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이슬
마종기
얼마 전 한 열흘 제주도에 머물 때
눈을 반짝이며 노래하는 이슬들을 만났지.
몸통이 보통보다 작기는 했지만
누구를 기다리면서 안 기다리는 척하는
일찍 잠이 깬 그 눈들이 얼마나 반갑던지.
그 섬에는 내가 아는 친구가 많아서 그런가,
음악가도 있고 시인도 있고 죽은 화가도 있는데
이슬 때문에 깨끗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인지
이슬 때문에 젖은 삶을 여미며 살고 있는 것인지
모두들 바람 속의 큰 바다처럼 살고 있었다.
(중국의 삼오역기에는 1만 8천 년을 잠만 자다가 깨어난 반고의 눈물이 바로 이슬이라는데 자기 몸을 죽여 세상을 만들었다는 반고는 왜 세상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며 하염없이 울었을까.)
(뉴질랜드에서는 생시에 눈치 보여 울지 못하던 아버지가 죽어서 자식 위해 밤새우는 눈물이 이슬이라는데. 그 이슬들 너무 많아 풀밭의 고사리가 모두 나무로 자라 숲이 되었다는데….)
(그리스 새벽의 여신 에오스가 죽은 아들을 슬퍼하며 흘리는 눈물이 또 이슬. 이슬이 누군가의 눈물이라는 것은 전부터 알았지만 저 많은 제주도 이슬은 도대체 누구의 눈물이란 말인가.)
아침이 활짝 피어나기도 전에 도망가듯
말없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이슬이여,
이슬 앞에서 내 시는 할 말을 다 잊었지만
그건 원래 혼자서 떠돌던 내 피였고 꿈이었어.
힘들었던 일 어려웠던 시간 모두 지났다지만
그래도 눈물이 끝까지 나를 이끌어주기를.
더러워진 평생을 당신의 이슬이 늘 씻어주기를.
이슬, 삶의 신산과 아픔을 씻어주는 누군가의 눈물
시인은 “그 섬에는 내가 아는 친구가 많아서 그런가,” 딴전을 부리듯 말한다. 그들은 모두 불행 속에서도 반짝이는 이슬처럼 살아온, 살다 간 예술가들인데, 시인은 그것을 남몰래 흘리는 눈물(이슬) 때문에 깨끗한 삶을 살고 있으며, 그 눈물 때문에 “젖은 삶을 여미며 살”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바람 속의 큰 바다처럼” 거친 환경 속에서 흔들리며 삶을 이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귀포 시절의 이중섭, 변시지의 삶이 그렇지 않았는가.
시인은 이슬이 눈물이라는 불변의 연원을 따라가기 위해 “세상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며 하염없이 울”었던 중국의 반고, 자식 앞에서 울 수 없었던 뉴질랜드의 “아버지가 죽어서 자식 위해 밤새우는 눈물”, 그리스 새벽의 여신 에오스가 죽은 아들 멤논을 “슬퍼하며 흘리는 눈물이 또 이슬”이라는 신화를 가져온다. 이어지는 “저 많은 제주도 이슬은 도대체 누구의 눈물이란 말인가.”는 다 표현하지 못하는 섬사람들의 역사적인 고난과 이재수 같은 ‘장두’의 죽음, 4.3의 희생 앞에서 흘린 육친들의 눈물을 암시한다.
그래서 시인은 마지막 연에서, 아침이 피어나기도 전에 “말없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이슬” 앞에서 “혼자서 떠돌던 내 피였고 꿈”인 “내 시는 할 말을 다 잊”는다고 고백하고 자신의 “더러워진 평생을” 제주도 “당신의 이슬이 늘 씻어주기를” 희구하는 것이다.
제주의 자연과 역사를 사랑하는 참 애잔한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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