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홈 홈 오피니언 연재 경주인문학산책

초의선사의 시로 읽는 불국사

경주신문 기자 gjnews21@hanmail.net 1748호 입력 2026/10/01 10:21 수정 2026/10/01 10:28

현재의 불국사. <사진=전인식 제공>확대
현재의 불국사. <사진=전인식 제공>
초의선사(1786~1866)는 명맥만 이어져 오던 한국 다도를 중흥시켰기에 한국 차문화 중흥조(中興祖) 또는 다성(茶聖)으로 칭한다. 초의선사의 생애와 사상을 ‘다선일미(茶仙一味)’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 지성인으로, 당대의 고승으로 한 시대를 살았다. 선 수행은 물론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로 이름이 높았다. 이외에도 탱화, 범패, 단청, 바라춤까지 못 하는 것이 없었다. 불교뿐만 아니라 도교와 유교에도 능통하였으며, 학문과 차를 통해 당대의 지식인들과 소통하며 교류했다. 강진에 유배 중이던 다산 정약용과 교류했으며, 동갑내기 추사와는 평생지기 친구로 교류했다. 남종화의 대가 소치 허련에게 가르침을 주기도 했다. 이렇듯 시서화차(詩書畵茶)로 맺은 인연으로 많은 이야기를 후대에 남겼다.

일제시대 불국사. <사진=경주시립도서관>확대
일제시대 불국사. <사진=경주시립도서관>
지리산 칠불암에서 『다신전』을, 일지암에서 『동다송』을 저술, 편찬하며 우리나라 차를 정립하고 집대성했다. 우리나라 차 문화는 초의선사를 떼고 말할 수가 없다. 대흥사 천불전 상량문 등 명문장으로 이름을 알렸으며, 해남 대흥사 13대 종사로 활동했다. 대흥사와 일지암을 중심으로 활동한 그가 먼 경주까지 온 이유는 무엇일까.

초의선사의 출생지인 무안군 홍보자료에는 초의선사가 불국사(佛國寺)에서 득도(得道)했다고 적고 있다. 불국사에서 득도한 근거를 어디에서 찾는지 궁금하다. 초의선사는 호남 중심으로 활동했지만, 전국을 주유하며 여러 사찰, 여러 사람과 교류했다. 기록상 불국사에 머문 것은 길어도 두 달 이내다. 길지 않은 동안 불국사에서 머물며 아홉수의 시를 남겼다. 시 속에는 우리가 모르는 불국사의 누각이 있고, 우리가 모르는 내용의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초의선사의 시 속으로 들어가서 불국사를 살펴본다. 참고로 초의선사의 경주 불국사 회고시 1~7시는 김진영 배규범 저 『초의선사 의순의 시』를 인용했으며, 8~9시는 박동춘 역을 인용했다.


불국사에서 옛일을 생각하며 (9수)


정축년(1817년) 6월 경주에서

1
안개 숲 꾀꼬리 우니 푸르름 아득하고 (野鸎煙樹綠迢迢)
쓸쓸한 절 사람 없어 대낮에도 고요하다 (簫寺無人晝寂廖)
취죽루는 녹량각으로 이어 있고 (翠竹樓連綠陽閣)
자하문은 백운교를 마주했네 (紫霞門對白雲橋)

자하문과 백운교는 그대로 있는데, 취죽루와 녹량각은 어디일까? 현 불국사 홈페이지 전각 소개란에는 나와 있지 않다. 그때는 있었고 지금은 없는 누각일까?

2
승천교 밖 구연지에는 (昇天橋外九蓮池)
칠보로 단장한 누대 비쳐있네 (七寶樓臺水底移)
무영탑에서 그림자 보니 (無影塔看還有影)
아사녀가 지금도 비치는 듯 (阿斯來鑑到今疑)

승천교는 어디일까? 청운교, 백운교, 칠보교, 연화교 말고 또 다른 다리가 있었을까?

아니면 4개의 다리를 달리 부르는 별칭이 있었을까?

구품연지의 존재는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일제시대 개보수 공사하다 메꾸었고, 1970년 발굴 당시에도 확인한 바 있다. 조성 비용과 관광객 감소를 이유로 복원하지 못했다. 구품이란 불교에서 극락으로 가는 단계를 삼품(하품 중품 상품)과 삼생(하생 중생 상생)으로 나누고 다시 세 개씩으로 나눈다. 구품이란 최고의 단계를 말한다. 구품연지 없는 불국사는 제 모습이 아니다. 언젠가는 청운교 백운교 아래 연꽃이 환하게 피어 있는 구품연지를 볼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무영탑과 아사녀에 대한 이야기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3
인적 드문 고운 난간 지는 꽃 향기로와 (雕欄人精落花香)
연초록 맑은 그늘 땅 가득 서늘하네 (嫩綠淸陰滿地凉)
광학당 동쪽 벽 아래 걸음 멈추니 (行到學藏東壁下)
어슴푸레 헌강왕의 초상이 떠오르네 (依俙猶記憲康王)

광학당은 어디일까? 광학당 동쪽 벽에 헌강왕의 초상화는 왜 있었을까? 불국사는 경덕왕 때 지었는데 헌강왕과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 헌강왕은 신라전성기 시절의 임금이다. 절을 지은 김대성과 시기적으로 100년 이상 차이가 난다. 어떤 스토리가 숨어 있을지 궁금하다.

