 부친 민진량(閔晉亮)과 모친 기계유씨 유대비(兪大備)의 따님 사이에서 태어났다. 1648년(인조26) 진사에 오르고, 1653년(효종4) 문과에 급제, 성균관전적·시강원사서·승정원동부승지·장례원판결사·승정원승지 등을 요직을 역임하였고, 지방관으로서 국방과 민생을 돌보는 한편, 경주부윤으로 재임(1669.03~1670.04)하면서 가난한 백성들에게 베푸는 은혜가 두터워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고, 작자 미상의 『동경지』를 1669년(현종10)에 이채(李採) 등 향중 인사와 함께 편집하고 보완하여 『동경잡기(東京雜記)』를 편찬하여 신라의 역사와 경주의 문화유산을 기록·보존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동경잡기』는 신라의 고도인 경주의 역사와 지리, 행정, 인물, 문화 등을 기록한 읍지로, 『동국여지승람』의 체제를 바탕으로 조선 후기 읍지의 항목을 반영하였으며, 특히 신라기·불우·고적·인물 등에 신라시대의 역사와 문화가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다. 각방·각동에서는 경주부의 읍·면·리·동의 행정구역 등을 살필 수 있고, 신라의 가곡과 설화, 전설 등도 수록되어 있으며, 경제 관련 내용보다 역사·문화·인물과 시문에 큰 비중을 둔 것이 특징이다.

민주면은 1661년 비변사 좌목에서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비변사 관련 직책에 이름이 올랐는데, 당시 송시열은 당상, 민주면은 낭청으로 기록되어 있다. 민주면의 이복동생 민주경(閔周鏡)이 송시열의 서녀 속(粟)의 남편이고, 민주면의 서매(庶妹)가 명재(明齋) 윤증(尹拯,1629~1714)의 사촌동생 윤지(尹指)와 혼인하였으며, 혼반(婚班)으로 얽힌 관계에서 윤증이 민주면의 묘지명을 지었다.

간혹 윤증과 송시열 그리고 민주면의 관계를 오해하기도 하는데, 윤선거(尹宣擧)와 송시열은 김장생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한 동문·친구 사이였다. 1673년 윤증이 아버지 윤선거의 묘지명을 송시열에게 부탁했는데, 송시열은 윤선거의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하지 않은 행적과 주자 해석에 대한 비판과 독자적인 경전 해석의 윤휴와 절교하지 않은 점 등을 문제 삼았다. 윤증은 이것을 아버지에 대한 부당한 평가라고 받아들였고, 결국 두 사람의 사제관계가 크게 틀어졌었다. 그리고 윤선거가 송시열과 윤휴(尹鑴) 사이를 화해시키려 했는데 송시열 입장에서는 윤선거가 자신과 대립하는 윤휴와 계속 가까이 지내는 것이 달갑지 않았고, 윤선거가 윤휴와의 관계를 끊지 않은 점도 송시열과 윤선거 사이의 갈등 요소가 되었으니 이것이 회니시비(懷尼是非)의 발단이 되었다. 하지만 민주면은 1670년에 이미 사망했기에 송시열과 윤증의 대립으로 발생된 서인 간의 분쟁 즉 1684년 회니시비와는 별개의 의미를 갖는다. 윤증의 부친 윤선거를 매개로 윤휴와 송시열이 연결되고, 그 갈등이 윤증과 송시열의 사제 갈등 및 노론·소론 분당으로 이어졌다. 윤휴의 부친 윤효전(尹孝全) 역시 경주부윤(재임1617.04~1619.02)을 역임하였다.

1670년 4월에 근친(覲親)을 이유로 휴가를 받아 경주부에서 서울로 올라가 있었는데 남편을 살해하려고 모의한 죄인 진상(眞祥)의 일로 경주부윤에서 파직된 뒤 그해 말 사망하였다고 한다.

 


광주부윤 민공 묘지명 - 명재유고 윤증


공은 이미 재지(才智)를 인정받아 중임을 맡았으므로 나라에 보답하려는 생각으로 온 마음을 다해 군인과 백성을 돌보아 그들의 마음을 얻었다. 하지만 법에 따라 조금의 굽힘도 없이 정사를 행하여 그 직책에 오래 있지 못하고 파직되었다. 한참 후에 승정원 동부승지에 제수, 우부승지에 올랐다가 체차되어 장례원(掌隷院) 판결사(判決事)로 옮겼다가 다시 은대(銀臺:승정원)를 거쳐 경주부윤이 되었다. 경주는 풍토가 좋지 않아 사람들이 공에게 가지 말라고 권유하였는데, 공이 웃으며 “나더러 교활하게 관리 노릇하는 것만 배우란 말인가. 하물며 신하된 도리로 어찌 감히 찬 곳 더운 곳을 가리겠는가.”라고 하였다.


「明齋遺稿」 卷16, 「廣州府尹閔公墓誌銘」 (『명재유고』 권16, 「광주부윤 민공 묘지명」). <이미지=오상욱 제공>확대
「明齋遺稿」 卷16, 「廣州府尹閔公墓誌銘」 (『명재유고』 권16, 「광주부윤 민공 묘지명」). <이미지=오상욱 제공>
경주는 평소 큰 고을로 불려 왔으며, 게다가 여러 해 흉년이 들어 관리와 백성은 지쳐 있었다. 공은 번거로운 절차들을 간소화하여 궁핍한 백성을 구휼하고, 또 적체된 옥사와 송사를 속히 처리하니 온 고을 사람들이 칭송하였다. 공은 경주가 옛 도읍지로서 충효와 절의, 민요와 풍습 가운데 계승할 만한 것이 많이 있는데도 문헌이 부족한 탓에 장차 민멸되고 말 것이라 우려하여 마침내 자료를 수집하고 탐방 조사하여 『동경지(東京志)』 3권을 편찬하였다. 경술년(1670,현종11) 여름에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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