4
찰간에는 장림사로 되어 있는데 (刹竿本表藏林寺)
영락하여 지금은 무성한 풀길에 묻혔네 (零落今埋荒草蹊)
향대로 가는 길 찾을 길 없어 (無緣覓覓香臺路)
바람에 넝쿨만이 어지러이 흩날리네 (豊蔓烟羅帀地迷)

찰간이란 덕이 높은 승려가 있음을 알리기 위하여, 나무나 쇠로 만들어 절 앞에 세우는 깃대 모양의 물건이다. 장림사는 또 뭘까? 불국사를 달리 부르는 이름일까? 수수께끼같이 등장하는 절 이름이다.

5
붉은 난간 떠다니는 자단향 연기 (朱欄浮動紫丹烟)
옛 절에는 청정한 스님네만 남았네 (古殿唯餘淨侍禪)
정원의 방초를 죄다 뽑고서 (剗却中廷芳艸了)
한가로이 불자 쥐고 꽃보며 졸고 있네 (閒持白拂對花眠)

자단향이란 붉은 빛이 나는 향이다. 예전에는 향이 지금보다 훨씬 보편화되어 있었다.

동남아나 중국의 사찰을 방문하면 알 수 있다.

6
중서에서 교지 받아 베껴놓은 불경들 (中書奉敎寫眞詮)
옥섭과 아첨은 비단으로 수를 놓았다네 (玉躞牙籤錦繡纏)
남긴 모습 찾아봐도 죄다 흔적도 없으니 (行覓遺芳都冷了)
한 수 읊으려니 맑은 눈물 화선지를 적신다 (題詩淸淚染華牋)

중서는 궁중의 문서를 맡아보는 관리를 뜻한다. 비단으로 수를 놓은 사람 같기도 하지만 사전적 뜻은 옥으로 만든 책의 축과 상아로 만든 책갈피인데, 의역하면 보배롭게 꾸민 장식품으로 볼 수 있다. 옥석과 아첨의 뜻 정확히 알 수 없다.

7
구름 같은 귀밑머리 비녀가 떨어지고 (雲鬂毁形落寶扠)
누런 치마 자줏빛 가사로 갈아 입었네 (黃裳新換紫袈裟)
추상같은 혼백만 아련히 남았건만 (霜魂雪魄依俙在)
우담발화 난간 끝에 붉은 가루 날린다 (紅粉闌頭佛鉢花)

우담발화는 우담바라를 말한다. 『무량수경』을 비롯한 여러 불경에서는 꽃을 보면 좋은 일이 생기거나 좋은 일이 생기는 상스러운 꽃으로, 드물고 귀한 꽃으로 알려져 있다. 꽃의 실체보다는 상징적인 요소로 보면 될 것 같다.

8
김대성 자란 마을 아직도 그대로인데 (生長大成尙有邨)
오랜 역사 모량리, 부운리가 되었구나 (牟梁萬古變浮雲)
복안이 발원한 인연으로 태어난 아들이니 (福安熏發因緣子)
누가 점개 스님 보내 육륜을 설했나 (誰遣開師設六輪)

불국사와 석굴암을 김대성의 발원으로 지은 절이다. 초의선사는 불국사에 와서 김대성을 회고하며, 이 시 하단에 사지(寺志)를 인용하여 “재상 김대성은 전생에 걸인이었다. 점개(漸開)라는 스님이 육륜 법회를 위해 복안의 집으로 시주를 왔다가 걸인이 구걸한 돈을 시주하니 그 발원으로 김대성으로 다시 태어나서 모량에 살았는데 지금은 부운리로 바뀌었다”라고 적고 있다. 모량리가 부운리로 바뀌었다는 것은 아마도 행정구역이 변경되었던 것으로 추정해 본다. 현재 모량리에서 조금 가면 서면 운대리에 부운지(浮雲池)가 있다. 선덕여왕이 연꽃을 보러 행차했던 곳으로 기록이 있다. 2003년 전후 부윤지에 천년 만에 연꽃이 피었다는 소식을 달려갔던 기억이 있다. 육륜은 윤회하는 여섯 가지 즉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을 말한다.

9
추사 선생 오래도록 길에 있는 것, 생각하기 어려워 (苦憶先生久在行)
자하문 밖 맑게 갠 하늘을 보네 (紫霞門外看新晴)
세상에서 불국은 차라리 얻기 쉽지만 (佛國人間寧易得)
서로 만나서 편안한 정을 다할 수 있을까 (相邀始可遂閒情)

초의선사가 고대했던 추사와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시를 쓴 시기는 1817년 6월에서 8월 사이였다. 추사는 1817년 4월 29일 경주에 와서 무장사지 비편을 찾았고 분황사와 진흥왕릉을 방문한 후 흔적을 남기기도 했다. 대략 보름 전후 머물다 상경했다. 당시는 요즘처럼 통신 사정이 좋은 시대가 아니었다. 연락 취할 방법이 겨우 서신 정도인데 전달되기에는 몇 달의 시차 발생할 수 있다. 많은 상황 변화와 변수도 등장할 여지도 많아 쉽게 시간 약속을 예측할 수 없던 시대였다.

2년 전이던 1815년 수락산 학림암에서 첫 만남 이후 서로를 그리워한 것은 시와 편지로 확인 가능하다. 못내 아쉬워 재회를 바랐던 초의선사의 마음이 행간에 묻어난다. 마지막 시를 두고 사람들은 마치 추사와 초의가 경주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듯 표현하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과 다르다.

추사와 초의선사에 다산 조선 후기 3대 천재 지성들에 대한 소설을 일생 일대작으로 삼고 있는 한승원 소설가는 초의선사는 경주에 가지 않았다고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확실하게 왔다는 것은 이 시로 증명하고 남는다. 추사는 4월 말에 와서 보름 정도 있다가 갔고, 초의선사는 6월에 와서 8월까지 머물렀다. 한마디로 타이밍을 맞추지 못한 것이다.


초의선사는 경주에 왜 왔을까?


초의선사가 경주 불국사에 왔던 시기는 32세 무렵이던 순조 17년, 1817년 6월경이다. 한반도 땅끝 해남 대흥사에서 이곳 경주까지 무슨 이유로 먼 길을 찾아왔을까? 경주 불국사로 온 이유는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첫째, 추사가 경주로 다시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나 둘째, 한양에서 교류했던 지인들을 불국사에서 어느 해 어느 때쯤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거나 셋째, 기림사에서 불상 조성 관계 일로 왔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추사와 초의선사에 관한 수권의 도서를 찾아 책을 뒤적이며 연구한 바로는 셋째가 가능성이 가장 높다. 해남 대흥사의 일과 유추해 보면 알 수 있다. 초의선사의 스승 완호스님은 화재로 소실된 대흥사 천불전 복원을 위해 제자들을 기림사로 보내 불상을 제조하게 했다. 처음부터 초의선사는 오지 않았다, 아마도 추사가 경주로 갈 것이라는 소식을 전해 듣고 만나보고 싶은 마음에 완호스님에게 간청했을 것이다. 앞서 초의선사가 서울로 갔던 것도 불상을 만들 조각승과 화승들을 섭외하기 위한 목적이었을 것이다. 초의선사는 시, 서, 화는 물론 탱화 등 예술 전 분야에 탁월했다. 한양에서 혜붕스님을 통해 추사를 만날 수 있었고 그 첫 대면 이후 만나고 싶은 심사에 경주로 자청해서 왔던 것이다. 증명할 만한 것이 시 아홉수 외에 없다는 것이 아쉽다. 기림사나 불국사에서 잘 하면 자료가 나올 법도 하다.

초의선사 짓고 머물렀던 해남 대흥사 일지암. <사진=전인식 제공>확대
초의선사 짓고 머물렀던 해남 대흥사 일지암. <사진=전인식 제공>
200여 년 전 초의선사의 시를 통해 불국사의 모습을 더듬어 회상해 볼 수 있었다. 불국사를 다녀가며 글을 남긴 시인 묵객들은 많지만, 초의선사처럼 많은 시를 남기지는 않았다. 전국에서 초의선사를 기리는 행사가 다채롭게 펼쳐지고 있다. 대흥사가 있는 해남군에서는 매년 10월 초의 문화제를 개최하고, 무안군에서도 5월 탄생일에 맞춰 초의 문화제를 개최하고 있다. 차와 관련된 여러 단체에서도 초의선사를 기리는 다례제를 개최하고 있다. 초의선사에게 차를 올리는 마음 대신해서 이렇게 졸문 한 편으로 공양에 갈음코자 한다.

확대
전인식 시인(전문기자)

저작권자 © 경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